바울은 아테네를 떠나 고린도로 갑니다. 고린도는 고대 역사로 미루어 보아 주전 8세기부터 도시 국가를 형성했던 오래된 도시였습니다. 고린도(Corinth)는 '뿔'이란 뜻을 가지고 있습니다. 고린도는 아테네와 스파르타등과 경쟁할 만큼 힘이 있고 번성했던 강력한 도시 국가였습니다.
고린도는 아테네 서쪽 64㎞ 지점에 위치한 고린도는 펠로폰네소스 반도에 위치한 아가야 주(州)의 수도요 항구도시입니다. 헬라 본토와 펠로폰네소스를 연결하는 지협(Isthmus)에 있습니다. 지협(Isthmus)이 유명해 고린도 지역 국제 운동 시합인 이스트미아 대회(Isthmian Game) 이름이 됩니다.
고대 헬라에는 각 도시의 신들을 위한 축제인 4개의 국제 스포츠 시합이 있었습니다. 아테네의 올림피아대회, 델포이의 피티아대회, 고린도의 이스트미아대회, 네메아의 네메아대회가 있었습니다. 올림피아와 네메아는 제우스를 위한 축제였고, 이스트미아는 바다의 신 포세이돈을, 델포이의 피티아는 아폴로를 위한 제전이었습니다. 고린도 이스트미아대회는 달리기 시합이 유명했는데 이를 고려한 메시지가 고전9장 24절 이하에 나타납니다.
고린도는 서쪽으로는 2Km 지점에 레가에움 항구가 있었고, 동쪽으로는 7Km지점에 겐그리아 항구(롬16:1)가 있었습니다. 따라서 고린도는 바다와 육지를 연결하는 교통의 요충지였습니다. 따라서 고린도는 상업적, 군사적 거점도시였습니다. 그래서 동서의 무역상들이 고린도를 통해 무역을 했습니다. 그 결과 그리스에서 가장 부유하고 사람의 왕래가 많은 도시였습니다.
고린도 운하는 세계 3대 운하 중에 하나입니다. 수에즈, 파나마 그리고 고린도 운하입니다. 고린도의 지형 때문에 B.C. 6세기에도 운하 건설이 고려되었고, 로마의 네로 황제가 A.D 67년에 수천 명의 죄수를 동원하여 운하 건설을 시도했지만 실패했고 19세기 프랑스의 기술로 완성되었습니다.
고린도의 도시 규모는 상당한 수준이었습니다. 고린도가 아테네의 8배라고 주장하는 학자도 있습니다. 또 문화적으로도 발달된 문화 도시였습니다. 건축술과 수사학은 아테네를 능가했습니다. 학문, 종교, 문화, 무역 그리고 행정의 중심지가 된 고린도는 그리스 로마시대를 대표적인 도시였습니다.
고린도는 B.C. 146년 로마의 뭄미우스(Lucius Mummius)장군에 의해 점령되었습니다. 이때 수많은 고린도 시민들이 학살당하거나 노예로 팔려갔습니다. 그 후 약 100년 동안 고린도는 거의 폐허상태로 있다가 B.C.44년에 로마의 시이저(Julius Caesar)황제가 칙령을 선포하며 로마 식민지로 재건하였습니다. 그리고 B.C. 27년에 로마 총독이 고린도에 부임함으로 고린도가 아가야(Achaia)지역의 행정수도가 되었습니다.
사도바울이 방문할 즈음 고린도는 과거의 영광을 회복하여 국제도시로 번성하고 있었습니다. 고린도의 인구는 자유시민이 20만이고 노예가 50만이 거주하는 대 도시였습니다. 그런데 국제도시인 고린도에는 헬라-로마 제국의 각 지역에서 이주해온 다양한 민족들로 구성되어 있었습니다. 이중에 약 3만 명이 유대인이 있었고 고린도에 다수의 회당이 있었습니다. 그래서 바울이 고린도에 방문해서 회당에서 말씀을 전할 수 있었던 것입니다.
고린도는 각 나라 사람들이 가지고 왔던 각국의 신들과 각종 신들을 섬기는 우상들이 우글거리는 우상의 도시였습니다. 고린도에는 12개의 주요 신전이 있었습니다. 신전의 유적들은 당시 웅장한 신전의 규모를 보여줍니다. 아폴로 신전의 7개 기둥들과 옥타비아누스 황제 신전 기둥들이 그 시절의 섬세한 건축술을 보여줍니다. 이런 신전 유물은 고린도의 경제적 상황과 건축술을 포함한 문화의 발달을 엿보게 합니다.
고린도에 있었던 신전들에는 수시로 제물이 있는 제사가 있었고 제물로 사용된 고기들이 시장에 나왔습니다. 제물로 사용되었던 고기는 비교적 싼 값에 유통되었고 가난한 사람들은 우상에 제물로 드려진 고기를 애용하였습니다. 고린도 교회 가난한 성도들에게 우상의 제물 고기를 먹는 것은 실존적인 삶의 문제였고 자연이 고린도 교회의 이슈가 되었던 것입니다.
12개의 신전 중에 사랑의 여신 '아프로디테(비너스)여신의 숭배자들은 종교 행사로 매음을 했습니다. 매음이 종교 행사의 일부였던 것입니다. 아프로디테 신전 여사제들은 매음에 종사했습니다. 바울이 고린도를 방문하고 교회를 세울 당시 1000명 정도의 여사제들이 매음을 했다고 전해집니다. 아프로디테 신전의 종교적 음행이 고린도를 타락시켰습니다.
그래서 고린도의 성적 타락은 고대 여러 문서에서 나타납니다. 그래서 고린도라는 말은 성적 부도덕(immorality)의 동의어가 되었습니다. 또 '고린도인과 같이 행한다(Corinthianize)!'라는 말은 '성적으로 타락하다'라는 의미가 되었습니다. 참고로 고린도에서는 수사학이 발달했습니다. 그래서 '고린도인과 같이 말한다!'라는 말은 '말이 유창하다.'는 의미가 되었습니다. 여하간 성적 타락은 고린도의 문화였고, 이런 도시의 문화로 말미암아 자연스럽게 성적인 타락이 고린도 교회 윤리적 문제가 되었습니다.
성경은 역사의 산물입니다. 사도행전의 고린도 사역이나 고린도 전후서는 1세기 고린도 도시의 문화가 투영되어 있습니다. 고린도 도시를 살펴볼수록 섬세한 문화적 감각을 가진 사도 바울에 감탄합니다. 아울러 고린도 현장을 살았던 신앙인들의 도전과 아픔을 엿볼 수 있습니다. 풍요, 화려, 타락으로 특징되는 시대를 사는 현대인들이 주목해야 할 도시가 고린도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