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람들은 모두 크고 작은 상처들을 받으며 살아간다. 그 상처의 깊이에 따라 그 사람의 성격이 결정되어 지기도 하고 그 상처에 대해 대처하는 방법에 따라 심각한 인격장애가 되거나 아니면 그 반대로 잘 치유받은 이후에 타인을 이해할 수 있는 성향의 사람으로 길러지기도 한다.
때때로 깊은 상처는 가족을 통해서 오는 것을 많이 본다. 가족들 안에 깊이 새겨진 상처들은 가족 구성원 모두를 힘들게 하고 그 가정의 기쁨과 행복을 모두 빼앗아버리게 되는 것이다.
얼마 전에 있었던 일이다. 지하철을 타기 위해 계단을 내려가고 있었다. 내 앞에 두 살 쯤 으로 보이는 어린 아이의 손을 잡은 젊은 엄마가 힘없이 내려가고 있었다. 그 엄마의 뒤에는 10살 쯤 되어보이는 남자아이가 1미터쯤 떨어져서 터덜터덜 내려가고 있었다.
이 엄마는 두 살짜리 아이를 단 한번도 쳐다보지 않고 손을 끌 며 자기의 걸음걸이 보폭과 속도를 조금도 늦추지 않은 채 계단 을 내려가고 있었다. 아이는 너무 작았고 아이의 다리 길이만한 계단의 높이는 아이에게 버거워보였다. 뒤에서 그 모습을 보며 너무 안스러워 엄마가 아이를 한번만이라도 쳐다보기만을 기다렸다.
내가 가서 번쩍 안아서 계단을 내려 줄까...계속 망설이던 중에 이 아이는 낑낑거리며 엄마에게 끌려 내려가다가 마침내는 주저앉아버렸다. 주저앉아서도 손을 끌어당기는 엄마의 팔 힘에 이끌려 엉덩방아를 찢으며 계단을 내려가고 있었다. 그때 그 엄마는 아이의 머리를 때리며 왜 주저앉고 난리냐며 소리를 질렀다.
‘뭐 저런 엄마가 다 있지...?’
웃음기 없는 큰 아이는 계속 멀찌감치 떨어져 엄마의 눈치를 보며 따라가고 있었고 나는 그 자리에 멈춰서서 이 세 모자 일행에게서 눈길을 떼지 못한 채 지켜보고 있었다. 그때 얼핏 30대로 보이는 그 엄마의 옆얼굴이 잠깐 비춰졌다. 순간 나는 알았다. 그 여인의 지치고 상처입은 삶의 일부분을...
지쳐있는 여인에게 자식은 또 다른 무거운 짐처럼 여겨졌을까... 자식을 사랑하는 것은 그 누구도 거부할 수 없는 원초적인 모성애에서부터 시작되는 것이고 어떤 일이 있어도 자식을 버릴 수 없는 것이 어머니의 마음이 아닌가.
눈에 넣어도 아프지 않을 자식이 눈에 들어오지 않을 만큼의 아픔은 무엇일까? 이 여인의 모습에서는 생을 포기한 사람의 깊은 절망이 묻어나오고 있었다.
여러 달 전의 사건이 잠깐 뇌리를 스쳐지나갔다. 세 아이를 높은 아파트 위에서 던지고 자신도 뛰어내린 비정한 엄마의 이야기...
그 때 나는 한 동안 일손을 잡지 못하고 아파했었다. 삶의 고단함과 살아가는 매순간마다 우리를 누르는 생의 무게들, 예기치 않은 아픔과 고난들, 타인으로부터의 상처들, 우리가 원치 않는 일상의 크고 작은 사건들 속에서 우리는 앞으로 나아갈 수 없을 만큼 지치기도 한다. 우리의 힘으로 어쩌란 말인 가...
더구나 가족 안에서 시작된 미세한 균열을 그대로 방치해두면 우리는 정말로 살아갈 의미를 잃게 된다. 가정이 살아야 교회가 살고 사회가 살고 나라가 산다. 무너지는 가정들...무너지는 아빠와 엄마, 무너지는 아이들... 미세한 균열이 시작될 때 더 이상 부서져내리지 않도록 막아내야 한다. 그 힘은 예수 그리스도로부터 나온다. 우리의 모든 아픔을 대신 지신 십자가에 그 해답이 있다.
절망의 빛이 서려있는 얼굴에서 기쁨이 피어오르도록 도와주고 싶다. 그 일은 내안에 흘러들어온 예수 그리스도의 사랑을 다시 내보낼 때 가능한 일이다.
우리는 모두 절망의 한가운데서 빛 가운데로 나아가는 법을 배워야 한다. 그 지친 엄마의 얼굴에 묻어있는 어둠과 상처를 지워주고 싶다. 엄마가 행복해져야 아이들도 행복해질 것이다. 아이들의 얼굴에서 웃음을 다시 찾아줄 수 있다면 무슨 일이든 하고 싶다.
곳곳에 있는 슬픈 가족 구성원들을 본다. 이 시대에 사탄은 가장 먼저 가정을 공격하기 시작했나 보다. 그러나 이제 우리는 승리할 수 있다. 우리에게 주신 사랑의 힘으로...
ⓒ 낮은울타리 가정예배사역원 강선영 원장 www.wooltari.com 333-1316
때때로 깊은 상처는 가족을 통해서 오는 것을 많이 본다. 가족들 안에 깊이 새겨진 상처들은 가족 구성원 모두를 힘들게 하고 그 가정의 기쁨과 행복을 모두 빼앗아버리게 되는 것이다.
얼마 전에 있었던 일이다. 지하철을 타기 위해 계단을 내려가고 있었다. 내 앞에 두 살 쯤 으로 보이는 어린 아이의 손을 잡은 젊은 엄마가 힘없이 내려가고 있었다. 그 엄마의 뒤에는 10살 쯤 되어보이는 남자아이가 1미터쯤 떨어져서 터덜터덜 내려가고 있었다.
이 엄마는 두 살짜리 아이를 단 한번도 쳐다보지 않고 손을 끌 며 자기의 걸음걸이 보폭과 속도를 조금도 늦추지 않은 채 계단 을 내려가고 있었다. 아이는 너무 작았고 아이의 다리 길이만한 계단의 높이는 아이에게 버거워보였다. 뒤에서 그 모습을 보며 너무 안스러워 엄마가 아이를 한번만이라도 쳐다보기만을 기다렸다.
내가 가서 번쩍 안아서 계단을 내려 줄까...계속 망설이던 중에 이 아이는 낑낑거리며 엄마에게 끌려 내려가다가 마침내는 주저앉아버렸다. 주저앉아서도 손을 끌어당기는 엄마의 팔 힘에 이끌려 엉덩방아를 찢으며 계단을 내려가고 있었다. 그때 그 엄마는 아이의 머리를 때리며 왜 주저앉고 난리냐며 소리를 질렀다.
‘뭐 저런 엄마가 다 있지...?’
웃음기 없는 큰 아이는 계속 멀찌감치 떨어져 엄마의 눈치를 보며 따라가고 있었고 나는 그 자리에 멈춰서서 이 세 모자 일행에게서 눈길을 떼지 못한 채 지켜보고 있었다. 그때 얼핏 30대로 보이는 그 엄마의 옆얼굴이 잠깐 비춰졌다. 순간 나는 알았다. 그 여인의 지치고 상처입은 삶의 일부분을...
지쳐있는 여인에게 자식은 또 다른 무거운 짐처럼 여겨졌을까... 자식을 사랑하는 것은 그 누구도 거부할 수 없는 원초적인 모성애에서부터 시작되는 것이고 어떤 일이 있어도 자식을 버릴 수 없는 것이 어머니의 마음이 아닌가.
눈에 넣어도 아프지 않을 자식이 눈에 들어오지 않을 만큼의 아픔은 무엇일까? 이 여인의 모습에서는 생을 포기한 사람의 깊은 절망이 묻어나오고 있었다.
여러 달 전의 사건이 잠깐 뇌리를 스쳐지나갔다. 세 아이를 높은 아파트 위에서 던지고 자신도 뛰어내린 비정한 엄마의 이야기...
그 때 나는 한 동안 일손을 잡지 못하고 아파했었다. 삶의 고단함과 살아가는 매순간마다 우리를 누르는 생의 무게들, 예기치 않은 아픔과 고난들, 타인으로부터의 상처들, 우리가 원치 않는 일상의 크고 작은 사건들 속에서 우리는 앞으로 나아갈 수 없을 만큼 지치기도 한다. 우리의 힘으로 어쩌란 말인 가...
더구나 가족 안에서 시작된 미세한 균열을 그대로 방치해두면 우리는 정말로 살아갈 의미를 잃게 된다. 가정이 살아야 교회가 살고 사회가 살고 나라가 산다. 무너지는 가정들...무너지는 아빠와 엄마, 무너지는 아이들... 미세한 균열이 시작될 때 더 이상 부서져내리지 않도록 막아내야 한다. 그 힘은 예수 그리스도로부터 나온다. 우리의 모든 아픔을 대신 지신 십자가에 그 해답이 있다.
절망의 빛이 서려있는 얼굴에서 기쁨이 피어오르도록 도와주고 싶다. 그 일은 내안에 흘러들어온 예수 그리스도의 사랑을 다시 내보낼 때 가능한 일이다.
우리는 모두 절망의 한가운데서 빛 가운데로 나아가는 법을 배워야 한다. 그 지친 엄마의 얼굴에 묻어있는 어둠과 상처를 지워주고 싶다. 엄마가 행복해져야 아이들도 행복해질 것이다. 아이들의 얼굴에서 웃음을 다시 찾아줄 수 있다면 무슨 일이든 하고 싶다.
곳곳에 있는 슬픈 가족 구성원들을 본다. 이 시대에 사탄은 가장 먼저 가정을 공격하기 시작했나 보다. 그러나 이제 우리는 승리할 수 있다. 우리에게 주신 사랑의 힘으로...
ⓒ 낮은울타리 가정예배사역원 강선영 원장 www.wooltari.com 333-13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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