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 요 12:1-8
제목 : 마리아는

‘만나 선교회’는 북한과 동북아시아 지역 선교를 하고 있습니다.

선교는 무엇인가? 미션, 미션은 하나님의 일인데, 하나님의 일이 무엇입니까? 하나님의 일은 사람을 사랑하는 것입니다. 만나 식구중에 하나님의 일을 하실 분 있으면 당분간 쉬시면서 기도하십시오라고 했습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일을 하지 않으면 하나님은 일을 더 잘하실 수 있습니다. 항상 사람이 하나님의 일을 할 때 안타까운 일들이 많이 일어납니다. 인류 역사에서 가장 많은 죄악을 일으킨 것이 기독교입니다. 불교나 다른 것들을 보면 본질상 잔인해 질 수가 없는 것들입니다. 사람이 하나님의 일을 할 때 잔인해집니다. 하나님의 일을 한다는 명목으로 모든 것들이 정당화되기 때문입니다.

기독교가 일으킨 전쟁이 가장 잔인합니다. 유럽에 30년 전쟁이 있었습니다. 기독교와 프로테스탄트가 30년동안 전쟁을 한 것입니다. 보통 전쟁은 군인과 군인이 싸우죠. 그런데 종교전쟁을 보면 어린아이, 여자 할 것 없이 다 죽입니다. 왜? 서로 상대편의 자식이 사단의 자식이라고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보헤미아는 전쟁이전에 인구가 4백만명이었습니다. 그러나 전쟁후엔 70만명으로 줄었습니다. 한 가정이 평균 다섯 명이라고 한다면 1명 빼고 다 죽은 셈입니다. 독일은 전쟁 이전에 3천만명이었던 인구가 전쟁 이후엔 1천 2백만명으로 줄었습니다. 인류역사에서 이런 전쟁은 없었습니다.

사람이 하나님의 일을 하겠다고 하는 것. 하나님의 일은 사람을 사랑하는 것입니다. 어떤 일을 하던지 먼저는 그것이 내게 기쁨이 되어야 합니다. 내게 기쁨이 되지도 않는 데 하나님의 일을 한다고 하면서 그 일을 하는 사람이 있다면 그것은 위선이나 쓸데없는 책임의식 같은 것 때문에 하는 것입니다. 내가 좋으면 하십시오. 하나님의 일을 하기 위해서라면 하지 마십시오. 지금 우리가 살고 있는 21세기의 교회와 기독교는 무기력한 상태에 있습니다. 인류 역사상 지금처럼 선교를 많이 하고 기독교 단체들이 많이 생겨나고.. 이렇게 기독교가 번성했던 적은 없었습니다. 하지만 영적인 능력은 무기력합니다. 여기서 영적인 능력은 사회를 변혁시키는 능력을 말합니다.

한국에 18세 미만인 매춘부가 70만이라고 합니다. 통계에 속한 수만 이 정도입니다. 한국의 ¼이 크리스챤이라고 합니다. 그렇다면 분명 한국은 복음화가 된 것입니다. 그런데 전혀 정화의 능력이 없습니다.

이런 예화가 있습니다. 말굽을 만드는 대장장이가 하나 있었습니다. 이 대장장이가 오랜 기간 여행을 떠나야 했기 때문에 일꾼 하나를 불러서 일을 맡겼습니다. 자기가 가장 잘 만든 말굽 하나를 주면서 이것과 똑 같이 2000개의 말굽을 만들라고 지시했습니다. 그 일꾼은 주인이 준 말굽과 똑 같은 말굽을 하나 만들었습니다. 그리고 자기가 만든 말굽을 보면서 똑 같은 말굽을 하나 만들었습니다. 만들어진 말굽을 보고 또 하나를 만들었습니다. 그렇게 2000개를 만들었습니다. 나중에 주인이 돌아와서 그 말굽을 보았습니다. 근데 마지막에 만들어진 말굽은 처음의 말굽과 전혀 다른 말굽이었습니다. 왜 그렇습니까? 말굽을 만들때마다 처음에 주인이 준 말굽을 보면서 만들었어야 했는데 그 일꾼은 copy 한 것을 또 copy하고 그것을 또 copy하고… 그랬기 때문입니다.

오늘날의 교회도 마찬가지입니다. 오늘날의 교회는 성경 말씀 속에 나와 있는 교회의 모습과 너무나도 다릅니다. 교회와 성도의 삶이란 것이 자꾸 사람에게서 배우고 copy되다 보니 이렇게 된 것입니다. 우리가 다니는 교회는 성경안에서 찾을래야 찾을 수가 없습니다.

사도 바울이 쓴 갈라디아서를 보면. 이게 편지인데요. 그 편지의 시작이 이렇습니다.
‘사람들에게서 난 것도 아니요 사람으로 말미암은 것도 아니요’
말씀을 놓고 항상 거기서 배워야 합니다. 오늘 그리스도인의 삶이란 것이 성경속에서 배워져야 하는 것입니다. 지금의 크리스천들의 삶은 너무 이원화 되어 있고 괴리되어 있습니다. 교회안에서 있을 수 없는 일들이 일어나고 있습니다. 세습이니 비리니..말이 성립이 안 되는 것인데..

해결은 어려운 것이 아닌 것 같습니다. 성경이 가르쳐 주고 있는 것은 아주 단순합니다.
갈라디아서에 나오는 이 첫 번째 간증을 보십시오. ‘사람들에게서 난 것도 아니요 사람으로 말미암은 것도 아니요’ 이렇게 간증이 시작됩니다. 이 간증을 의미심장하게 되새겨보아야 합니다. 바울이 이런 말을 하는 이유가 있습니다. 바울은 인간의 능력으로는 따라가지 못하리 만큼 율법에 열심이었던 사람이었습니다. 요즘도 기독교에 지나치게 열심인 크리스천들을 많이 보게 됩니다. 우리에게 은혜를 주셨는데 우리는 그것을 종교생활로 만들어 버린 것입니다. 율법에 흠이 없는 생활을 했지만 그것은 허공을 치는 주먹질이요 향방없는 달음질이었습니다. 바울은 예수님을 만나 이것이 바뀐 것이죠. 바울이 다메섹으로 가는 중에 그는 하나님의 원수였습니다. 하나님의 원수되는 일을 하고 있던 그를 하나님이 사랑하셨습니다. 자신도 자기자신을 사랑할 수 없었는데 그런 그를 주께서 찾아와 품으시고 사랑하신 것이죠. 이 사랑을 만날 때까지 우리의 삶은 창세기 3장을 넘어서지 못합니다. 끊임없는 수치를 가리기 위해 나뭇잎 치마를 만드는 것이죠. 인생의 문제는 내가 나를 부끄러워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자꾸 껍데기를 만드는 것입니다. 자꾸 계급장을 붙이는 것입니다.

산상수훈의 핵심인 6장에 ‘사람에게 보이려고 그들 앞에서 너희 의를 행치 않도록 주의하라’고 했습니다. 하나님의 사랑. 그 사랑 안에서 내가 나 된 것이 감사해야 합니다. 내가 나로 자라는 것이 대견스러워야 합니다.

교회가 오리지날에서 벗어나니까 말도 안 되는 말들을 합니다. ‘저 분은 정말 기도를 잘 해’, ‘저 가정은 부모와 자식이 말을 잘 해’… 기도는 하나님과 교통하는 것입니다. 여러분들은 밥먹을 때 ‘난 밥 잘 먹어, 난 숨 잘 쉬어’ 이런 말 합니까? ‘저 사람은 믿음이 좋아’ 겨자씨만해도 그 믿음으로 살면 능히 못할 것이 없습니다. 내 수치와 두려움을 가리려는 노력.. 주께서는 ‘내가 너에게 정말 좋은 생명을 주었다.’ 그 생명을 즐길 줄 알면 그 부요가 세상의 어떤 금과 은으로도 당할 수가 없습니다. 아들과 아버지는 생명의 관계죠. 그 아들과 아버지의 관계를 누려가는 것이 얼마나 아름답습니까? 생명 자체로 부요한 사람입니다.

‘사람에게서 받은 것도 아니요 배운 것도 아니요’
내가 나를 싫어할 때 나를 나보다 더 깊이 품으시고 사랑없는 내 안에 사랑을 부어주시는 하나님. 이 하나님을 만나지 못하면, 바울처럼 열심을 낼 수는 있지만 생명의 비밀을 배울 순 없습니다. 나를 사랑하신 하나님을 내 가슴깊이 만나기까지 아무것도 변하지 않습니다. 말 한 마디 섭섭한 마음 한 번만 품으면 이전과 똑 같아 집니다.

요한복음은 1장이 서론, 21장이 후기, 2장부터 20장까지가 본론입니다. 2장부터 11장까지를 표적의 책이라고 합니다. 7개의 예수님의 이적이 나와 있습니다. 요한복음에는 이적을 sign이라고 해석해 놓았습니다. 12장부터 20장까지는 영광의 책이라고 합니다. ‘Book of Glory’ 얼마나 ‘영광’이란 말이 반복적으로 많이 나오는지 모릅니다. 하나님의 영광을 체험하고 이를 읽으면 이 모든 것이 정말 가깝게 다가올 것입니다. 영광은 십자가의 사랑입니다. 요한복음에 나오는 ‘영광’이란 단어를 ‘십자가’로 대체해서 읽어도 문맥상 아무 문제가 없습니다.

이 영광이 시작되는 것이 오늘 본문 요 12장입니다. 마리아에 대한 이야기입니다. 성경에 ‘마리아가’, ‘마리아는’이라고 시작되는 구절 이후를 잘 보십시오. 그 이후에는 항상 사랑받은 자의 특징이 나와 있습니다. 요한복음은 마태복음, 마가복음, 누가복음 이 공관복음서가 통용되고 있는 2세기 후반에 나온 책입니다. 이미 이 시대에 교회가 뭔가 중요한 부분을 잃어버리고 있다고 생각되었기에 주께서 요한복음을 주셨다고 생각합니다. 요한복음에서 강조하는 것은 무엇입니까. 생명입니다. 생명은 사랑입니다. 사랑이 없는 생명은 의미가 없습니다. 생명은 오직 사랑으로 충만해지게 되어 있습니다.

12장은 마리아의 기사이야기입니다. 11장에 나사로가 죽었다가 살아난 장면을 통해서 보여주는 것이 있습니다. 11장 20절 ‘마르다는 예수 오신다는 말을 듣고 나가 맞되 마리아는 집에 앉았더라’ 마리아는 집에 앉아있습니다. 오빠 시신 앞에 앉아 있습니다. 마르다는 예수 오신다는 말을 듣고 곧 나가 맞았습니다. 28절에 ‘이 말을 하고 돌아가서 가만히 그 형제 마리아를 불러 말하되 선생님이 오셔서 너를 부르신다 하니’ 선생이 너를 부른다. 이 말을 듣고 마리아는 급히 일어나 예수께 나아갔다고 했습니다. 20절에는 왜 못 들었을까요? 마리아는 몰입할 수 있는 사람이었습니다. (눅 10:40) 마르다는 준비하는 일이 많아 마음이 분주한지라. 마르다는 예수님을 맞으면서 여러가지로 분주합니다. 예수께서는 이런 마르다에게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마르다야 마르다야 네가 많은 일로 염려하고 근심하나
그러나 몇 가지만 하든지 혹 한 가지만이라도 족하니라 마리아는 이 좋은 편을 택하였으니’
크리스천은 몰입해야 합니다. 기도를 하던지, 찬송을 하던지, 말씀을 읽던지 몰입해야 합니다. 몰입되지 않는 사람은 항상 분주합니다. 지나고 보면 다 떠내려갔습니다.

심리학자가 하는 말이 아기가 태어나서 제일 처음 엄마가 흠뻑 사랑해 주면 아기가 흠뻑 몰입합니다. 이 몰입이 사랑입니다. 이 사랑을 못 받은 아이는 커서 단순반복 동작을 하면서 거기에 몰입합니다. 유치원 같은 곳에 가면 이런 모습을 쉽게 볼 수 있습니다. 이미 몰입할 시기가 지났는데 그 사랑을 받지 못했기에 뒤늦게 몰입하는 것입니다.

주님주님 말하지만 우리에게 이런 몰입이 있습니까. 한 여인을 사랑하게 되면 몰입하게 되죠. 사랑은 초점성입니다. 그 여인이 나에게 절대적인 의미를 갖게 됩니다. 하나님은 사랑이시기 때문에 초점으로 임하십니다. 우리에게 십자가를 향한 몰입이 있습니까.

본문에 가롯유다에 대한 기록을 보면 더 잘 알 수가 있습니다. 그는 ‘어찌하여 이 귀한 것을 팔아 가난한 자들에게 주지 아니하였느냐’ 이렇게 말합니다. 그는 한 가지 일을 하면서 또 다른 일을 합니다. 갑주에 보면 ‘이렇게 말함은 가난한 자들을 생각함이 아니요 저는 도적이라’했습니다. 항상 마음이 분열되어 있습니다.

요 19장에 보면 너무 선명하게 나와 있습니다. 19장 뒷 부분에 두 사람이 소개되어 있습니다. 아리마대 사람 요셉과 니고데모가 나옵니다. 38절에 ‘아리마대 사람 요셉이 예수의 제자나 유대인을 두려워하여 은휘하더니’그랬습니다. 이 사람이 예수의 제자였습니다. 그는 신분이 높은 사람이었고 부와 명성이 있는 사람이었습니다. 그래서 숨어서 두려워하면서 예수를 따랐던 자입니다. 17장과 18장에 예수님이 십자가에 달려 죽으십니다. 그는 이 십자가의 죽음 이후에 빌라도에게 예수의 시체 가져 가기를 구합니다. 예수님이 죽으신 후에 공개적으로 자기를 나타내고 시체를 가져다가 장사를 지냅니다. 39절 니고데모도. 일찍 예수께 밤에 나아왔던 자입니다. 왜 밤에 찾아왔나? 사람들의 눈을 피하기 위해서죠. 예수님을 존경하고 따랐지만 자기가 가진 기득권을 동시에 붙들고 있었던 거죠.

오늘 이 시간에 이 아리마대 요셉과 니고데모가 여기 와서 간증을 한다면 이렇게 간증 할 것입니다. “내가 두 가지를 다 붙들고 있었을 때 나는 무기력했다. 그러나 내가 빌라도 앞에서 나를 드러내고 예수 시체 가져가기를 구했을 때, 허락을 받았을 때, 예수님의 시체를 모시고 나올 때 나는 난생 처음으로 내 자신이 자랑스러웠다. 그 어떤 것도 두렵지 않았다.” 이것이 초점성입니다.

오늘날의 교회가 무엇이 문제인가. 교회를 보면 운영도 해야죠. 행정도 해야죠. 여러가지 프로그램도 해야죠. 사랑 때문이 아니라 교회 문제가 더 중요해졌습니다. ‘주는 그리스도시요 살아계신 하나님의 아들이니이다’ 이 담백한 신앙고백이 너무 복잡해졌습니다. 3, 4세기에 이미 신앙고백이 복잡해졌습니다. 개신교의 신앙고백이란 것이 웨스트민스터 신학에 기초한 것이고, 그 신앙고백의 뿌리를 보면 책으로 한권입니다. 그것을 읽어 보면 구구절절히 맞는 말씀입니다. 근데 내가 내 아버지를 믿는데, 아버지의 학력, 인품, 성격, 업적… 이런 것들을 다 따져서 이러니까 나는 내 아버지를 믿는다. 이렇게 말합니까? 우리가 이제 원점으로 돌아가기를 사모해야 하지 않을까 합니다.

나에 대한 고백. 내가 죄인이다. ‘죄인’이란 말도 신학적 용어입니다. 주에 대한 고백. 인간은 모든 것이 부족한 존재입니다. 늦게 창조된 것일수록 의존적입니다. 동물이 식물보다 의존적입니다. 식물은 동물이 없이도 살 수 있지만 동물은 식물이 없이는 살지 못합니다. 인간은 가장 나중에 창조되었습니다. 가장 의존적입니다. 그런 인간이 만물을 자기 뜻대로 할려고 합니다. 내 안에 오는 집착. 내가 사망입니다. 복을 나누어 주는 것이 아니라 정죄와 사망을 주는 것입니다. ‘오호라 나는 곤고한 자라’ 사도 바울의 이 고백이 나오지 않을 수 없습니다. 내 짝이 내 옆에 있다는 것만으로도 그것은 축복입니다. 자식은 선물입니다. 이것만 깨달아도 엄청난 영적인 도약이 일어날 것입니다. 주께서 나의 주인 되신다면… 내가 만든 감옥을 절대 열지 않습니다. 왜? 열면 정죄당하기 때문에. 그런 존재가 인간입니다. 하나님께 완전히 열어야 합니다. 내 수치, 내 이기, 나에게 사망이 된 나의 모든 것들을 주께 활짝 여십시오. 이것은 가르치는 것이 아닙니다. 예수님이 제자들에게 성경공부시킨 적이 없습니다. 십자가에 나타난 하나님의 사랑. 이것을 만나기만 한다면… 하나님께 몰입할 수 있는 자가 세상을 자유하게 살 수 있습니다.

여기 모인 기독실업인회 회원들은 각자가 다니는 교회나 회사에서 종교생활이 나누어지는 것이 아니라... ‘이는 내가 사람에게서 받은 것도 아니요 배운 것도 아니요’라고 했습니다. 복음. 전적인 은혜의 복음. 이것이 회복되지 않는다면 이 시대의 교회가 가지고 있는 많은 병적인 현상들은 해결될 수 없습니다. 복음. 돌아가야 할 시간입니다. 지금의 기독교는 종교개혁 이전보다도 더 율법적이고 공로주의로 꽉 차 있습니다. 이 율법주의와 공로주의는 굉장히 큰 자아를 형성합니다. 맨하탄 기독실업인회가 이 시대의 영적인 모습을 볼 수 있기를 바라고 이 시대를 바라보시고 치유하시는 하나님의 마음을 볼 수 있기를 바라고 그 하나님의 일을 위해 크게 쓰임받는 모임이 되길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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