들어 가는 말

현재 많은 사람들이 선교에 대해서 생각할 때 허드슨 테일러, 윌리암 캐리, 그리고 양화진에 묻혀 있는 외국 선교사들의 모습을 떠 올린다. 그리고 그런 선교사가 되겠다고 결심을 한다. 그러나 우리가 가는 대부분의 선교지는 우리가 그들의 전기에서 읽었던 선교적 상황과는 아주 다르다. 우리가 알고 있는 유명한 19세기 어간의 선교사들의 이야기가 어떤 배경을 가지고 있는지에 대해서 분명한 이해가 있어야 한다. 그렇지 않다면 우리는 현시대에서 이루어 지고 있는 선교에 대해서 오해하기 때문에 선교 사역에 있어서 비효율을 경험할 수 밖에 없다.

1. 19세기 모델(High Profile 선교 모델)

19세기 선교지의 대부분이 서구 열강에 의해서 만들어진 공간이었다고 해도 지나친 말이 아니다. 아프리카와 아시아가 선교사들에게 열리기 시작한 것은 17세기 항해술의 발달, 18세기와 19세기에 일기 시작한 서구 열강의 무력에 의해서라 할 수 있다.

그리고 서구 문명의 눈으로 볼 때 선교지들은 거의 낙후된 지역이며 선교사들은 우월한 자세로 그곳에 갈 수 있었다. 19세기 선교사들이 종교적으로 호의적이지 않은 지역에서도 사역을 할 수 있었다. 그 이유는 선교지 사람들에게 교육, 의료, 사회 계몽 등을 통해서 유익을 주었고, 정치적으로는 자국의 막강한 권력에 의해서 선교사를 함부로 출국 시킬 수 없었던 상황 때문이었다.

한마디로 선교사라는 타이틀을 가지고 선교지에 들어 갔던 모델이라고 말 할 수 있다. 여기서 식민지 시대의 선교 사역의 효율을 떨어뜨리는 몇가지 특징을 보고 싶다.

(1) 우월의식

그들은 선교지 사람들보다 우월해야 했다. 19세기에는 선교사들이 선교지 사람들에 비해 학문적으로 우월했고 더 높은 학위가 있었다. 로마의 문명을 받아들이고 15, 16세기의 과학과 기술 혁명을 통해 더 세련된 문명을 자랑하던 선교사들은 더 우월했다. 이런 상황들은 선교사들이 현지인들을 낮추어 보는 경향을 만드는데 일조했다.

(2) 선교사라는 타이틀

19세기에는 선교사라는 타이틀만으로도 선교지 사람들에게 특별한 대우를 받을 수 있었다. 그러나 21세기에는 선교사들이 어떤 이유로든 선교사라는 타이틀로 보호 받지 못한다. 이것은 단순히 창의적 접근 지역만의 문제가 아니다. 개방된 지역에서도 선교사라고 하는 것이 특별한 의미를 가지지 않는 것은 마찬가지이다. 오히려 사람들에게 경계심을 높여준다.

(3) 안식년 제도

선교사들은 안식년을 통해서만 본국의 문화로 복귀할 수 있었다. 허드슨 테일러가 150년 전에 영국을 출발해서 상해에 도착하는데 무려 9개월이 걸렸다. 그래서 자주 본국에 가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었다. 이제 영국에서 선교사가 중국을 향해 가려고 할 때 24시간이면 자신이 원하는 목적지에 갈 수 있다.

당시에는 7년에 한번 안식년을 가졌기 때문에 본국에서 오랫동안 체류를 할 수 밖에 없었다. 일년에도 한 두 번 본국에 갈 수 있는 상황에서 4년의 현장 사역 후에 1년 안식년을 하는 것이 반드시 관행이 될 필요는 없다고 생각한다.

2. 1세기 선교모델(Low Profile 선교 모델)

오히려 이제 우리의 선교 모델을 19세기에서 찾을 것이 아니라 1세기에서 찾아야 한다. 초대 교회 성도들이 예루살렘에서 시작해서 땅끝으로 흩어져 갔던 이야기가 가장 잘 쓰여진 곳은 사도행전 11장에 있다.

사도행전 11장 19~21절의 이해를 다시 할 필요가 있다. 그들은 예루살렘에서 시작된 핍박을 피해서 흩어져 갔던 것이다. 그러나 도망만 가거나 몸을 숨기기에 급급했던 것은 아니다. 그들이 복음을 전하며 다녔다고 보는 것이 더 옳을 것이다. 이들의 모델은 앞에서 언급한 19세기 선교사들이 큰 소리 치며 선교지에 갔던 것과 대비해서 소리없이 갔던 Low Profile 선교라고 할 수 있다.

그들이 19세기와 같은 선교의 모델에서 보는 것과 같은 선교사라는 타이틀, 우월의식, 후원제도, 안식년 등을 포함한 선교적 제도 등이 없었다. 어떤 면에서 그들은 약자의 모습으로 민중 속에 파고 들었던 것이다. 하지만 다음과 같은 특징을 가지고 있었기에 그들의 사역은 더욱 효과적이었다고 생각한다. 그들의 삶을 나는 다음과 같이 이야기 하고 싶다.

첫째, 그들은 전염성 있는 그리스도인이었다. 그들에게 예수그리스도는 구주였으며 그를 증거하지 않고는 견딜 수 없는 사람들이었다.

둘째, 그들은 헌신된 그리스도인이었다. 그들이 주님께서 사도행전 1장 8절에서 말씀하신 지상명령에 대한 이해는 아주 분명한 것이었다. 따라서 그들은 자신들의 처지와 상관없이 복음을 전할 수 있었던 것이었다.

셋째, 그들은 문화를 초월할 줄 아는 그리스도인이었다. 그들이 처음에는 문화적으로 그들과 같은 유대인 디아스포라에게만 복음을 전했지만 나중에는 헬라인에게도 복음을 전하게 된다. 이것은 당시의 세계관으로 볼 때 엄청난 생각의 변화인 것을 알 수 있다.

사실 이런 모델은 이미 18세기에 있었던 모라비안 선교 운동에 이미 있었다. 그들은 전문인들이었고, 선교지 사람들의 삶 속에 겸손하게 깊이 뿌리를 내렸다. 그러나 선교의 역사에서 그들과 같은 모델이 더 계발되지 못하고 우리가 흔히 알고 있는 19세기 High Profile 선교의 모델이 크게 주목을 받게 되는 것은 유감이다.

3. 현재의 선교 환경

그러나 오늘날 대부분의 선교지의 상황은 19세기와 비교해 볼 때 매우 다르다. 민족 자결주의는 아무리 작은 약소 국가에서도 주권이 인정되고 있으며 선교사라고 하는 이름으로 그곳에 갔다고 해도 19세기의 선교사들이 누렸던 그런 지위를 인정해 주는 곳은 없다.

포스트 모던 사회를 대표하는 다양성의 수용, 종교 다원주의 앞에 19세기 식의 선교가 설 자리가 점점 줄어 들어가고 있다. 대표적인 개방된 지역이라 말할 수 있는 일본과 태국에서의 선교사역은 선교사 비자를 주고 이슬람 지역이나 공산국가에서와 같은 위협이 존재하지 않지만 사역의 성과는 한계에 부딪히고 있다.

이런 것을 종합해 볼 때 선교사라고 하는 타이틀이 창의적 접근 지역은 물론 개방적 접근 지역도 타이틀이 더 이상 도움이 되지 못한다.

필자가 우리가 살고 있는 21세기를 19세기와 대비시키고 오히려 1세기와 일치시키는 것은 다음과 같은 이유에서이다. 1세기의 로마 제국 안에서는 사람들이 놀라운 교통과 통신, 그리고 언어와 문화적 통합, 안전한 여행을 할 수 있는 여건을 부여 받았다. 이제 21세기의 상항은 다시 그 때와 비슷한 양상으로 변하고 있다. 교통과 통신의 발달은 본국과 선교 사역지의 거리를 매우 좁히고 있으며, 세계 각국에 동시대적인 지구촌 문화를 초래하였고, 그리고 여행의 안전을 보장해 주고 있다. 선교목적이라고 말하지만 않으면 거의 지구상의 모든 나라를 여행할 수 있는 자유로운 여행 등을 생각해 볼 때 1세기와 유사한 환경이라는 것이다. 따라서 앞에서 지적한 19세기 선교 모델을 따르는 데서 오는 비효율을 극복하기 위해 새로운 모델의 적용이 적극적으로 생각 되어질 때이다.

4. 몇 가지 제언

이러한 선교 상황의 변화를 생각하면서 다음과 같은 제언을 하고 싶다.

(1) 전문인 사역의 이해

이슬람의 전파를 생각하면 우리가 새로운 대답을 찾을 수 있을 것이다. 인도네시아에 이슬람이 들어 왔는가에 대한 이야기를 하는 것을 들을 기회가 있었다. 몇 가지 가설이 이야기 되었지만 공통점은 상인들을 통해서 들어 왔다는 것이다.

오히려 상인들이나 상인처럼 행세하는 사람들이 사회에서 더 받아 들여 진다 .상인들은 민중 속에 깊이 뿌리를 내릴 수 잇다.

이들은 재정이나 자녀교육문제를 스스로 해결하는 자급(self-supporting) 선교를 한 것이다.

(2) 한인 디아스포라의 동원

사도행전이 말하는 흩어진 사람들이야말로 디아스포라가 아닌가. 그들은 선교를 위해서 인위적으로 장소를 옮겼다기 보다는 생계를 위해서 삶의 터전 자체를 바꾼 사람들이다.

해외에 이미 흩어져 있는 500만 한인 디아스포라는 남한 인구 4천7백만에 비해 10%를 상회하는 비율이다. 이것은 중국 화교, 일본 디아스포라의 비율에 비해 상당히 높은 비율이다. 특히 한인 디아스포라들이 동원된다면 한국 선교가 그 진가를 발휘할 수 있을 것이다.

(3) 전통적 선교의 재조정

창의적 접근지역과 개방된 접근 지역이 특별히 구분될 필요가 없다. 이제 추수지역이 따로 있다고 말하기 어렵다. 창의적 접근 지역에서도 어떤 모델로 복음을 전하는가에 따라서 열매가 있다. 개방적 지역이라고 하여 선교사라는 타이틀로 이름 지어진 우리의 실체가 복음 증거에 직접적인 도움을 주는 것은 아니다. 따라서 선교사의 타이틀, 안식년 제도 등에 대한 새로운 변화가 필요하다.

맺는 말

한국 선교의 지난 10년을 돌아 보면서 양적 팽창은 있었지만 진정으로 변화되고 잇는 세계에 필요한 우리의 선교 모델을 만들었는지, 아니면 어설프게 19세기 선교의 모델을 끌어다가 이것도 저것도 아닌 변종의 선교가 되었는지에 대한 평가와 반성이 있어야 한다. 그럴 때 21세기 성경적인 한국 선교사역이 진정으로 존재할 것이라고 믿는다. 21세기 선교 모델의 수정은 선교 전략에도 상당한 변화를 가져 오리라고 생각한다. 아울러 본국에서 선교에 관심자들을 훈련하는 방법과 내용도 달라져야 한다.(출처 선교타임즈 1월호)

※OMF 소개
1865년 제이스 허드슨 테일러는 중국 내지로 복음을 들고 들어갈 일꾼 24명을 위해 기도했습니다. 이것이 중국내지선교회(CIM)의 시작이었습니다. 중국 사역 중 극심한 박해를 당하기도 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허드슨테일러와 동역자는 사역을 멈추지 않고 믿음으로 사역을 지속했습니다.
1951년 공산혁명으로 중국에서 선교사들이 축출되며 새로운 사역이 허락되었습니다. 이것이 CIM에서 OMF(해외선교회)로의 역사가 펼쳐지는 계기가 되었습니다. OMF는 지금도 중국에 대해 지속적으로 관심을 갖고 있으면서 동시에 동아시아의 여러 나라에서 사역하고 있습니다.

※손창남 선교사 약력

대광 고등학교 졸업
고대 경영학과 졸업
서울대 경영대학원 석사
서울대 방통대, 성심여대, 수원대학, 인하대학 강사
인하대 회계학 박사
전 세무대학 교수
인도네시아 두따와짜나대학 회계학 과장 교수
인도네시아 죠이 대학생 모임 설립
현 오엠에프 대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