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OVID 19이라는 단어가 검색어 상위권을 차지한 채 우리들 삶에 침투한 지 어언 반년이 지나고 있다. 개개인에게 많은 책임을 요구하지만, 결코 어느 개인도 혼자서는 풀 수 없는, 우리를 팍팍하게 하는 이 공동체 문제에 대해 오늘은 민수기 12장에서 교훈을 얻고자 한다.
민수기 12장은 이스라엘 백성이 약속의 땅을 향해 행진하던 중 어느 광야에서 일어난 에피소드를 다루고 있다. 모세의 지도자로서의 권위가 그 형제 자매 아론과 미리암에 의해 도전 받는 것으로 시작하는 이 이야기는 미리암에게 흔히 나병으로 알려진 독한 피부병이 생기는 상황으로 전개된다. (어떤 학자들은 미리암에의 피부가 하얗게 변한 것에 강조를 두어 현대의학에서 알려진 백반증이라고 생각하기도 한다.) 나병은, 현대의학의 관점에서 봤을 때, 지금 우리를 괴롭히는 코비드와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전염력이 약하지만, 레위기 13-14장에서 엄중하게 격리 명령을 하고 있듯 고대사회에서는 극복하기 힘든 심각한 전염력을 지닌 병이었을 것으로 이해한다.
이제 미리암의 나병을 맞닥뜨렸던 이스라엘 공동체와 코비드로 몸살 앓고 있는 우리 사회를 비교해 보자. 우선, 본문은 미리암이 악성 피부병에 걸리게 된 이유에 대해 우리가 모두 납득할 수 있을 만한 답을 주고 있지는 않다. 민수기 12:8-9에 의하면 미리암이 불현듯 시체처럼 변하게 된 것은 여호와의 진노 때문이다. 그러나 왜 미리암에게만 그 형벌이 주어졌는가라는 오래된 질문 외에도, 한 지도자를 향한 나름대로 진지한 비판적 질문에 대해 하나님께서는 당신이 택한 자는 믿음직스러운 모세라는 취지의 설명만 되풀이하신다. 그리고 곧이어 미리암에게 주어진 수치스럽고 곤혹스러운 형벌. 왜 아론이 아닌 모세를, 왜 미리암이 아닌 모세를 택하셨는지, 하나님의 종이 이방 여인을 취해도 되는 것인지, 이 모든 것들을 질문조차 하면 안 되는 것인지, 독자인 우리도 질문을 한 당사자들도 그저 눈치껏 뭔가 잘못된 것이려니 짐작할 뿐이다. 코비드가 어떻게 들어왔는지 우리는 과연 사건의 전모를 알 수 있는가. 누구는 이 모든 재앙이 중국 우한에서 시작된 것이라며 우한 바이러스라는 이름을 고집하는가 하면, 누구는 유럽발이라 하고, 또 다른 이들은 이미 미국의 한 실험실에서 바이러스가 꿈틀거리고 있었다고 한다. 어떤 사람들은 이 모든 뉴스가 사실이 아니라 음모일 뿐이라고 애써 부정하기도 한다. 우리의 사실 확인 능력 너머에서, 우리가 모두 납득할 만큼의 경과보고도 만들어질 틈 없이, 산 넘고 바다 건너, 정치라는 양탄자를 탄 채, 넘실넘실...... 이 위기는 어느새 우리 폐부 속으로 깊숙이 들어와 버렸다.
다음 장면에서 우리는 기도드리는 모세를 만난다. 모세가 병에 걸린 미리암을 위해 여호와께 기도 드린다. 그것이 도전받은 이스라엘의 지도자 모세가 그에게 도전했던 미리암에게 한 일이다. 미리암이 존경받는 지도자 집안 출신임을 부인할 수 없지만, 권력에 도전했다가 살이 반이나 썩은 상태가 되어 버린 민수기 12장의 미리암은 더 이상 특권계층이라고 보기 어렵다. 그러나 모세는 그녀를 위해 여호와께 간구한다. 즉 국가 위기 대응 차원에서 해석한다면, 한 나라의 지도자로서, 사적인 관계와 감정을 뒤로 하고, 모세는 환자의 병이 낫는 해결책을 적극적으로 강구했다는 것으로 확대 해석할 수 있다. 우리의 상황은 어떠한가. 우리가 환자를 대하는 태도도 이와 비슷해야 하지 않을 텐가. 어느 배우는 코로나가 모든 사람을 평등하게 만든다며 자신의 호화로운 욕조에 누워 이야기했지만, 그것은 조금이라도 자신의 고개를 돌려서 이웃을 바라보는 이들에게는 정말 받아들이기 어려운 논리이다. 사회적 거리를 두고 싶어도 도대체 그 거리를 유지할 최소공간이 허용되지 않는 곳에 사는 사람들이 이 세상에 허다하게 많음이 드러났고, 코비드 발병률의 분포도가 인종에 따라, 사회 경제적 수준에 따라 다르게 나타났다는 것도 이미 우리는 알고 있다. 그러함에도 온 인류의 회복을 위해 최선을 다하자던 국제적 차원의 백신 프로젝트는 이 세상에 선을 보이기 전부터, 큰 수익을 기대하는 자본가들의 욕심을 채우는 기획으로 바뀌어 가고, 각 나라의 지도자들은 이 성공담으로 만들 정치적 이미지를 날마다 연구하는 중이다. 상황이 이러할진대, 자신을 비판하는 개인이나, 단체나, 계층의 사람들에게 코비드를 치료할 수 있는 백신을 과연 아무 사심 없이 나누어 줄 수 있는 지도자들을 과연 우리 사회는 응원해 줄 수 있는지, 대답하기가 꺼려진다.
모세의 간구를 들은 여호와께서는 즉시 미리암을 병으로부터 자유롭게 고쳐주셨다. 그러나 14절에서 보듯, 하나님께서는 미리암이 7일간 진영 밖에 머물러야 한다는 말씀도 함께 명하신다. 레위기에 의하면 7일간의 격리는 이미 피부병이 나은 상황에서도 확증을 위해 필요하기 때문에 그리 이상스러울 것은 없다. 문제는 이 격리 명령으로 말미암아 미리암의 도전과 그에 따른 형벌이 개인 또는 한 가정의 문제를 넘어서, 공동체에 영향을 미치는 이슈가 되고 말았다는 점에 있다. 이들이 이미 약속의 땅에 들어가 정착해서 살고 있었다면 문제는 보다 가벼웠을 것이다. 그저 미리암이 마을에서 동떨어진 어느 건물에 들어가 자가격리를 하고 있으면 되니 말이다. 그러나 이 이야기는 이스라엘 공동체가 사막과 다름없는 광야를 행진하는 중에 일어났던 것임을 기억하자. 그들이 머물고 있었던 곳은 어디에나 물이 있고, 어디에나 음식이 있고, 언제나 안전한 그런 공간이 아니라, 항상 긴장하고 대비해야 하는 광야였다는 사실이다. 갈등이 불거진다. 성경은 비록 그들의 결정을 담담하고도 짧게 서술했지만, 필자는 사실 그들의 문제 해결 방식에서 감동받는다. 그들은 미리암이 다시 진영 안으로 들어올 때까지 함께 7일을 기다리기로 한다. 그들은 병든 미리암을 버려둔 채 떠나는 결정을 하지 않는다. 그들은 7일이 너무 길다고 불평하며, 백성들의 사기 진작을 위한다며, 4일이나 5일로 그 필요한 날짜들을 축소하지도 않는다. 그들은 격리라는 원칙을 무시하지도 않았다. 미리암은 진영 밖에, 무리들은 진영 안에서, 7일을, 고스란히, 함께, 버텼다. 우리는 어떠한가. 부끄럽고 무서운 이야기들이 너무 많이 떠올라 얼굴이 화끈 달아오른다. 아!
이 갈등을 풀어내는 이스라엘 공동체의 결단이 빛나는 것은 비단 이것이 민수기에 나오는, 그들이 취한 몇 안 되는 좋은 결정이기 때문만은 아닐 것이다. 민수기 12장도, 오늘의 코비드 사태도, 우리가 모두 연결되어 있음을 계속적으로 알려주고 있다. 이 이야기들이 울려대는 종소리는 이제 너무 크고 명확해서 우리들의 귀가 먹먹할 정도이다. 더 이상 타인의 불행이 나의 행복을 증진시켜 준다는 거짓말은 통하지 않는다고, 각자 살아남기 위해 이기적으로 사재기를 하고 앞다투어 특허를 받으려고 뛰어다니는 것이 문제의 해결책이 아니라고, 목청껏 부르짖는 소리를 이제는 완전히 망가지기 전에, 더 늦기 전에 들어야 한다. 하나님은 우리가 사는 세상을 이렇게 만들어 놓으신다. 모두가 다 연결되어 있도록 말이다! 이것을 선명하게 깨닫고 실천하라고, 여호와께서 우리를 당신의 자녀로 부르신 것, 이 자명한 사실을 우리는 왜 이리도 부인하고 있는가.
저자에 대해:
김수정 교수는 클레어몬트 신학대학원에서 에스겔 8-11장에 나오는 여호와의 성소이동이 주는 의미에 대한 논문으로 종교학 박사학위를 받았다. 성경을 우리 삶에 제대로 적용하기 위해서는 우선 성경을 잘 읽어내는 것이 시작이라는 소명으로, 당연시되는 많은 전제들에 대해 진지하고 지속적인 질문과 탐색을 해 가는 중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