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학생자원선교운동의 배경으로 시리즈7의 "건초더미 기도운동"을 읽으시기 바랍니다)
사무엘 밀즈 그룹의 선교 열정은 프린스턴대학의 YMCA 지도책임자인 루터 위샤드(Luther D. Wishard)를 통해서 헐몬산 대학생 연합수련회로 이어진다. Wishard 는 지구상의 죽어가는 수많은 영혼들을 살리기 위해서는 몇 천명의 선교사들을 파송해야 하는데 선교의 영을 확산 시키기 위해서는 보다 광대한 규모의 선교대회가 필요함을 절감했다. 그의 헌신으로 1886년 7월에 무디선생을 강사로모시고 한달간 사경회를 열었고 이 사경회에서 100명이 선교헌신을 함으로 "우리 세대에 세계복음화!" 라는 슬로건을 가지고 학생자원선교운동이 태동한다. 이 학생자원선교운동을 통해 이후 50년간 20,500명의 선교사가 해외(주로 아시아의 나라들)로 파송되어 선교의 황금기가 열렸고, 이 운동의 결과로 한국에도 많은 젊은이들이 복음들고 찾아오게된다.
루터 위샤드(Luther D, Wishard)
SVM을 태동시킨 헐몬산사경회를 준비했던 핵심인물은 당시 프린스턴 대학 YMCA 지도 책임자였던 루터 위샤드 였다.
그는 윌리엄스대학 총장인 Mark Hopkins 에게 1879년 전국학생대회에서 사무엘 밀즈 그룹 이야기를 말해 기독학생들의 마음에 기도와 선교의 열정을 불러 일으켜 주도록 요청한다. 그는 또 윌리엄스대학 YMCA 회장인 Charles Ober를 만나 함께 눈 덮힌 건초더미기도회 기념비를 찾아가 무릎을 꿇고 "그리스도를 위하여 언제든지, 어디든지, 무슨 일이라도 하겠습니다" 라고 헌신했다. 그후 두사람은 선교를 위한 대규모의 대학생 수련회를 준비한다.
무디의 켐브리지 대학집회의 대회장이었던 J.E.K.Studd를 미국에 초청하여 미국 대학생들에게 '캠브리지 7인' 선교사의 이야기를 해주도록 요청했다. Studd의 방문은 미국 대학생들에게 새로운 선교의 열정을 일깨운다.
루터 위샤드는 캠브리지대학 집회를 통해 수많은 대학생들을 선교에 관심을 갖게했고 또 캠브리지 7인을 헌신시킨 부흥사 무디를 강사로 헐몬산에서 대학생사경회를 개최할 것을 제안했다. 이를 위해 Wishard 와 Ober 는 여러 대학을 방문해 학생들을 모았고, 7월 한달간 무디를 강사로 대학생사경회가 열렸는데 미국과 카나다의 89개 대학에서 251명의 대학대표단들이 모였다.
주강사 DL 무디와 아더 피어슨(Arthur Pierson)
무디는 학력의 한계로 자신은 대학생 집회에 적합하지 않다는 선입관을 가지고 있었으나 1876년 프린스턴 대학의 기도의 날에 총장으로 부터 강사초대를 받고 집회를 인도한 후에 1878년 예일대학 집회, 1883년 옥스포드와 켐브리지대학의 집회를 인도했고, 1886년에 헐몬산 대학생사경회를 주강사로초청되었다. 이 수련회가 SVM 운동의 시발점이 된다.
사경회 기간에 선교에 관심있는 자들의 기도회가 열렸다. 선교를 위한 기도모임이 있다고 공식적으로 광고되자 많은 학생들이 모여 사경회는 선교의 영이 충만했다. 선교에의 강한 도전을 위해서 성경학자이면서 Missionary Review of the World 의 편집자이자 선교 주창자인 아더 피어슨에게 선교강연을 부탁했다.
이 때 그의 설교제목은 "모든 사람이 가야하며 모든 사람에게 가야한다"(All should Go and Go to All)였다. 그의 설교와 함께 등장한 구호가 "우리 세대에 세계 복음화를!" 이었다.
사경회가 시작할 때에 선교헌신자가 6명 이었는데 마지막 집회까지 99명이 선교사로 헌신하고 서명했다. 마지막으로 100번째 헌신자가 들어와 무릎을 꿇음으로 선교 헌신자가 100명이 된 것이다. "하나님이 허락하시면 나는 해외선교사가 되겠습니다 "라는 서약을 했는데 이를 프린스턴 서약이라 불렀다.
중보기도를 했던 Robert Wilder 와 Grace Wilder
그들의 부친이 인도에서 30년간 선교한 후에 은퇴하고 프린스턴 근처에서 살고 있었다. 그 집에서 매주일 오후에 5명 정도가 모여서 선교를 위한 기도모임을 갖고있었는데 무디를 강사로 헐몬산에서 대학생집화를 갖는다는 소식을 접하고 그들은 이 집회야 말로 하나님께서 준비하신 기회라고 생각했다. Grace Wilder 는 "이 집회가 강한 선교집회로 갈 것이고 이 집회를 통해 선교를 위한 우리의 기도가 응답되어 전 대학으로 기도모임이 확산되고 하나님께서 선교지원자 100명을 채워주실 것이다" 라고 예언했다.
중보기도를 열심히 해왔던 Robert Wilder 는 헐몬산사경회의 중심역할을 했고 John Mott와 함께 SVM 이 북미에 정착하는데 크게 기여했다. 많은 대학들을 방문해 선교강연을 하면서 많은 학생들을 선교에 헌신하게 했고, 영국과 스칸디나비아 나라들도 방문해서 SVM의 새로운 장을 열게 했다.
30년 이상 SVM 운동을 이끌었던 John Mott(1865-1955)
그는 코넬대학에서 역사학과 정치학을 공부하던 중에 C.T.Studd의 형제인 J.E.K.Studd (그는 무디와 YMCA 초청을 받아 미국 대학들을 순회하면서 선교의 도전을 주고 있었다)를 통해 해외선교를 위해 자신들의 지위와 부를 포기한 '캠브리지 7인'의 감동적인 이야기를 듣고 그도 자신의 생애를 복음전파를 위해 그리스도께 드리기로 헌신했다. 또한 무디를 주강사로 열렸던 헐몬산 수련회에 코넬대학 대표로 참석해 거기서 프린스턴 서약에 서명한 100인 중의 한사람으로 개인적으로 해외선교에 헌신하게 된다.
2년 후인 1888년에 John Mott 를 발기인과 의장으로 "우리 세대에 세계복음화를!" 이라는 슬로건 하에 해외선교를 위한 학생자원선교운동(SVM)이 결성되었는데 Mott 는 의장으로, Wilder 는 총무로 선임되었다. Mott와 Wilder 는 함께 탁월한 리더십과 열정으로 30년 이상 이 운동을 이끌어 왔다. 그들의 리더십과 각 나라의 대학들을 방문했던 열매로 각 나라의 SVM 운동을 통해 1940년 까지 20,500명이 해외선교지로 떠났다. 그리스도를 위하여 모든 것을 배설물로 여겼던 그에게 1946년에 노벨 평화상이 수여되기도 했다. 그는 한국도 여러차례 방문 했는데 1907년 평양대부흥 기간에 6000명의 성도들 앞에서 설교하면서 장차 한국이 동양의 기독교국가가 될 것이라고 예언 같은 격려를 전했다고 한다.
SVM 운동의 전성기와 몰락
SVM 은 1888년에 결성된 후에 헐몬산 사경회 5년 후인 1891년에 오하이오주 클리블랜드에서 제1차 국제학생선교대회가 열렸는데 32명의 선교회 대표들, 31명의 해외선교사들, 151개의 대학과 신학교를 대표하는 558명의 학생들이 참석했다. 이후 매 4년마다 1차세계대전 기간 한번을 제외하고는 대회가 빠짐없이 열렸다. 1898년 까지 SVM 이 839개의 대학에 확산되어 1173명이 53개 국가에 나갔고, 헐몬산 사경회 20주년이 되는 해인 1906년까지는 2953명의 자원자들이 100개의 선교단체를 통해 해외 선교지로 나갔다.
이 대회는 1920년 아이오와주의 데스 모이네스 대회에서 그 절정에 달했으며(6,890명 참석), 1940년 토론토 대회를 끝으로 50년간 20,500명이나 되는 선교사가 이 운동과 관련되어 파송되었다. 이 숫자는 예수님 이후에 파송되었던 모든 선교사들의 수보다 훨신 많은 수였다.
SVM 운동의 특징과 몰락의 원인
1, SVM 은 학생 주도 선교운동이었다. 사무엘 밀즈 그룹은 미국에서 최초로 세계선교를 외쳤고 미국 최초의 해외선교회를 탄생시켰으며, 그들의 비젼과 열정을 이어받아 "우리세대 세계복음화를!" 이라는 슬로건 하에 SVM 이 생겨났고, SVM의 줄기에서 IVF, KSCF, SCF 등의 학생운동이 생겨났다.
2, SVM 은 평신도 중심 선교운동이었다. 주강사였던 무디, 이 운동을 이끌어왔던 John Mott 가 평신도였고, 프린스턴 서약에 싸인하고 나갔던 선교사들도 대부분 평신도 선교사들이었다.
3, 여성 참여가 두드러졌다. 1905년 까지 남성들이 SVM 의 지도력을 점유했지만 여성들은 해외 선교지에 나간 선교사의 다수를 점유했다. 본국에서는 교회의 사역이 남성들에 의해 독점 되었으나 교사, 의사, 간호사, 사회사업가, 서기직 등이 여성들에게 개방되어 1920년 이후에는 여성선교사 수가 남성들을 훨신 능가하였다.
4, SVM 은 교회연합운동이었다. 에큐메니칼운동의 시발점이 되었던 SVM 의 스코틀랜드 에딘버러 컨퍼런스의 의장이 John Mott 였다. 19세기 개인구원을 목표로했던 선교운동에 관한 반작용으로 20세기 에큐메니칼 운동은 전체구원, 사회구원으로 방향이 전환되었다.
5, 전도와 해외선교에 대한 헌신 등과 같은 본래적인 활동이 약화되고 대신 인종문제와 경제적 불평등과 같은 사회적인 이슈들을 강조하면서 기도도 약화되고 역동성도 생명력도 약화되기 시작했다.
6, 참가하는 학생들의 관심도 전도로 부터 이탈되어갔고, 해외선교에 관한 강조도 약화 되었지만 국내전도는 더더욱 관심 밖이었다.
이런 신학적 변질과 내부적 혼란으로 인해 선교대회는 생명력과 역동성을 상실했고 하나님의 기름부으심도 사라져 점점 참가자들이 줄어들면서 SVM 운동은 1940년 토론토 대회를 마지막으로 아쉽게도 SVM 선교대회가 중단된다.
해외선교의 황금기를 구가 했던 SVM 의 쇠퇴의 원인들은 우리에게 많은 교훈들을 주고있다.
오늘날은 IVF 가 SVM 을 이어서 1947년 부터 매 3년 마다 미국의 어바나 샴페인 캠퍼스에서 'Urbana 대회'라는 이름으로 2만여명씩 모이고있다. 1888년 부터 한국에서 열리는 청년학생 선교동원을 위한 연합대회인 '선교한국' 도 SVM 대회와 Urbana 대회의 영향을 받아 생긴 줄 안다. 세계 곳곳에서 SVM 대회, IVF 대회, 선교한국대회 같은 젊은이들의 선교대회가 다시 타오르도록 여러분들의 기도를 부탁한다.
*학생 자원 선교 운동 부분은 총신대 신대원 박영실 교수님의 글이 많이 인용되었음을 알려드립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