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필자는 여러 순복음교회 목회자들과의 인터뷰를 통해, 최근 오순절교단의 젊은 목회자들 사이에는 방언을 성령세례 받은 첫 표적이라고 보기보다는 성령의 여러 은사 가운데 하나로 보는 견해가 점차 일반화되어가고 있다는 소식을 접했다.
그 이유는 순복음교회가 1980년대 이후 ‘제 3의 물결’로 인해 방언을 성령의 은사 가운데 하나로 보는 영향을 많이 받은 때문이며, 또 한편으로는 한국의 가장 대표적인 오순절파 교회인 여의도순복음중앙교회가 지속적으로 타 교단 신학자들을 초청해 신학적 교류를 많이 해 온 까닭에 방언에 대한 해석이 오순절주의적 강조로부터 일반적 인식으로 변화되어가는 현상이라고 본다.
이같은 점은 순복음교회의 젊은 목회자들 사이에 그들의 신앙고백과 교단 교리적 노선 사이에 다소간 갈등이 존재하는 것을 보여준다. 이러한 신학적 갈등속에서, 조용기의 성령론은 성령세례의 첫 표적으로서 방언을 강조한다는 점에 있어서는 오순절교단의 입장을 대변해 주면서도, 성령론의 다른 여러 가지 점에 있어서는 그의 초기 성령론에 비해 많은 변화를 보여주었다.
그리고 이상과 같은 조용기 성령론의 변화와 발전은 곧 한국 전통 오순절주의의 성령론의 발전을 일반적으로 대변해 주는 것이라고 본다.
그렇다면 현대의 전통 오순절주의는 지난날 개혁파 성령운동의 강조점인 성령과의 인격적 교제의 중요성이나 기독론과의 연계, 또 웨슬리안 성결운동 노선에서 강조한 성결의 차원 등을 잘 포용하여 더욱 알찬 성령론을 향해 발돋음해 나가고 있다는 점을 인정할 수 있게 된다.
은사갱신운동가들의 성령세례 이해
국내에서는 은사갱신운동의 영향이 북미와 영국에서 ‘제 2의 물결’로 분류될만큼 어떤 뚜렷한 구분을 주지 않았다. 은사갱신운동가들의 저서들이 국내에 최초로 번역되어 소개되기 시작한 때는 1970년대 후반부터인데, 당시는 한국에 마침 성령론 논쟁이 달아오르기 시작할 때로서, 이 번역서들은 주로 전통 오순절주의 성령론으로 간주되곤 했다.
그때 국내 신학계에는 아직 전통 오순절주의와 은사갱신운동 간의 구별에 대한 인식이 거의 없었던 때였다. 그리고 최근에는 제 3의 물결의 저서들이 쏟아져 나오고 있지만, 일반 독자들은 이 세 물결 간의 성령론에 있어서의 구별을 거의 인식하지 못하고, 함께 통털어 오순절주의 성령론으로 구분짓는 것이 통례이다.
그러면 국내 독자들에게 친숙한 몇몇 은사갱신운동가들의 저술속에 나타나는 성령세례론을 살펴 본다.
세릴(John L. Sherrill)은 성령세례가 인간이 하나님과의 완전한 접촉을 나타내는 순간을 묘사하는 것으로서, 성서 속에 이를 표현하는 여러 다른 단어들도 있다고 하였다. 성령이 인간에게 내려온다고 하거나, 성령에 의해 충만히 채워진다고 하거나, 성령을 받는다고 하는 표현도 있다.
이 모든 표현들이 똑같은 체험으로서의 성령세례를 의미한다고 그는 보았다. 그리고 이 체험을 할 때 방언이 나타나게 된다고 하였다. 성령세례를 받은 사람은 반드시 그렇지는 않지만 적어도 사도행전의 예가 가장 적절한 도움이 될 것이라고 하면서 방언의 체험을 강조하였다.
베네트(Dennis J. Bennett)는 성공회 신부이지만, 후에 은사갱신운동의 선구자가 되었다. 그의 Nine O'clock in the Morning은 1970년 New Jersey의 Logos International에서 출판된 이후 많은 독자층을 형성하게 되었다. 국내에는 「성령세례와 방언」이라는 제목으로 번역되어 소개되었다. 그는 자신의 책에서 방언을 말하게 되는 체험을 성령세례를 받는 것과 거의 동일시하였다.
그는 또 다른 저서에서 사도행전에 나타난 사마리아의 성령 사건을 다루었는데, 이에 대한 해석에서 말하기를, “성령은 이미 사마리아의 신자들에게 거하고 계셨다. 성령은 그들의 혼과 육을 적셔서 세례를 주고 흘러 넘치게 할 준비가 되었으나, 그들이 그것을 경험하기 위해서는 반응해야만 했다. 그들이 반응하자마자 성령은 오순절날 초기 신자들에게 하신 것처럼 쏟아 붓기 시작했다. 의심할 바 없이 그들은 새 언어로 말하면서 하나님을 경배하며 같은 표증을 나타냈다”고 하였다.
또 그의 고린도전서 12장 13절의 해석은 마치 로이드존즈의 두 세례를 연상케 해 주는데, 예수를 구주로 영접하는 순간 일어나는 그리스도와 합해지는 영적 세례와 그 다음에 따르는 성령으로 받는 세례를 말한다. 여기서 후자는 신자 안에 이미 내재하는 성령이 밖으로 나와 예수를 믿는 신자들의 삶을 통해서 세상으로 예수를 나타내는 것이라고 보았다.
베네트는 성경에 나오는 성령세례의 사례에서 방언으로 말하는 것이 공통적이었다고 하면서, 초기 신자들은 개종한 자들이 성령을 받았는지 안 받았는지를 즉시 말할 수 있는 비결을 분명히 가지고 있었던 것 같다고 하였다. 그는 방언으로 말하는 것 자체가 곧 성령세례를 받는 것이라고는 할 수 없으나, 방언은 성령세례를 받을 때 일어나는 일이고, 또 바울이 말한대로 ‘성령충만을 지속’(엡 5:18)하는 데 도움이 되는 중요한 자원이 된다고 하였다.
많은 믿음의 사람들이 성령으로 세례받기를 기도하지만, 방언으로 말을 시작하는 데는 실패한다고 베네트는 지적하였다. 그 이유로서 그들은 하나님이 그렇게 하기를 원하시지 않는다고 생각하고 당연히 받을 것으로도 여기지 않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그러나 그들에게 설명을 잘 해주고 질의응답을 통해서 교육을 시키고 나면, 그들은 자신의 속박을 깨고 나와 성령이 주시는 말을 시작할 것이라고 믿는다고 말했다.
맥너트(Francis MacNutt)의 Overcome by the Spirit을 번역한 예영수는 역자 서문에서 밝히기를, 이 책은 성령의 권능이 임할 때 나타나는 신기한 현상들을 성서적으로, 교회사적으로 그 찬반(贊反) 이론을 깊이있게 연구하고 있으며, 또한 체험적인 면에서 많은 실례를 들어 사실과 증거를 제시하고 있다고 하였다.
맥너트는 특히 성령 안에서 쓰러지는 현상은 그 자리에서 하나님의 능력이 우리의 약함을 통해 분명하게 드러남을 깨닫게 되는 체험이라고 설명하였다. 하나님께서는 우리 자신의 통치 행사를 버리도록 요구하신다. 위대한 부흥운동의 특징은 성령의 권능으로 충만한 설교를 들은 사람들이 마치 거대한 포탄이라도 맞은 것처럼 넘어지고, 기절하고, 소리치고, 땅에 푹 고꾸라지는 등과 같은 현상을 동반했다.
우리가 창조주의 능력과 대면할 때, 성령의 권능에 의해 넘어뜨려지는 모양이 좀 우스꽝스럽게 보일지라도, 그것은 어떤 면에서 우리의 삶에 대한 통치권을 그분께 양도하라고 요구하시는 일종의 예언적 행위로서 우리의 발을 넘어뜨리심을 믿는다고 그는 고백하였다.
필자의 영성상담 홈페이지 http://bay.pe.kr
배본철 교수(성결대학교 신학전문대학원장)
그 이유는 순복음교회가 1980년대 이후 ‘제 3의 물결’로 인해 방언을 성령의 은사 가운데 하나로 보는 영향을 많이 받은 때문이며, 또 한편으로는 한국의 가장 대표적인 오순절파 교회인 여의도순복음중앙교회가 지속적으로 타 교단 신학자들을 초청해 신학적 교류를 많이 해 온 까닭에 방언에 대한 해석이 오순절주의적 강조로부터 일반적 인식으로 변화되어가는 현상이라고 본다.
이같은 점은 순복음교회의 젊은 목회자들 사이에 그들의 신앙고백과 교단 교리적 노선 사이에 다소간 갈등이 존재하는 것을 보여준다. 이러한 신학적 갈등속에서, 조용기의 성령론은 성령세례의 첫 표적으로서 방언을 강조한다는 점에 있어서는 오순절교단의 입장을 대변해 주면서도, 성령론의 다른 여러 가지 점에 있어서는 그의 초기 성령론에 비해 많은 변화를 보여주었다.
그리고 이상과 같은 조용기 성령론의 변화와 발전은 곧 한국 전통 오순절주의의 성령론의 발전을 일반적으로 대변해 주는 것이라고 본다.
그렇다면 현대의 전통 오순절주의는 지난날 개혁파 성령운동의 강조점인 성령과의 인격적 교제의 중요성이나 기독론과의 연계, 또 웨슬리안 성결운동 노선에서 강조한 성결의 차원 등을 잘 포용하여 더욱 알찬 성령론을 향해 발돋음해 나가고 있다는 점을 인정할 수 있게 된다.
은사갱신운동가들의 성령세례 이해
국내에서는 은사갱신운동의 영향이 북미와 영국에서 ‘제 2의 물결’로 분류될만큼 어떤 뚜렷한 구분을 주지 않았다. 은사갱신운동가들의 저서들이 국내에 최초로 번역되어 소개되기 시작한 때는 1970년대 후반부터인데, 당시는 한국에 마침 성령론 논쟁이 달아오르기 시작할 때로서, 이 번역서들은 주로 전통 오순절주의 성령론으로 간주되곤 했다.
그때 국내 신학계에는 아직 전통 오순절주의와 은사갱신운동 간의 구별에 대한 인식이 거의 없었던 때였다. 그리고 최근에는 제 3의 물결의 저서들이 쏟아져 나오고 있지만, 일반 독자들은 이 세 물결 간의 성령론에 있어서의 구별을 거의 인식하지 못하고, 함께 통털어 오순절주의 성령론으로 구분짓는 것이 통례이다.
그러면 국내 독자들에게 친숙한 몇몇 은사갱신운동가들의 저술속에 나타나는 성령세례론을 살펴 본다.
세릴(John L. Sherrill)은 성령세례가 인간이 하나님과의 완전한 접촉을 나타내는 순간을 묘사하는 것으로서, 성서 속에 이를 표현하는 여러 다른 단어들도 있다고 하였다. 성령이 인간에게 내려온다고 하거나, 성령에 의해 충만히 채워진다고 하거나, 성령을 받는다고 하는 표현도 있다.
이 모든 표현들이 똑같은 체험으로서의 성령세례를 의미한다고 그는 보았다. 그리고 이 체험을 할 때 방언이 나타나게 된다고 하였다. 성령세례를 받은 사람은 반드시 그렇지는 않지만 적어도 사도행전의 예가 가장 적절한 도움이 될 것이라고 하면서 방언의 체험을 강조하였다.
베네트(Dennis J. Bennett)는 성공회 신부이지만, 후에 은사갱신운동의 선구자가 되었다. 그의 Nine O'clock in the Morning은 1970년 New Jersey의 Logos International에서 출판된 이후 많은 독자층을 형성하게 되었다. 국내에는 「성령세례와 방언」이라는 제목으로 번역되어 소개되었다. 그는 자신의 책에서 방언을 말하게 되는 체험을 성령세례를 받는 것과 거의 동일시하였다.
그는 또 다른 저서에서 사도행전에 나타난 사마리아의 성령 사건을 다루었는데, 이에 대한 해석에서 말하기를, “성령은 이미 사마리아의 신자들에게 거하고 계셨다. 성령은 그들의 혼과 육을 적셔서 세례를 주고 흘러 넘치게 할 준비가 되었으나, 그들이 그것을 경험하기 위해서는 반응해야만 했다. 그들이 반응하자마자 성령은 오순절날 초기 신자들에게 하신 것처럼 쏟아 붓기 시작했다. 의심할 바 없이 그들은 새 언어로 말하면서 하나님을 경배하며 같은 표증을 나타냈다”고 하였다.
또 그의 고린도전서 12장 13절의 해석은 마치 로이드존즈의 두 세례를 연상케 해 주는데, 예수를 구주로 영접하는 순간 일어나는 그리스도와 합해지는 영적 세례와 그 다음에 따르는 성령으로 받는 세례를 말한다. 여기서 후자는 신자 안에 이미 내재하는 성령이 밖으로 나와 예수를 믿는 신자들의 삶을 통해서 세상으로 예수를 나타내는 것이라고 보았다.
베네트는 성경에 나오는 성령세례의 사례에서 방언으로 말하는 것이 공통적이었다고 하면서, 초기 신자들은 개종한 자들이 성령을 받았는지 안 받았는지를 즉시 말할 수 있는 비결을 분명히 가지고 있었던 것 같다고 하였다. 그는 방언으로 말하는 것 자체가 곧 성령세례를 받는 것이라고는 할 수 없으나, 방언은 성령세례를 받을 때 일어나는 일이고, 또 바울이 말한대로 ‘성령충만을 지속’(엡 5:18)하는 데 도움이 되는 중요한 자원이 된다고 하였다.
많은 믿음의 사람들이 성령으로 세례받기를 기도하지만, 방언으로 말을 시작하는 데는 실패한다고 베네트는 지적하였다. 그 이유로서 그들은 하나님이 그렇게 하기를 원하시지 않는다고 생각하고 당연히 받을 것으로도 여기지 않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그러나 그들에게 설명을 잘 해주고 질의응답을 통해서 교육을 시키고 나면, 그들은 자신의 속박을 깨고 나와 성령이 주시는 말을 시작할 것이라고 믿는다고 말했다.
맥너트(Francis MacNutt)의 Overcome by the Spirit을 번역한 예영수는 역자 서문에서 밝히기를, 이 책은 성령의 권능이 임할 때 나타나는 신기한 현상들을 성서적으로, 교회사적으로 그 찬반(贊反) 이론을 깊이있게 연구하고 있으며, 또한 체험적인 면에서 많은 실례를 들어 사실과 증거를 제시하고 있다고 하였다.
맥너트는 특히 성령 안에서 쓰러지는 현상은 그 자리에서 하나님의 능력이 우리의 약함을 통해 분명하게 드러남을 깨닫게 되는 체험이라고 설명하였다. 하나님께서는 우리 자신의 통치 행사를 버리도록 요구하신다. 위대한 부흥운동의 특징은 성령의 권능으로 충만한 설교를 들은 사람들이 마치 거대한 포탄이라도 맞은 것처럼 넘어지고, 기절하고, 소리치고, 땅에 푹 고꾸라지는 등과 같은 현상을 동반했다.
우리가 창조주의 능력과 대면할 때, 성령의 권능에 의해 넘어뜨려지는 모양이 좀 우스꽝스럽게 보일지라도, 그것은 어떤 면에서 우리의 삶에 대한 통치권을 그분께 양도하라고 요구하시는 일종의 예언적 행위로서 우리의 발을 넘어뜨리심을 믿는다고 그는 고백하였다.
필자의 영성상담 홈페이지 http://bay.pe.kr
배본철 교수(성결대학교 신학전문대학원장)
© 2020 Christianitydaily.com All rights reserved. Do not reproduce without permission.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