독일 튀빙겐대학교 개신교 신학부 신약학 은퇴교수인 헤르만 리히텐베르거 박사의 글을 제자인 문배수 박사(대신대)의 번역으로 세 차례에 나눠 소개합니다. -편집자 주

ⓒunsplash.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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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마에 있었던 그리스도교 교회는 당시 이스라엘 땅을 벗어난 곳 중 가장 중요한 기독교 공동체였고, 그 흔적이 사도 시대에까지 거슬러 올라간다.

로마의 기독교 역사는 유대 공동체와 매우 밀접하게 연결돼 있다. 로마 기독교는 유대 교회에서 성장한 것이기도 하다. 그래서 로마 기독교 초기가 어떠했는지를 묻는 것은 유대 공동체를 살펴보는 것을 뜻한다.

두 공동체 간의 공통점과 차이점에 대해, 우리는 이스라엘과 교회를 위한 역사를 예로 탐지할 수 있다.

이스라엘 땅에서 발생한 힘의 관계처럼 로마에서도 유대 기독교가 그 영향력을 잃게 되었을 때, 그곳에는 매우 긴장감 넘치는 공생의 관계가 발전하고 그 후에 기독교 공동체는 유대 공동체가 가진 역사의 영향력을 자신의 뒤로 흘러보냈다.

로마에서도 마찬가지이지만, 우리는 디아스포라 유대인 연대가 예루살렘을 향했다는 것을 알고 있다. 그러니 로마에 처음 기독교가 들어온 것은 기독교가 안디옥에 이르른 때와 거의 같다는 설은 개연성이 충분하다.

초기 기독교에 대한 연구는 진지하면서도 기꺼이, 안디옥에 세워졌던 교회나 2세기 로마를 살펴보게 한다.

우리는 이제 베일에 쌓인 로마 기독교 초기 가운데, 세 가지 길로 그 주제에 더 가까이 다가가고자 한다. 우선은 A.D. 50년대와 60년대 유대인들과 기독인들에 대한 소식을 가려낸다(I와 II).

그것은 요세푸스와 바울이 로마로의 여행에 동행하기 위한 것이고(III), 또 결국 네로 시대 때 로마에 있었던 유대인과 기독인의 관계를 확정짓기 위해서이다(IV).

이미 초기 교회는 유대교, 기독교 그리고 이방 세계가 만날 수 있다는 가능성을 생각하고, 편지 교환을 언급했다. 유세비우스는 그것을 불가능하게 여기지 않았다(『교회사』 II, 17,1).

베드로가 로마에서 복음을 전하던 무렵, 필로와 베드로는 클라우디우스 황제 시대 때 로마에서 서로 교제를 나누었다고 했다. 비록 우리가 유세비우스의 설명에 동의할 수 없더라도, 그의 판단은 두 인물이 갖는 중요성과 그들의 만남이 어떤 의미를 가질 수 있는지를 보여준다.

기독교 초기에 바울과 세네카가 서로 만났다는 이야기처럼, 기독교 초기에 일어날 수 있는 만남은 상상을 자극한다. 그것에 대한 증거는 임의로 만들어진 편지 교환이다.

그들이 편지를 교환했다는 것은 히에로니무스(VirIII 12)와 어거스틴(Ep 153)에게 이미 알려진 것이었고, 이들은 그것을 높이 평가했다. 그래서 히에로니무스는 세네카를 자신이 기록한 성자들의 목록에 받아들였다.

세네카는 소위 신약성경에 있는 바울의 편지들을 알고 있고(첫 번째 편지), 바울이 있는 상태에서 그것을 네로 황제에게 읽어주어야 한다고 주장한바 있다(세 번째 편지).

세네카가 황제 앞에서 바울의 글을 읽고 그에 대한 황제의 반응을 (바울에게) 보고했을 때(일곱번째 편지), 바울은 안절부절하며 이런 일이 다시 일어나지 않도록 해달라고 간청한다(여덟번째 편지).

세네카는 바울의 반응을 보며 추측하기를, 바울이 황제의 부인 포프페아 사비나(Poppäa Sabina)를 두려워하기 때문이라고 여긴다. 여기서 포프페아 사비나는 유대교를 좋아하는 여인으로 간주되었다.

그것이 상상이라 하더라도, 매우 긴장감 넘치는 삼각형, '이방세계-기독교-유대교'가 만들어질 수 있다. 이방세계는 세네카의 모습에서, 유대교는 소위 유대교를 좋아하고 거기에 공감하는 포프페아 사비나 속에서 그리고 기독교는 바울이라는 사람에게서 구체화된다. 이 세 위인들 간의 관계가, 다음 이어지는 사고를 연결시킨다.

I. 바울 시대, 로마에 살던 유대인들에 대한 보고

1. 필로

필로는 유대 사절단 단장으로서 서기 40년 로마로 갔다. 이는 2년 전인 38년 알렉산드리아에서 일어난 대규모 유대인 학살에 대해 항의하면서, 유대인들이 헬라인들과 동일하고 안전이 보장된 권리를 가질 수 있도록 황제에게 요구하기 위해서였다.

헬라인들도 유대인들과 마찬가지로 반유대주의자 아피온의 인도로 사절단을 파견했다. 칼리굴라 황제는 유대인 사절단과 그들의 관심 분야를 무관심하게 다루며 그들을 낙담시켰기에, 칼리굴라가 예루살렘 성전에 자신의 동상을 세우라고 명령하자 사절단의 의심은 최고조에 달했다.

필로는 그 속에서 분명하게 보았다. 알렉산드리아에서 일어난 유대인 학살과 황제가 유대인들을 간섭하는 것은 우연한 사건이 아니고, 그리스 헬라주의 세계와 (알렉산드리아 도시 관련해) 로마 세계권력이 유대교와 유대인들이 믿는 유일신 신앙에 대한 도전이었다.

그래서 그는 유대인들과 유대인들의 예배를 존중하고 유대인들을 관대하게 대해 주었던 아우구스투스 황제를 기억했다.

"그들이(유대인들이) 회당을 소유하고 있었고, 그곳에 특별히 거룩한 안식일에 모여 그들 조상의 철학으로 가르침을 받는 것을 아우구스투스는 이미 알고 있었다. ... 황제는 유대인들의 회당에 어떤 변화도 주지 않았고 그들이 모여 율법을 해석하고 예물을 바치는 것을 방해하지 않았다(『갈리굴라에게 가는 사절단』 Legatio ad Gaium 155-156)."

필로는 반유대주의 성향을 가진 참모들 말을 듣고, 자기 자신에 대한 과대망상에 빠진 칼리굴라와 아우구스투스 황제의 넓은 마음을 대조시킨다. 반유대주의의 목소리는 대도시에 사는 민중들을 지배할 뿐 아니라, 추가로 배운 사람들이 말과 글로 공공연하게 추가로 참여하고 기여했다.

2. 유대인들의 거주지와 회당공동체의 구성

로마에서 유대인들 거주지와 그들의 법적 지위에 대한 가장 중요한 증거는 거듭 필로가 쓴 칼리굴라에게 보내진 사절단에 대한 기록이다 (LegGai 155-156).

"티베르 강 건너편 로마 도시의 상당 부분이 유대인들 소유이자 그들의 거주지였다는 것을 아우구스투스는 잘 알고 있었다. 그들 중 많은 이들이 자유인이었고 로마 시민들이었다.

왜냐하면 그들은 전쟁포로로 로마에 왔지만, 그들 주인이 그들을 풀어주며 그들 전통을 포기하도록 강요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유대인들은 회당을 가지고 있고, 그 안에서 모여 특히 거룩한 안식일에는 공공연히 조상들의 철학으로 가르침을 받는다."

유대인의 주된 거주지는 트라스테베레(Trastevere)였고 문서상 또한 다른 장소도 있다. 로마 남서쪽 카페나(Capena) 성문 앞에 있었다던 크벨린페 에게리아의 하인이다(Juvenal, Sat III, 10-18).

트라스테베레와 하인 두 곳에 유대인 거주지가 있었다는 것은 고고학 증거를 통해 확증되었다. 우리가 이미 알고 있는 고대 로마 13개의 회당공동체 중 서너 개 정도는 이미 1세기부터 존재했다고 받아들일 수 있다.

그것들은 유대인에게 친근했던 아우구스투스의 이름을 딴 아우구스텐저 회당(Augustenser), 아우구스투스의 사위 마르쿠스 비스파니우스 아그리파(주전 62-12)의 이름을 딴 아그리피넨저 회당(Agrippinenser), 그리고 히브리인 회당이다.

헨리 레온과 게오르게 라 피아나의 생각에 따르면, 히브리어 회당은 로마에서 가장 오래된 회당들에 속한다. 왜냐하면 사람들이 명백히 다른 인종 집단과 차별화시키기 위해 그 이름을 선택했기 때문이다.

베르타쿠리(Vernaculi) 회당은 언어 때문에 '히브리인'들과 구별된다. 추가로 1세기에 이방인의 것으로 보이는 비문에서 기도처(προσευχη,)가 나오는데, 그것은 에스쿠이리아 성문과 콜리나 성문 사이에 공화군 성벽에서 발견되었다.

우리가 특정 이름들을 증명할 수는 없겠지만 상당한 수의 공동체가 있었다는 것을 고려해야 한다는 점을, 기도처들(προσευχαι,)에 대해 말하는 필로가 증거하고 있다(LegGai 157).

예수와 제자들의 ‘최후의 만찬’에서 떡과 포도주를 나누는 모습. ⓒ영화 ‘패션 오브 크라이스트’ 中
예수와 제자들의 ‘최후의 만찬’에서 떡과 포도주를 나누는 모습. ⓒ영화 ‘패션 오브 크라이스트’ 中

3. 로마 유대 공동체의 권리와 구성에 대해

제국 서쪽 지역과 로마에 있는 회당공동체는 황제에 해당하는 시저 시대 이후 법적으로 사회구성원(Kollegien)에 따른 단체와 달리, 다양한 면에서 괴롭힘 당하지 않는 법인(collegia licita)으로 존재했다.

몇몇 회당들은 그들 나름의 행정조직과 직책을 가지고 있었다. 회당 전체로 감독이나 당회 밑에 놓이는 중앙 집중적 구성 유형은 로마에 있었던 회당에는 아직 없었다.

사도행전 28장 17절에서 바울이 '유대 지도자들(του.ς ο;ντας τω/ν VΙουδαι,ων πρω,τους)'을 자신에게 불렀을 때, 바울은 로마에 있는 유대 공동체의 대표자들을 생각했음에 틀림이 없다.

카타콤 지하무덤 비명에 새겨진 직책들은 분명 공동체가 도시 지도자들에 의해 소아시아 도시가 움직이는 것과 같은 체제(πο,λεις Αrchonten)와, 팔레스타인에서 비롯된 장로 구조 체제에 의해 영향을 받았음을 보여준다.

우리는 분명 이스라엘 땅과 소아시아에서 온 이주자들이 로마에 있는 공동체에서 그들의 새로운 고향을 발견했다고 결론내릴 수 있을 것이다.

II. 바울 이전, 그리고 바울 시대 때 로마에 있었던 기독교 공동체

1. 유래와 형성

로마 공동체는 바울에 의해 세워지지 않았다. 그들은 바울이 로마서를 기록하던 때(57/58년)에는 적어도 그리스도인들 안에서 상당한 명성을 얻고 있었다. "너희 믿음이 온 세상에 전파됨이라(롬 1:8)". 그러나 그보다 더 이른 시기에 대한 보고는 없을까?

무엇보다 눈에 띄는 어거스틴의 증거를 지적할 수 있다(Ep 102, 8). 그것에 따르면 '유대인의 율법'이 칼리쿨라가 통치할 때, 아니면 그 통치 시기가 끝난 후 곧바로 로마에 들어왔다.

마틴 헹엘은 테오도르 잔을 따르면서, 유대인들이 주전 2세기에 이미 로마에 있었다는 것을 증명할 수 있다고 한다. "이 기사는 그리스도인이라는 유대인 분파와 관련되며, 이들 그리스도인들은 로마에 있는 유대 회당안에서 선교 활동을 하고자 했다."

이것은 매우 탁월하게, 클라우디우스의 짧은 논평에서 말한 폭동과도 상응한다. "왜냐하면 유대인들이 그리스도라는 자신들의 지도자 영향 하에서 계속 소란을 일으켰기 때문에, 그는(로마 황제) 유대인들을 로마에서 쫓아냈다(Sueton, Caes Claudius 25, 4: Iudaeos impulsore Chrestos assidue tumultuantis Roma expulit)."

오로시우스의 증거에 따르면(7,6,15) 그 사건에 대한 연도는 49년이 가장 맞을 것이다. 반면 디오 카시우스(60,6,6)는 모든 집회를 금지했던 41년에 대해 말한다.

로마에 기독교 공동체가 이미 있었다는 것에 대한 간접적인 증거는 바울이 50년에 고린도에서 만난 브리스길라와 아굴라이다.

"아굴라라 하는 본도에서 난 유대인 한 사람을 만나니 클라우디우스가 모든 유대인을 명하여 로마에서 떠나라 한 고로 그가 그 아내 브리스길라와 함께 이달리야로부터 새로 온지라(행 18:2)".

이 언급도 오히려 49년에 일어난 추방에 대해 말하고 있다. 브리스길라와 아굴라는 고린도에 오기 전, 이미 그리스도인이 되었음에 틀림 없다.

왜냐하면 ①성경 어디에서도 이들이 세례받았다는 것에 대해 말하고 있지 않으며 ②만일 이들이 비그리스도인들이었다면, 과연 바울과 같은 기독교 선교사에게 잠자리와 일자리를 제공해 줄 수 없었을 것이고 ③나중에 브리스길라와 아굴라가 회심을 미리 했다는 설명 없이 에베소에서 아볼로에게 기독교 신앙을 가르치고 있기 때문이다.

그들이 로마에서 쫓겨나기 전부터 그리스도인이었다는 것을 누가는 보고할 수 없었다. 왜냐하면 누가는 바울을 로마에서 복음 전하는 설교자로 만들고 싶어했기 때문이다(행 28:30).

그렇지만 누가는 존경하는 차원에서 바울을 마중나갔다는 보도를 위해 보디올(역자 주: 한글 개역성경에 따른 이름이고 본문은 Puteoli로 되어 있음)과 로마에 그리스도인이 이미 존재했다는 것을 시인해야 했다(행 28:14-15).

2. 로마 기독교 공동체를 위한 증거로서의 로마서

로마서에서 특이하게 많이 논의되는 문제는 로마 기독교인이 이방 세계에서 왔다는 것이다. 그것이 로마서 편지 내용, 그리고 구약성경의 사용과 경쟁하고 있다는 점이다.

편지의 내용과 구약성경 사용은 오히려 유대 기독교 독자들에 대해 더욱 생각하게 한다. (앞서 말한 바 이방인들에게서 유대교에 동정하는 사람들이 있었다는 말은 로마 내 기독교인 정체에 대한 배경을 보여준다.)

이방인이지만 회당 내에 유대교에 우호적이면서 경건한 자들이(σεβο,μενοι) 있었다는 것을 우리가 생각한다면, 로마 기독교 유래에 대한 문제가 갖는 난해성은 상실된다.

바울이 로마서에서 율법에 대한 일관성 대신 때때로 매우 다르게 말했음을 고려하면, 다음에 이어지는 관점은 중요하다. 로마의 문학계와 일반 여론에서 매우 강하게 반유대주의 정서를 선동하고 유대인을 반대하는 목소리가 일어났으며, 특히 유대 율법 준수에 대해 경멸하는 견해가 있었다는 것이다.

그 점을 고려해, 바울에게 틀림없이 다음 사실이 중요했을 것이다. 즉 율법에 대한 바울의 진술이, 로마에 있는 이방 기독교인과 유대 기독교인의 경우 유대인을 악담하는 것으로 보이지 않게 하는 것이다. 그래서 바울은 율법의 거룩성을 재차 강조하며, 율법은 거룩하고 의롭고 선한 것이다고 주장했다(롬 7:12).

동시에 분명하게 우리는 유대 기독교인들에 대해 말해야 한다. 그들은 숫자상 적었던 것 같지만, 편지 내용으로 보건대 그들은 매우 중요했다.

우선 브리스길라와 아굴라가 세운 가정교회를 말할 수 있다(롬 16:3-5). 안드로니고와 부인 유니아는 바울의 친척으로서 함께 감옥에 갇힌 '동지'였고, "사도들에게 유명한 자들"이었다 (롬 16:7).

우리는 신학적으로 1세기 후반 첫 번째 '클레멘스의 편지'에서 강한 유대교 전통을 감지할 수 있다. 이 전통은 당시 유대교 회당을 선호한 경건한 자들(σεβο,μενοι)에게서 왔을 것이다.

우리는 페터 람페와 함께 다음과 같이 말할 수 있다. "회당 출신의 그리스도인, 즉 이방 기독교인과 같은 유대 기독교인은 처음에 로마라는 도시의 기독교 신학을 형성하는 데 막대한 영향을 끼쳤다".

로마 내 유대인과 기독인에 대한 이 단편 보도와 함께, 우리는 유대에서 로마로 가는 두 여행자를 이끌어 들이고자 한다. <계속>

헤르만 리히텐베르거(Dr. Hermann Lichtenberger)

튀빙겐대학교 개신교 신학학부 신약학 은퇴교수
1988년 이후 독일 뮌스터대학과 튀빙겐대학에서 신약학 교수로 재임.
튀빙겐대학 고대 유대교와 헬라주의 종교사 연구소 소장

박사학위와 박사후 논문
『쿰란 문서에서 인간상에 대한 연구』
『로마서 7장에 나타난 바울의 인간론 연구』

해당 원고를 번역한 문배수 박사.
해당 원고를 번역한 문배수 박사.

번역 문배수(Th. D.)
총신대 수학 후 독일 튀빙겐대에서 신약학 학위
『유대교 전승과 헬라주의적 구성: 사도행전 15장과 17장에 대한 주석학』
현 대신대학 강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