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태초에 하나님이 천지를 창조하시니라(창 1:1)".
하나님께서는 말씀으로 모든 세계를 창조하셨습니다. 그러므로 세상 만물은 우연이나 진화의 산물이 아니라 하나님의 분명한 목적과 의도에 따라 창조된 것임을 믿어야 합니다.
그리고 하나님의 형상으로 창조된 인간은, 하나님과 교제하며 피조 세계를 다스리는 권한과 그 책임을 부여받았습니다.
창세기 1장 7절에는 "하나님이 궁창을 만드사 궁창 아래의 물과 궁창 위의 물로 나뉘게 하시니 그대로 되니라"고 말씀합니다. 창조 사역의 장엄함은 우리 인간들의 상상을 초월하는 것이므로, 창조 사역의 수단이나 방법에 대해서는 "그대로 되니라"는 간단한 문장만이 있습니다.
하나님의 절대적인 권능을 선언적으로 표현하고 있는 이 말씀은 창조주의 놀라운 성취를 돋보이게 하는 절대적인 권한을 보여줍니다.
하나님께서 만물을 창조하시는 가운데, 스스로 창조하신 것에 대해 심히 만족하시는 말씀이 있습니다. "보시기에 좋았더라"는 말씀으로, 7번까지 기록돼 있습니다.
그리고 창조의 사역을 마치신 후 안식하셨던 것을 기억하여, 주일 공예배의 중요성을 우리 신앙인들은 깊이 새겨 실천해야 할 것입니다.
2017년 5월 10일, 취임을 축하하기 위해 모인 국민들과 외국 사절단들의 환호 가운데 취임식을 마친 문재인 대통령은 집무실인 청와대로 이동하기 위해 대통령 전용차에 올랐습니다.
시민들은 우르르 국회 앞 도로를 점령하다시피 했고, 문 대통령이 탑승한 차를 향해 열렬히 박수를 치며 "대통령님 사랑합니다"를 연신 외쳤습니다.
취임사에서 선언한 "아무도 경험해보지 못한 나라"에 대한 부푼 기대감에 흠뻑 젖어, 소리치며 행복해하던 모습들이 떠오르며 귓전으로 전해옵니다.
콜럼버스가 생존했던 당시, 이베리아 반도 수평선 끝은 그야말로 '아무도 가보지 않은 길'이었습니다. 당시 지구가 둥글다는 사실을 아무도 모르는 탓에 생긴 오해로, 수평선 끝은 낭떠러지라는 생각을 갖고 있었습니다.
특히 이는 해가 서쪽으로 지는 것 때문에 생긴 오해이기도 합니다. 물론 지금 현대인들의 생각으로는 참으로 우스꽝스러운 괴담이 아닐 수 없습니다.
그런 상황에서 서쪽 먼 바다로 떠난다는 것은 아무도 엄두를 내지 못했으며, 아무도 할 수 없었던 모험이자 아무도 가지 않았던 길이었습니다. 콜럼버스는 벅찬 가슴과 부푼 꿈을 안고 도전의 길을 택했던 것입니다.
콜럼버스가 아메리카 신대륙을 발견한 뒤, 약 150년이 지나면서 유럽인들은 새로운 땅, 아무도 가보지 않은, 아무도 경험하지 못했던 미지의 땅으로 꿈을 안고 신대륙을 향해 잇달아 이주해 살게 되었던 것입니다.
당시 청교도들은 가톨릭의 박해와 탄압을 피해 종교의 자유를 찾아 아메리카 신대륙을 밟았고, 어떤 이들은 정치적인 고난을 피해 망명하기도 했으며, 또 어떤 이들은 새로운 곳에서 돈을 벌기 위해 이곳을 찾았습니다. 여기에 큰 죄를 지어 쫓겨 온 사람들까지, 신대륙 국가들은 다양한 사람들로 구성이 되어 이룩된 곳입니다.
아무도 가지 않았던 길을 향한 콜럼버스의 도전의 성공은 꼬리에 꼬리를 물어 유럽 사회를 세계의 중심으로 바꿔놓았습니다. 아무도 가도 않았던 길, 아무도 경험하지 못했던 길, 참으로 고통스럽고 험난한 도전이었지만, 그래서 오늘날 세계를 마음대로 움직이는 최강의 나라가 된 것 아닐까요? 이것은 오로지 하나님께서 믿는 자들에게 주신 선물, 창의적인 창조정신이 아닐까요?
하지만 현 시대를 바라보면, 대통령께서 취임사에서 선언했던 모든 약속들이 지켜지지 않았음을 봅니다. 오히려 국민들을 현혹하여 혼란스럽게 하며, 법과 원칙이 무너지는 작금의 시대는 '내로남불'이 표준이 되어 버렸습니다.
정말 아무도 경험하지 못한 일들만 생산하고 있지만, 백성들은 물론 언론을 비롯해 종교인들까지 일체 함구하고 있으니, 이 역시 한 번도 경험하지 못했던 나라의 모습이 아니겠습니까?
대통령이 꿈꾸며 생각한, 한 번도 경험하지 못한 나라는 과연 어떤 나라일까요? 대통령 취임사에서 국민들은 유토피아를 꿈꾸었을까요? 아니면 이상향의 나라를 기대했을까요?
기대했던 꿈은 여지없이 짓밟혔고, 백성들이 꿈꾸며 기대하는 나라는 유토피아와 이상향과는 거리가 멀었습니다. 그들만이 꿈꾸었던 그들만의 유토피아와 이상향을 향해 나라를 좌지우지 하는 거짓과 위선의 향기는, 그들이 계획하고 그들이 추구하는 상상과 아성의 나라가 아닐까 싶습니다.
한 번도 국정을 경험한 일이 없는 이들이 국정을 좌지우지한 탓에 하루하루가 두렵고 불안하며, 눈앞이 캄캄하고 방향감각을 잃어 혼란스럽기도 합니다.
우한 코로나 바이러스가 전국적으로 확산해 가는데도 이를 수수방관으로 일관하더니, 지금은 온통 나라가 격랑 속으로 떠내려가는데도 자화자찬하는 모양새에는 그저 한숨만 나올 뿐입니다.
정상적인 국민들이 바라보는 시각이라면, 한 번도 경험한 적 없는 나라임에 틀림 없어 보입니다. 모든 것이 안하무인인 나라, 누구도 잘못할 수 있다는 지극히 당연한 사실이 부인되는 나라, 그런 오만과 철면피로 뭉친 사람들이 통치하는 나라라는 점에서 한 번도 경험한 적이 없는 나라. 그들이 주장하며 고집하는 것이 어쩌면 당연하다고 볼 수도 있지 않겠습니까?
하지만 백성들은 대통령의 그 멋진 취임사의 진의를 진즉 알아채지 못했습니다. 백성들에게 잘못이 있다면, 그를 대통령으로 선택한 것이 아마 가장 큰 잘못 아닐까요?
엊그제만 하더라도 마스크는 지천에 널려 있었습니다. 날씨가 춥거나 혹 감기라도 걸리면 마스크 착용을 쉽게 할 수 있었는데, 어찌하여 그 흔한 마스크 하나 제대로 해결하지 못하고 길거리에서 몇 시간을 길게 줄을 서야 하는 것입니까?
그것도 공짜로 주는 것도 아니라 돈으로 사야 하며, 마스크 하나 사는데 개인 신상정보를 증명하기 위해 주민등록증까지 제시해야 하니, 이것이 정녕 그들이 말하는 한 번도 경험하지 못한 나라인 것일까요?
어느 지방자치제 책임자와 아파트 관리자가 스마트한 지혜로 마스크 문제를 단번에 해결하는 모습을 보면, 나라와 백성들을 책임지고 국정을 운영하는 분들의 위기대처 능력이 이 정도 밖에 안 되나 싶습니다. 한심한 이들에게 계속해서 국정을 맡길 수 있을까 하는 불안한 마음이 생깁니다.
지금은 백성들의 한숨 소리만 깊어가고 있는 실정입니다. 국민의 생명을 담보로 한 번도 경험하지 못한 위험한 연습을 거듭하며 실험하는 것 같아, 두려움과 불안한 마음 가득할 뿐입니다.
어떤 정책을 시도할 때는 깊은 논의를 거친 다음 전문가들과 상의하며 국민들의 호응을 얻어낸 후에 비로소 시작해야 할 것입니다. 시간적·경제적으로 향후 발생할 장단점을 면밀히 검토한 후 국정을 운영해야 하는데, 생각나는 대로 대충대충, 잘못되면 남에게 그 책임을 전가해 버립니다. 자신들과 반대에 서 있는 당이나 사람들에게, 그리고 타기관으로 책임을 떠넘기기에 급급한 모습은 실로 안타까울 뿐입니다.
그리고 나라에 큰 재난이나 위기가 닥쳤을 때, 우리 기독교는 교파를 초월해 모두가 한 마음으로 총력을 기울어, 이 위기를 극복해 나가야 하지 않겠습니까? 마스크 예배와 영상 예배도 중요하지만, 의료진을 필두로 물심양면으로 도우며 함께 고통을 분담하는 모습들이 곳곳에서 일어나야 하지 않겠습니까?
영상 예배만이 예배가 아니라, 고통당하는 현장으로 직접 찾아가서 그들의 아픔을 함께하며 재능을 기부하는 그 예배도 참된 예배가 아닐까요?
교단마다 총회가 있고 노회가 있고 교회 안에는 당회가 있으며, 당회 산하에도 많은 기관들이 있습니다. 하지만 너도나도 이 고통을 위해 머리를 맞대고 의논하는 기관들을 눈 뜨고 찾아볼 수 없습니다. 주님께서 당부하신 "네 이웃을 네 몸과 같이 사랑하라"는 말씀에는 어찌 그리 고요한지요?
기독교는 창조의 종교입니다. 하나님께서 이 세상을 창조하시고 사람을 창조하셨습니다. 창조의 정신이 없는, 즉 창의성이 없는 교회는 발전이 없습니다. 늘 구습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시시때때로 발 빠르게 변모하는 세상에서, 우리 기독교는 세상을 품고 보듬으며 사랑을 실천해야 할 것입니다.
특히 우한 코로나 사태로 인해 정치적으로 교회를 다스리려 하는 정치 지도자들이 있습니다. 자신들이 저지르는 잘못을 신천지나 교회로 화살을 돌리며, 그들이 저지른 실수에 대해 국민들로 하여금 눈을 옮겨가도록 하기 위해 예배까지 방해하는, 여태 한 번도 경험하지 못한 일들을 서슴치 않고 자행하는 현실입니다.
기독교의 지도자들은 지금 이 시대에 무슨 생각을 하고 계시는지, 참으로 안타까운 마음 금할 길이 없습니다.
믿음의 선배들이 그 어려운 환경과 여건 속에서 오직 믿음으로 꿋꿋이 지켜냈던 것은 하나님께 드리는 예배의 정신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그렇게 선배님들은 신앙을 지키고 교회를 지켜냈던 것입니다.
향후 그들이 꿈꾸는 사회주의 체제가 들어선다면 우리의 공적 예배는 물론, 우리 신앙까지 잃어버리는 참혹한 시대가 도래할 수 있음을 인지해야 할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선물로 주신 이 나라를, 우리 기독교인들은 교파를 초월해 함께 지켜내야 하겠습니다.
더 이상 한 번도 경험하지 못했던 나라가 되지 못하도록, 하나님을 사랑하는 우리 모든 기독교인들은 기도와 찬송으로 예배를 막으려는 시도를 막아내야 할 것입니다. 나아가 몸으로라도 막아내는 순교의 정신으로 이번 위기를 잘 극복해 나가야 할 것입니다.
신앙인으로서, 그리고 교회가 교회다운 사명을 잘 감당하여 이 땅에 창조적인 예배와 기도, 찬송이 끊이지 않는도록 아름다운 창조주의 나라로 만들어 가야 하겠습니다.
인간들이 자신의 방식대로 우상을 섬기는 것은 어리석고 무익한 일일 뿐 아니라, 엄연한 영적 간음행위입니다. 지금이라도 최후의 날이 오기 전에 방향을 전환하여,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나라로 만들어가야 할 것입니다.
이효준 장로(객원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