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베드로후서 2장 15-22절
평행선과 탈선
기차가 달리는 선로는 평행선이다. 기차 선로가 평행선이 아닌 경우는 없다. 평행선이 아니면 탈선하기 때문이다. 기차가 탈선하면 곧바로 대형 사고다.
기차 선로가 평행선인 것은 옳다. 하지만 옳지 않은 평행선이 있다. 부부 관계의 평행선이다. 부부 관계가 평행선이면 괴롭다. 평행선이 지속되면 부부생활이 지옥이 된다.
기차 선로와 같이 옳은 평행선이 있다. 신앙의 평행선이다. 그리스도인은 신앙생활을 할 때 하나님과 평행선이어야 한다.
팽팽한 신경전과 같은 평행선이 아니다. 하나님의 뜻과 함께 어깨동무하면서 가는 평행선 말이다. 만약 하나님과 평행선이 못되면 반드시 하나님 밖으로 탈선한다.
옳지 않은 운전이 있다. 바로 음주운전이다. 음주운전은 운전자의 탈선이다. 운전자는 정상적인 몸과 마음 상태에서 운전하도록 되어 있다.
경찰관이 음주 단속을 왜 하는가? 운전자가 탈선하지 말라는 무언의 메시지다. 음주운전을 하는 순간, 결과는 뻔하다.
신앙생활은 하나님과 평행선을 달려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탈선하기 때문이다. 신앙생활 중 탈선은 몇 가지로 나타난다. 첫째, 우상을 숭배한다. 둘째, 이단에 빠진다. 셋째, 세상을 하나님보다 더 사랑한다.
우리의 신앙은 하나님과 함께 가야 한다. 신앙이 탈선하면 안 된다. 신앙이 탈선하는 순간 인격이 파괴된다. 더 나아가 가정이 파괴된다. 결국 영혼까지 파괴된다.
베드로 당시 그리스도인들도 탈선을 했다. 바른 길을 떠나 미혹의 길로 들어섰다(15절). 발람의 길을 따랐다(15절). 개가 그 토하였던 것에 돌아가고 돼지가 씻었다가 더러운 구덩이에 도로 누운 상태였다(22절).
이 말은 한 마디로 당시의 그리스도인이 탈선했다는 것을 말한다. 곧 그리스도인들이 하나님과의 평행선을 깬 것이다. 다른 말로 하나님께서 원하시지 않는 선을 넘은 것이다. 돌아오지 못할 선을 넘어간 것이다.
하나님의 선을 넘으면 안 된다
신앙생활을 하다 보면 선을 넘을 수 있다. 하지만 돌아오지 못할 선은 넘지 않아야 한다. 선은 두 가지가 있다. 돌아올 수 있는 선, 돌아오지 못할 선이 있다. 대부분은 돌아오지 못할 선을 넘는다. 그러므로 그리스도인은 선을 넘지 않아야 한다.
왜 그리스도인은 선을 넘지 않아야 하는가? 넘는 순간 끝장나기 때문이다.
초대교회 그리스도인들도 끝장이 났다. 그들이 바른 길을 떠났다(15절). 바른 길을 떠나면 그릇된 길로 들어선다. 그들은 미혹의 길로 들어섰다. 그 미혹된 길을 발람의 길을 예로 들며 설명한다.
발람의 길은 불의의 삯을 사랑한 길이다. 가지 않을 길을 간 것이다. 발람은 불의의 삯을 사랑하다, 나귀에게까지 책망받은 사람이다. 발람의 행동은 소위 미친 행동과 다름 없었다(16절). 하나님은 오늘날 그리스도인이 발람이 길을 걸어가지 말자고 말씀하신다.
발람의 이야기는 민수기에 잘 담겨 있다. 시작은 발람이 하지 않았다. 발락이 시작했다. 발락은 모압 왕이었다. 이스라엘 자손이 모암 평지에 진을 쳤다.
발락은 이스라엘이 아모리 사람에게 한 것을 보았다. 이스라엘의 강함에 심히 두려웠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많음에 번민이 심했다. 그해서 찾은 묘책이 발람을 활용하는 것이었다. 발락은 발람에게 복채를 듬뿍 주어, 이스라엘을 저주하고자 했다.
이를 하나님께서 아셨다. 하나님께서 발람에게, 이스라엘을 저주하지 말라고 엄포를 놓으셨다. 그러자 주저했지만, 결국 돈 때문에 저주하러 길을 떠났다. 가다가 창피한 일을 당한다. 나귀에게 한 소리 들은 것이다.
하나님께서 발람에게 저주하지 말라고 하신 이유가 있다. 이스라엘이 하나님과 관계가 깊었기 때문이다. 즉 이스라엘은 하나님의 복을 받은 자들이었기 때문이다(민 22:12).
발람이 돈을 받고 이스라엘을 저주하는 것은, 선을 넘는 행위다. 기준 선인 하나님의 선을 넘는 악한 행위다.
발람만 선을 넘은 것이 아니다. 인류의 조상 아담과 하와도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않는 선을 넘었다. 넘지 않을 선을 넘자, 원죄가 인간에게 들어왔다.
군대 복무 중 어쩌다 한 번 들려오는 뉴스가 있었다. '휴전선 월북 사건'이었다. 휴전선을 넘어서는 안 된다. 월북하면 국가의 처벌을 받는다.
바다에도 선이 있다. NLL이다. NLL은 'Northern Limit Line'의 약자로, 북방한계선이다. 땅에 휴전선이 있다면, 바다에는 NLL이 있다. 이 선은 바다의 휴전선이다. 배는 NLL을 넘어선 안 된다.
신앙에도 선이 있다. 하나님의 선을 넘지 않는 것이다. 즉 하나님 말씀을 어기지 않는 것이다.
구약에서 선을 넘은 사람이 있다. 바로 요나다. 요나는 넘지 말아야 할 하나님의 선을 넘었다. 자기 생각으로 하나님 말씀의 선을 넘었다.
하나님의 뜻은 요나가 니느웨에 가서 복음을 전하는 것이었다. 그러나 요나의 생각은 다시스로 도망가는 것이었다.
그는 결국 하나님의 선을 넘어 다시스로 갔다. 이는 요나가 넘지 않을 선을 넘은 것을 말한다. 결국 큰 물고기에 잡아먹혔다. 하나님의 선을 넘으니, 생명의 위험선이 기다리고 있었다.
신약에도 선을 넘은 사람이 있다. 바로 베드로다. 예수님께서 베드로와 야고보와 요한을 데리시고 따로 높은 산에 올라가셨다.
그 때 예수님께서 제자들 앞에서 영광의 모습으로 광채가 나며 변형되셨다. 베드로는 엘리야, 모세, 그리고 예수님 세 명이 함께 대화를 하는 것을 목격했다. 그러자 베드로가 넘지 않을 선을 넘고 말았다. 그것이 마가복음 9장 5절 말씀이다.
"베드로가 예수께 고하되 랍비여 우리가 여기 있는 것이 좋사오니 우리가 초막 셋을 짓되 하나는 주를 위하여, 하나는 모세를 위하여, 하나는 엘리야를 위하여 하사이다."
베드로는 예수님의 마음을 헤아리지 않았다. 베드로는 예수님께서 평생 그곳에서 살자고 해도 안 된다고 말해야 했다. 하지만 먼저 그것에서 살자고 했다. 이는 명백한 선을 넘은 것이다.
신앙생활은 선 지키기다. 우리가 왜 예배를 왜 드리는가? 어떤 선인지 알기 위함이다. 우리가 어디까지 선을 지켜야 하는지를 알기 위함이다. 내 선이 아니라 하나님의 선을 지킬 수 있는 사람이 되는 시간이다.
저도 종종 선을 넘는다. 바로 분노의 선이다. 제게 분노는 넘지 않아야 할 선이다. 짜증은 아직 선을 넘은 상태가 아니다. 하지만 짜증이 지나치면 분노로 이어진다. 어떤 일이 있어도, 짜증을 넘어서 분노라는 선은 넘지 않아야 한다. 하지만 종종 넘는다. 그럼 무척 괴롭다.
믿음의 선은 넘어야 한다
우리는 하나님의 선을 넘지 않아야 한다. 그 이유는 돌아오지 못할 선이 되기 때문이다. 월북하면 다시 돌아올 수 없다.
반대로 넘어야 할 선이 있다. 믿음으로 행동하는 삶이다. 믿음으로 행동하는 삶은 과감하게 해야 한다. 즉 하나님께서 기뻐하시는 삶은 행동으로 옮겨야 한다. 그런 사람이 있는데, 바로 오병이어 기적 사건의 단초를 제공한 안드레다.
당시 유월절이 다가오고 있었다. 그때도 많은 무리들이 예수님께 몰려들었다. 그러자 빌립이 많은 사람의 식사를 걱정했다. 아무리 적어도 이백 데나리온 정도의 떡이 있어야 한다고 걱정한다.
안드레는 말로만 걱정하지 않았다. 행동을 했다. 안드레는 한 어린아이가 가지고 있던 보리떡 다섯 개와 물고기 두 마리(요 6:9)를 예수님께 가져다 드린다.
안드레의 행동을 본 뒤 예수님께서 말도 안 되는 행동을 하신다. 5,000명의 사람들에게 앉게 하라고 하신다. 그 뒤 떡을 갖고 축복기도 하신다. 다음에는 사람들에게 나눠 주라고 하신다. 그러자 5,000명이 배부르게 먹은 후 열두 바구니나 남겼다.
기적이 일어났다. 믿음으로 행동하니, 예수님께서 오병이어의 기적을 일으키셨다. 이와 같이 믿음으로 행동하는 것은 선을 넘어도 좋다.
믿음으로는 하는 행동은 선을 넘어도 된다. 제자들이라고 다 믿음의 행동을 한 것은 아니었다. 의심만 일삼는 제자도 있다. 바로 도마다.
도마는 예수님과 함께 3년을 보냈다. 그럼 예수님의 마음을 알 수 있는 시기다. 공생애 때 예수님께서 3일 만에 부활하신다고 말씀하셨다. 그걸 마음 속에 품어야 했는데 도마는 의심만 품었다.
도마는 예수님께서 부활 후 찾아오시자, 의심 병이 또 도졌다. 예수님께서 사흘 만에 살아나신 것을 믿지 않았다. 그러자 예수님께서 도마에게 "손을 내밀어 내 옆구리에 넣어 보라(요 20:27)"고 하셨다.
그리고 한 마디 덧붙이셨다. "믿음 없는 자가 되지 말고 믿는 자가 되라(요 20:27)".
믿음의 선을 넘으면 아름답다. 하지만 넘지 않으면 추하다. 도마는 의심 때문에 믿음의 선을 넘지 못했다. 그는 결국 의심에 갇혔다.
믿음의 선은 넘어야 한다. 하지만 돌아오지 못할 선은 넘지 않아야 한다.
하나님과 관계에서 '마네킹'과 같아야 한다
그럼 어떻게 해야 돌아오지 못할 선은 넘지 않을 수 있는가? 하나님과의 관계에서는 '마네킹'처럼 행동해야 한다.
마네킹은 어떤 말도 하지 않는다. 주인이 하고 싶은 대로 해 놓으면, 그 상태로 하루 종일 서 있다. 손님이 아무리 뭐라고 해도 가만히 있을 뿐이다. 마네킹은 절대 주인의 선을 넘지 않는다.
그리스도인은 때로 신앙생활을 마네킹처럼 해야 한다. 어떤 사람이 꼬드기더라도, 마네킹처럼 정승처럼 행동해야 한다.
반응을 보이지 않아야 한다. 말도 하지 않아야 한다. 특히 우리가 화를 내려는 찰나, 죄악의 선을 넘을 찰나, 우상을 숭배하게 될 찰나, 반드시 마네킹과 같아야 한다.
마네킹으로만 그치면 안 된다.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것을 해야 한다. 신앙생활을 하다 보면, 하나님께서 말씀하신다. '정욕을 쫓지 말라.', '내 뜻을 따르라', '삶으로 나를 드러내라'.
이런 하나님의 뜻을 따르려면, 우리가 해야 할 일이 있다. 하나님만을 바라보는 것이다. 하나님을 바라볼 때 하나님을 뜻을 따를 수 있기 때문이다.
"나의 영혼아 잠잠히 하나님만 바라라. 무릇 나의 소망이 그로부터 나오는도다(시 62:5)".
마네킹이 유리창 밖만 바라보고 있듯, 우리는 하나님만 바라보고 있어야 한다. 그러면 절대로 선을 넘을 일이 없다.
마네킹은 창문 밖으로 뛰어나가지 않는다. 우리도 하나님의 품 밖으로 뛰쳐나가면 안 된다. 내 영혼이 잠잠히 하나님만 바랄 때, 갈등의 선이 사라진다.
그리스도인이 선을 지키려면 새겨 둘 말이 있다. "너는 내 아들이다."
하나님의 아들은 하나님의 아들답게 행동하게 된다. 신분을 망각하면 망나니처럼 행동한다. 아들은 아버지의 얼굴에 먹칠하지 않아야 한다.
우리도 하나님의 얼굴에 먹칠하지 않아야 한다. 우리가 하나님께서 하신 "너는 내 아들이다"라는 말씀을 새겨 두면, 절대 선을 넘지 않게 될 것이다.
공기청정기가 되어라
하나님의 선을 넘지 않고, 그 선을 지키며 살아야 한다. 선을 지키며 살면 세상을 정화하는 사람이 된다. 그리스도인은 세상의 공기청정기와 같은 사람이기 때문이다.
세상은 황사와 미세먼지 등으로 숨쉬기 힘들다. 세상에 황사와 먼지가 가득하다면, 사람들에게는 죄악이 가득하다. 우상에 푹 빠져 살아간다. 불법의 앞잡이로 살아간다.
황사와 미세먼지 가득한 세상을 누가 바꿀 수 있는가? 오로지 그리스도인뿐이다. 황사와 미세 먼지 대책은 공기청정기다. 즉 그리스도인은 세상의 공기청정기가 돼야 한다. 세상의 공기청정기가 되어, 숨 쉴 수 있는 세상으로 만들어야 한다.
그러려면 행실도 공기청정기와 같아야 한다. 발락과 같은 행실이어서는 안 된다. 발람과 같이 탐욕을 추구해서도 안 된다. 예수님과 같이 십자가를 지는 삶을 살아야 한다.
그리스도인은 세상의 공기청정기다. 공기청정기가 되려면 갖출 것이 있다. 바로 '빛과 소금' 같은 사람이 되는 것이다. 나아가 빛의 열매를 맺는 사람이 되는 것이다.
에베소서 5장 9절에 이렇게 말씀한다. "빛의 열매처럼 모든 착함과 의로움과 진실함이다".
빛의 열매가 맺히는 순간, 이미 공기청정기와 같은 삶을 사는 것이다. 착함과 의로움과 진실함으로 사는 순간, 이미 세상의 탁한 공기가 정화되고 있는 것이다. 그럼 이미 세상에 빛과 소금의 역할을 하고 있다.
그리스도인들은 세상의 공기청정기이다. 미세먼지가 많아지면서, 집집마다 공기청정기가 놓여 있다. 마찬가지로 그리스도인은 세상 곳곳에서 공기청정기과 같은 삶, 빛과 소금의 삶을 살아내야 한다.
'옆'이 아니라 '위'를 바라봐야 한다
우리가 빛과 소금의 삶을 살려면, 하나님의 영역 안에서 살아가야 한다. 죄악의 선, 우상 숭배의 선, 탐욕의 선을 넘지 않아야 한다.
우리가 선을 넘지 않으려면 세상인 옆이 아니라, 하나님인 위를 바라봐야 한다.
언제나 그리스도인의 관심은 옆이 아니라 위다. 위를 보되, 짝퉁과 같은 것이 아니라 요즘 말로 '찐', 진짜 위를 봐야 한다.
잘못된 위를 바라본 종교가 있다. 바로 이슬람이다. 그 이유는 이슬람이 잘못된 신을 섬기기 때문이다. 그들은 하나님이 아니라, 알라를 섬긴다. 그러다 보니 인간 이하의 행동을 자행한다.
최근 중앙일보 기사(2019.04.09.)에 "21세기에 손목 자르고 돌로 쳐도 '신의 뜻'이라는 나라"라는 기사가 실렸다. 동남아시아 소국(小國) 브루나이에서 새로 시행하는 형법 때문이다.
간통을 행하면 숨질 때까지 돌을 던져 죽이는 투석 사형에 처한다. 절도범의 경우 초범은 오른 손목을, 재범은 왼쪽 발목을 절단한다. 미성년자도 이런 처벌에서 예외를 두지 않는다. 이는 잘못된 위를 바라보는 것이다. 21세기에 말도 되지 않는 행동을 하는 종교의 폭압이다.
뿐만 어니다. 최근 인도네시아 수마트라섬 반다 아체 이슬람 사원 뜰에서 다섯 커플이 공개적으로 회초리를 맞았다. 이들은 미혼 상태였는데, 공공장소에서 포옹하거나 성적 접촉을 했다는 이유로 각각 수개월 간 교도소에서 수감된 뒤, 4대에서 22대씩 태형을 맞았다. 또 나이지리아에서 이슬람 극단주의자들은 기독교인을 불에 태워 죽이고 있다.
원시 시대도 아닌데, 어떻게 사람을 불에 태워 죽일 수 있는가? 종교의 탈을 쓴 악마다. 이런 종교는 하나님을 두려워하지 않는, 즉 위를 보지 않는 종교다. 인격적인 하나님을 믿는 종교라면 이런 행위는 일어날 수 없다.
시대에 맞지 않는 종교의 신은 진짜 신이 아니라, 짝퉁 신이라고밖에 말할 수 없다.
하나님과 동행을 경험하라
하나님의 종교는 어떤가? 하나님은 하나님의 사람에게 기적으로 일하신다.
사실 인간에게는 숨을 쉬는 것 자체가 기적이다. 하나님은 숨 쉬는 기적 이상을 행하신다. 마치 다니엘에게 보여주셨던 것처럼, 사자굴에서 살아날 수 있는 기적을 일으키신다.
위에 계신 하나님을 바라보았더니, 박해 가운데 놀라운 성장을 이루고 있다. 바로 이슬람의 상징 국가 중 하나인 이란이다.
이란에서는 박해가 증가하는데도, 반대로 폭발적인 성장을 이루고 있다. 이란은 현재 전 세계에서 기독교 인구가 가장 빨리 성장하고 있는 국가이다.
1979년 이란 기독교인들은 대략 500명으로 알려졌으나, 현재는 50만 명으로 증가했다. 지하교인의 수는 약 100만 명으로 추정된다.
미국오픈도어즈는 "박해의 강도가 강화되고 더욱 늘어나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교회는 계속 성장하고 있다. 왜냐하면 사람들은 박해 앞에서도 그들의 신앙을 포기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에게 신앙은 논리적인 논쟁이 아니"라고 전했다.
그들 중 한 목사의 고백이 다음과 같다. "난 예수님이 필요하다. 예수님이 없으면, 생명도 희망도 없다. 예수님 없이는 단 한 순간도 살 수 없다. 우리들 중 누구도 살 수 없다."
신앙생활이란 선을 넘지 않는 것이다. 악을 향한 선은 넘지 않아야 한다. 하지만 믿음의 선은 넘어야 한다.
오늘 하나님은 소극적으로 세상을 향해 선을 넘지 말라고 하신다. 적극적으로 믿음의 선을 넘으라고 하신다. 그 기준선은 하나님의 말씀이다.
김도인 목사/아트설교연구원 대표(https://cafe.naver.com/judam11)
저서로는 《설교는 인문학이다/두란노》, 《설교는 글쓰기다(개정 증보)/CLC》, 《설교를 통해 배운다/CLC》, 《아침에 열기 저녁에 닫기/좋은땅》, 《아침의 숙제가 저녁에는 축제로/좋은땅》, 《출근길, 그 말씀(공저)/CLC》 등이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