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KBS의 사회주의 공론화
대한민국 한국방송공사(KBS)는 2020년 1월 11일 밤 8시 사회주의가 반기독교적이지 않다는 요지의 방송을 한 시간 동안 내보냈다. '교회 정치, 광장에 갇히다'는 제목의 <시사기획 창> 프로그램이었다.
광화문 이승만 광장에서 외치는 전광훈 목사와 기독교인들의 대통령 문재인 하야 목소리를 기독교 보수층의 잘못된 이념에 기인한 극단적 활동으로 해석했다. 왜곡된 사상으로 무장한 이상한 사람들이 모여 기이한 행동을 하는 것처럼 보도했다.
KBS는 이 방송에서 사회주의에 대한 기독교인들의 혐오와 반대가 기독교적이지 않은 것처럼 보도했다. 좌파 성향을 가진 교회사 교수들과 기독교 사회 운동가들을 동원하여 반공주의와 이승만 광장의 보수 기독교인 집회를 규탄했다. 칼 마르크스의 사회주의 사상과 역사적 유물론에 호의적인 뉘앙스를 보였다.
교묘한 편집으로 사실을 호도하기도 했다. 서울신학대학교의 박모 교수가 한때 기독교 진보계 인사들이 "한국교회는 반공을 회개해야 한다"고 한 말을, KBS는 마치 박 교수 자신이 그렇게 말한 것처럼 이해되도록 했다. 중요한 것은 KBS가 현 정부의 기호에 맞추어 사회주의를 본격적으로 공론화한 사실이다.
사회주의에는 여러 가지 유형들이 있다. 모든 유형의 사회주의는 마르크스주의, 곧 혁명적 사회주의와 맞닿아 있다. 사회주의자 엥겔스는 부르주아 계급이 도구로 장악하고 있는 국가는 사멸해야 하고, 부르주아 계급 인사들이 노동자들을 통치할 목적으로 사용하는 도구인 국가의 법도 사멸시켜야 한다고 했다.
2. 사회주의자 법무부 장관
대통령 문재인은 사회주의자를 법무부 장관으로 임명하여 사회갈등을 극대화했다. 조국 씨는 자타가 인정하는 사회주의자이다. 1990년대 성행하던 '남한 사회주의 노동자동맹(사노맹)' 활동을 했다. 법무부 장관 후보 청문회에서 그는 자신이 사노맹 활동을 한 것을 부끄럽게 생각하지 않으며, 사회주의자라고 밝혔다. 사상적 전향 의사가 없음을 밝힌 것이다.
조국의 사회주의는 마르크스주의를 핵심 이데올로기로 삼는 혁명적 사회주의, 곧 공산주의이다. 조국이 공산주의자인 사실은 그의 사노맹 활동만이 아니라 그의 석사학위 논문과 법학지에 기고한 글에 분명히 나타난다.
조국이 서울대학교 대학원에 제출한 석사학위 논문(1989)은 '소비에트 사회주의 법- 형법이론의 형성과 전개에 관한 연구: 1917-1938'이다. 표절의혹에 휘말려 학교 당국 조사를 받고 있는 것으로 알려진 논문이다.
조국의 논지는 소비에트식 사회주의 법을 대한민국에 실현하여, 자유민주주의와 자본주의의 병폐에 맞서는 새로운 대안 법을 만들어 대체해야 한다는 것이다. 논문은 전시공산주의 단계, 신경제정책 단계, 대전환 개시, 사회주의 승리와 대숙청, 마르크수주의 법이론의 재전환에 대한 논의로 이어진다.
조국은 서론에서 자신의 사회주의 이해를 밝힌다. 형법에서 죄형법정주의, 재판청구 보장, 일사부재리 원칙, 소급입법 금지 원칙 등이 우리 사회에서 어떤 의미를 가지면 어떤 모습으로 실현되고 있는가 하고 질문을 던진다.
이 원칙들을 부르주아 자유주의의 형법이론이라고 하면서, 이러한 문제를 해결하는 사회주의 형태의 새로운 법학의 필요성을 제기한다. 혁명적 사회주의 법학이 필요하다는 것이다.
자유민주주의 법이 가진 모순적인 형법의 대체를, 마르크스주의적 사회주의 법을 통해 실현하려 한다. 사회주의 법학을 도구로 삼아 우리 사회를 개혁한다는 것이다.
그리고 자본주의 법을 사회주의 법으로 대치해야 한다고 결론짓는다. 사회구조의 총체적 변화를 위해, 새로운 법학 방법론이 대두돼야 한다고 한다. 조국은 이처럼 대한민국 현실의 모순 해결을 소비에트의 혁명적 사회주의-공산주의에서 찾는다.
"우리의 생각은 우리의 눈을 우리 사회와는 근본적으로 상이한 구조를 갖는 사회주의 사회의 법, 형법 현실로 향하게 되었다. 우리의 연구에서 밝혔듯이 혁명 후 프롤레타리아는 차르 체제의 법, 사법기관을 철저히 폐지하고 그것과의 단절 위에서 새로운 법체제과 사법기관을 창설하였다.
이 과정에서 당시 프롤레타리아의 진로를 막았던 것은 법에 대한 경제주의적, 허무주의적 태도 및 마르크스주의 법이론의 관념화였고, 이러한 편향과의 투쟁은 혁명초기의 프롤레타리아의 중요한 임무였다.
혁명 후 격동 속에서도 이러한 노력이 계속되었음을 알 수 있다. 대숙청을 통하여 그 이전까지의 노력은 원점으로 돌아갔으나, 스탈린 비판 이후 다시 개화하게 되어 현재에 이르게 되었다.
이제 우리는 다시 원래의 출발점에 다시 서게 된다. 우리 사회에서는 진정 법과 합법성이 승리하고 있는가, 아니면 쇠퇴하고 있는가? 상술한 형법적 제 원칙은 진정 계속 발전되고 있는가, 아니면 많은 특별형법과 실무에서 퇴락되고 있는가? 라는 질문을 던지게 된다. 현재로서 우리의 대답은 부정적이다."
조국은 1993년 법학지 <민주법학>에 기고한 논문에서도 마르크스주의 법 이론이 한국 사회의 모순을 타개할 대안이라고 주장한다.
"이상의 작업에 기초하고 또 이에 병행하여 마르크스주의 법 이론은 한국 사회의 법현실에 대한 구체적인 분석 작업으로 나아가야 한다.
마르크스주의 법 일반 이론에 대한 탐구 못지않게 중요한 것이, 바로 우리 사회의 구체적 법 현실에 대한 천착이다. 구체로의 상승이 이루어질 때만 추상도 더욱 발전하는 것이다. 레닌의 말대로 '구체적인 것에 대한 구체적 분석'이야말로 마르크스주의의 혼이 아니던가?
그리고 이 작업은 단지 법학자들 사이의 폐쇄적 이론적 담화만으로 이루어져서는 안 된다. 한국 사회의 법 현실을 과학적으로 분석하고, 그 현실을 타개하는 올바른 계획과 방법을 잡아 나아가기 위해, 마르크스주의 법 이론은 그 본성상 현실의 진보 운동과의 교통이 필수적이며, 또한 진보 운동과 결합하여 그 한 부분이 되지 않을 수 없는 것이다(조국, '현 단계 맑스주의 법이론의 반성과 전진을 위한 시론', <민주법학>, 제6호, 1993)".
조국은 석사학위 논문(1989)과 <민주법학> 위 글(1993)에서 혁명적 사회주의 정치를 실현하려는 자신의 의지를 명확하게 밝힌다.
조국이 법무부 장관으로서 추진한 검찰 개혁은 사회주의 마르크스주의에 나타난 형법 정신의 실현이다. 청와대 민정수석으로, 법무부 장관으로, 민중민주주의 곧 혁명적 사회주의-공산주의를 실현하려는 실험정치를 하고 있었다. 마르크스주의를 도입하여 자본주의 시대의 형법을 개혁하고자 했다.
다수의 우파 국민들은 청와대를 사회주의의 요람으로 인식하고 있다. 조국은 주사파 계열인 민족해방주의(NL: National Liberty)보다 마르크스주의를 토대로 하는 민중민주주의(PD: People's Democracy) 계열의 인물이다.
청와대는 공산주의자들 곧 주사파계 민족해방주의(NL)와 마르크스주의를 토대로 하는 민중민주주의(PD)의 힘겨루기가 한창인 듯하다.
사람의 사상은 변하기도 하지만, 조국은 변함이 없다. 초지일관 사회주의-공산주의를 지지한다. 대한민국이 "마르크스주의 이름 하에 행해진 기왕의 이론과 실천을 면밀히 검토 비판해야 한다. 이 때 유의할 것은 이 작업이 단지 마르크스주의 청산과 해체를 위해서가 아니라, 자유주의의 한계를 직시하고 민중적 입장에 선 민주주의를 더욱 확고히 하면서 새로운 자본주의 극복 전망을 창출하기 위한 것이어야 한다는 점이다(조국, '현단계 맑스주의 법이론의 반성과 전진을 위한 시론')"라고 한다. 이 주장은 석사학위 논문 논지와 정확히 일치한다.
3. 사회주의와 공산주의의 차이
대통령 문재인은 '빨갱이'인가? 우리 사회의 일각에서는 사회주의자를 법무부 장관으로 임명한 대통령 문재인을 공산주의자로 보고 있다. 다른 한편에서는 이를 몰상식한 판단, 성급한 추측이라고 비난한다. 당사자는 옳다 그르다고 답하지 않는다.
공산주의자들을 추앙하고 조국을 법무부 장관에 임명하는 등의 여러 가지 사건들은 문재인이 대한민국을 뒤집어 엎어 공산주의 사회를 만드는 꿈을 꾸고 있다고 단정하기에 부족함이 없어 보인다. 국방력과 한미 동맹을 약화시키는 외교적 행보가 그 같은 판단의 신빙성을 뒷받침한다.
사회주의와 공산주의는 궤를 같이한다. 맥락에 따라 동의어(同義語)로 사용된다. 사회주의와 공산주의 두 체제는 사유 재산의 제거와 재화(財貨)의 집단 소유 제도를 지향하는 점에서 차이가 거의 없다.
마르크스주의에 따르면, 사회주의는 공산주의로 넘어가는 과도기적 단계이다. 사회주의 사회는 국가 또는 정부가 사유 재산과 집단화 프로그램을 통제한다. 경제적 재화와 소유물이 인민들 사이에 평등하게 분배되는 것을 원칙으로 삼는다.
능력대로 일하고 필요에 따라 분배하는 이상 사회를 지향한다. 지난 1세기 동안의 역사는 사회주의가 인간의 본성을 간과한 나머지 국가의 부도와 하향 평준화 그리고 극빈국이라는 종착점에 도달함을 알려준다.
현대 경제체제는 자본주의, 사회주의, 공산주의로 구분된다. 자본주의는 모든 경제주체가 시장경제 원리에 따라 움직이는 것을 말한다.
시장은 보이지 않는 손이 통제한다. 사회주의는 부의 편중을 막을 목적으로 생산 수단을 개인이 아닌 사회가 소유한다. 공산주의는 사회주의에서 더 나아가 분배의 공평과 사유재산 부인, 공유재산제를 시행한다. 사회주의와 공산주의는 많은 경우 같은 말이다.
4. 기독교와 사회주의의 공존 가능성
사회주의와 기독교는 상극이다. 기독교가 사유재산 제도를 인정하기 때문이다.
성경은 재산의 개인 소유권을 인정한다. 재산의 개인 소유에 관한 어떤 형태의 공유제도를 인정하지 않으며, 사유재산제를 인간 삶의 경제적 기반으로 삼는다. "일하기 싫은 자는 먹지도 말라(살후 3:10)", "도둑질하지 말라(출 20:15)", "네 이웃의 집을 탐내지 말라(출 20:17)", "네 하나님 여호와를 기억하라. 그가 네게 재물 얻을 능을 주셨음이라(신 8:18)".
종교개혁 신학과 칼빈주의는 개인이 정당하게 얻은 것은 즐길 권리가 있는 반면, 인색하거나 낭비하는 것은 합당치 않다고 본다. 땀 흘려 일하고, 얻은 재물을 근검절약하여 저축하면 자본이 생겨난다.
남는 자본을 재투자하여 자본주의 시장 경제가 생겨난다. 보이지 않는 손길에 의해 움직이는 자유시장이 부강한 사회와 나라의 토대라는 것이다.
사회주의-공산주의는 기독교 신도가 많아지면, 사회주의-공산주의가 무너지고 만다고 생각한다. 그래서 기독교 박해에 전력한다. 사회주의-공산주의가 기독교를 적대시하는 가장 중요한 까닭은 기독교가 개인의 재산과 자본을 인정하기 때문이다. 자본주의의 발달에 프로테스탄트 정신과 윤리가 크게 영향을 미치기 때문이다.
원시 공산제(共産制)는 개인이 모든 재산, 토지, 천연자원, 생산시설을 소유하도록 국법으로 인정하고 보호한다. 소유자의 자유로운 관리와 처분에 맡긴다.
계약 자유의 원칙과 더불어 발달한 사유재산 제도는 자본주의 문명의 원동력이다. 재산의 집중현상과 무산계급의 생존의 위협, 사회 이익이라는 이상에 어긋나자, 20세기에 이르러 국가는 생산수단, 천연자원의 개인 독점을 적당하게 제한하는 제도가 도입했다.
특수한 것만 국유 또는 국가관리 아래에 둔다. 그러나 공산주의 체제는 소비재를 제외한 모든 재화의 사유를 인정하지 않는다.
자본주의는 개인이 이윤을 얻도록 생산수단의 사적 소유와 자유경쟁을 보장한다. 사회주의는 생산수단의 사회적 소유와 사회적 관리의 수단에 의한 자유, 평등, 사회정의를 실현을 추구한다.
사회주의는 공산주의와 마찬가지로 생산수단 공공화, 중앙 집중적 계획 체제를 바탕 삼아 물건을 생산하도록 한다. 능력에 따라 일하고 실적-행위에 따라 분배하는 것을 목표로 삼는다.
공산주의는 능력에 따라 일하고 필요에 따라 분배한다는 이상적 원칙을 실현하려고 한다. 공산주의가 몰락한 것은 이러한 이상이 사실상 실현 불가능하기 때문이다.
첫째, 인간은 이기적 존재이다. 죄성을 지니고 있다. 자기에게 직접 이익이 없으면 생산 활동을 하려 하지 않는다. 둘째, 모든 사람의 필요를 만족시킬 만큼 생산하는 것이 현실적으로 불가능하다. 셋째, 재화를 공동 재산으로 여겨 개인이 필요한 만큼 사용하게 한다지만, 인민은 필요한 만큼의 생산을 하지 않으며, 따라서 개인이 필요한 만큼 가져가는 것이 사실상 불가능하다.
자본주의의 약점은 빈익빈 부익부 현상이다. 생산과 소비 과정에 나타나는 환경파괴와 오염, 그리고 물질만능주의도 있다.
인간에게 준 재물은 근본적으로 하나님의 것이다. 하나님은 우리에게 '청지기' 역할을 하도록 재화를 위탁했다. 자기 것이라고 마음대로 사용하거나 사치하거나 낭비함은 옳지 않다. 탐욕은 일만 악의 뿌리이다.
자본주의 경제제도의 최상의 가치와 덕목은 나눔이다. 유럽 국가들과 미국, 캐나다 등 자본주의 국가의 발전은 나눔과 기부로 이루어졌다.
공산주의 경제관은 기독교 경제관을 극단적으로 오해한다. 사회적 불평등 해소 방법으로 재산을 집단 체제가 소유한다. 전체 안에서 개인이 일부 사용권을 가질 수 있어 이상적으로 보이지만, 실제는 공권력이 재산을 소유하므로 공적 집단을 장악한 권력자들, 권력집단이 국가 전체의 재산을 마음대로 가지는 형태이다.
이러한 구조적 결함 때문에 공산주의 사회들은 부패한 사회로 전락했고, 그 나라들은 극빈국이 되었다.
5. 기독교 진보계의 친공 정치활동
한국의 진보계 기독교는 줄기차게 반기독교적 행보를 걸어왔다. 혁명적 사회주의 곧 공산주의와 맞닿아 있다. 민주화 운동과 연대하여 사회주의-공산주의 낭만화에 적극적인 활동을 해 왔다.
왜 KBS는 한국의 진보계 기독교 세력의 음험한 사회주의 행보를 지적하지 않는가? 보수계 기독교인들이 교회 정치를 광장에서 하고 있다고 비난하면서도, 한국기독교교회협의회(NCCK)가 줄기차게 펼쳐온 사회주의적 적화 정치 활동은 언급하지 않는다.
자본주의에 근거한 자유민주주의 사회보다 사회주의가 좀더 기독교적으로 보일 수 있다. 사회적 약자 중심의 정치로 평등과 분배를 강조하기 때문이다. 사회주의가 자본주의와 자유민주주의 정치와 경제제도가 가진 모순을 타파하는 기능을 일부 가지고 있는 것도 사실이다.
사회주의는 '빛 좋은 개살구(apricot)'이다. 자유민주주의 체제의 모순을 고치려다 국가를 부도내고 국민을 노예화 하는 '교각살우(矯角殺牛)'의 모순을 빚어낸다. 개인의 자유를 억압·통제·제한하고, 전제주의(totalitarianism)를 지향한다.
국가경쟁력 약화, 교육의 하향평준화, 거대 정부 형성, 국가의 지나친 간섭, 자유민주주의의 궤멸, 보이지 않는 손으로 돌아가는 자유무역 기능을 마비시키는 등의 결과를 가져온다. 몰락한 동유럽 국가들, 러시아, 베네수엘라 등이 이러한 사실을 보여준다.
월남한 기독교인들은 기독교 신앙과 공산주의가 공존할 수 없다는 사실을 체험했다. 기독교 신앙의 자유를 억압하는 중국은 어떤가? 리차드 범브란트 목사(1909-2001)는 루마니아 공산치하 감옥에서 8년 동안 잔혹한 고난을 받았다.
그가 저술한 <하나님의 지하운동>, <새장을 벗어난 새의 이야기>, <독방에서의 설교> 등은 사회주의 통치가 기독교를 얼마나 잔혹하게 박해하는가를 생생하게 증언한다.
정치 이데올로기는 변한다. 좌파와 우파가 대결하기도 한다. 그러나 대한민국은 다른 국가들과 전혀 다른 상황에 있다. 북녘의 사회주의 국가는 초지일관 적화통일이라는 목표를 줄기차게 유지하고 있다.
핵무기는 혁명적 사회주의 조선의 통일을 훨씬 앞당겼다. 대한민국은 기울어진 운동장이며, 고종처럼 굴종항복 외에 다른 선택이 없는 게 아닌가 싶다. 평양에서 자신을 '남녘 대통령'이라고 비하하여 칭한 문재인은 좌파 기독교인들을 제외한 약 1천만 명의 기독인들의 목숨을 사경으로 내몰고 있다.
사회주의 논쟁은 70년 전에 있었던 해프닝이 아니라, 현재진행형 사건이다. 문재인 대통령과 정부는 사회주의 낭만화 작업을 지속적으로 펼쳐 왔다.
대통령은 혁명적 사회주의자들을 존경한다고 공언했다. 한미 동맹을 불안하게 한다. 여러 가지 형태로 국방력을 약화시켰다. 자신이 사회주의자라고 당당히 밝힌 자를 대한민국 법무부 장관직에 임명했다.
평화는 힘으로 유지됨에도, 남북 평화가 대화로 유지된다는 궤변을 내뱉기도 했다. 가짜 평화를 진짜 평화로 오인하도록 사실을 호도해 왔다.
6. 사회주의를 버리라
대한민국 청와대를 지배하고 있는 이데올로기는 러시아와 유럽에서 폐기된 낡은 유물론적 이념으로 알려져 있다. 문재인은 혁명적 사회주의 곧 공산주의를 토대로 대한민국 국민을 대상으로 실험정치를 하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
마르크스주의와 기독교는 공존이 불가능하다. 기독교는 사회주의와 공산주의가 억제해야 하고 박해해야 하고 뭉개버려야 할 대상이다. 영원한 적이기 때문이다. 문재인 정부가 시행하려고 하는 차별금지법은 이러한 맥락에서 대두된 기독교 박멸 수단이다.
사회주의에 대한 낭만적 생각은 비극에 이르는 첩경이다. 독일의 야당인 사회민주당(SPD: Social Democratic Party)의 당수이며 독일 수상을 두 차례 역임한 슈뢰더(1944-)는 "독일의 미래를 위해 사회주의를 버리라"고 말했다.
슈뢰더는 괴팅겐대학교 법학과를 졸업하고 68학생혁명에도 참여한 좌파성향의 정치가이다. 변호사로 일하다 사회민주당 당수로 1990년에 니더작센주 주지사에 당선되었다. 주지사를 세 번 연임했고, 환경정당인 녹색당과 연합하여 적록연립정부를 구성하여 다수당의 위치를 차지했다.
슈뢰더는 강한 좌파 이미지 덕분에 1998년에 제7대 독일연방공화국 총리로 선출되었고, 재임에도 성공했다. 프랑스와 연대하여 미국의 이라크 전쟁을 반대하고, 경제를 살릴 조세를 개혁하고, 기업 중심의 사회주의 정책을 펼쳤다. 그러나 경제는 성장하지 못하고 실업률은 높았다.
슈뢰더는 두 차례에 걸쳐 수상을 역임하고 정계에서 은퇴했다. 왜 사회주의 정당을 이끌어 주지사와 총리를 두세 번씩 역임한 당수 슈뢰더가 사회주의를 버리라고 말할까? 사회주의를 대수롭게 않은 것으로 여기는 대한민국 국민들, 기독교인들이 경청해야 할 의미심장한 조언이다.
기독인은 자기의 사회와 국가에 대한 심대한 책임을 가지고 있다. 사회주의는 역사적으로 실패한 정치-경제 이데올로기이다. '빛 좋은 개살구' 사회주의를 대수롭지 않게 여기거나 낭만적으로 이해하다, 자멸하거나 노예 신분으로 전락할 수 있다. 기독교 신앙을 가질 수 없는 정치적 종착역에 도달할 수 있다.
아래의 BREADTV 동영상 '사회주의를 버리라: 정일권 박사와 최덕성 박사의 대담'은 위 질문에 답한다. 독일 총리 슈뢰더의 고언을 소개하면서, 사회주의를 비평적으로 논한다.
https://www.youtube.com/watch?v=6UaRZE-m-WU
최덕성 박사 (브니엘신학교 총장, 교의학 교수, 고신대학교 고려신학대학원 교수 1989-2009)