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대 로마의 정치가 겸 저술가인 마르쿠스 툴리우스 키케로(Marcus Tullius Cicero)가 이런 말을 했다.
"수사학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기술이 아니라 연설자다."
수사학에서는 연설자가 중요하다. 설교에서는 설교자가 중요하다. 즉 '설교자가 어떤 사람이냐? 어떤 마음을 가졌느냐? 어떤 생각을 하느냐?'에 따라 결정된다.
키케로는 그럭저럭한 연설가가 아니라 '이상적 연설가'를 이야기한다. 이상적인 연설가는 '후마니타스', 곧 보편적 교양을 가진 사람이라고 한다. 보편적 지식인이 바로 키케로가 말하는 이상적 연설가다.
설교자도 보편적 지식인이어야 한다. 보편적 지식에다 영적이어야 한다.
키케로는 이상적 연설가의 조건으로 3가지를 말한다. 그 중 한 가지가 연설을 효율적으로 '조절하는 능력'을 말한다. 그 말은 장소, 청중, 주제에 따라 말하기를 조절할 수 있는 능력이다. 다른 말로 청중 분석을 하며 나만의 이야기가 아닌, 상황에 맞는 이야기를 할 수 있어야 한다.
설교자도 마찬가지다. 설교자는 청중 분석을 할 수 있는 능력을 갖춰야 한다. 또한 상황에 맞게 설교할 수 있어야 한다.
연설에서 연설가가 중심에 있다면, 설교에서는 설교자가 중심에 있다. 설교자가 중심에 있으려면, 보편적인 지식을 갖춰야 한다. 보편적 지식을 갖추야 한다는 말은, 설교자가 한 주제로 설교할 수 있는 자질을 갖춰야 한다는 말이다. 문제는 설교자가 설교를 한 주제로 쓰기가 어렵다는 것이다.
한 주제로 글쓰기는 어렵다
필자가 설교에 대해 이야기할 때마다 하는 말이 있다. "설교는 어렵다"
예전 설교 세미나에 가면 똑같은 말들을 했다. "설교는 쉽다."
설교가 쉬운데, 청중들의 가장 큰 고민거리가 설교인가?
오늘도 한 성도와 통화 중 설교 이야기가 언급되었다. 그 성도가 말하길, 어떤 교회 설교자의 설교가 들려지지 않아, 딸의 고민이 심각하단다.
청중이 설교 때문에 심각하게 고민하는 이유는 무엇인가? 설교자가 설교를 심각하게 고민하지 않기 때문이다. 설교를 심각하게 고민하지 않으니, 한 주제로 글을 쓸 보편적인 지식을 갖추지 못한 것이다.
설교는 어렵다. 그 이유 중 하나는 하나의 주제로 글을 쓰는 것이 어렵기 때문이다. 한 주제로 글을 쓸 줄 알면, 설교자가 설교를 준비하는 것이 그리 어렵지 않다. 청중들도 심각하게 고민하지 않는다.
설교는 결코 쉽지 않다. 그럼에도 설교자는 한 주제로 설교할 줄 알아야 한다. 설교가 어렵다고 하는 것은 설교자가 자기 설교를 만들 보편적 지식이 없기 때문이다. 설교가 어려운 진짜 이유는, 하나의 주제로 설교를 쓸 수 없기 때문이다.
설교자들이 필자에게 자기 설교나 에세이, 저술한 책을 봐달라는 부탁을 종종 한다. 그때마다 벙어리 냉가슴을 앓는다. 어떤 말을 해주어야 하는가? 솔직하게 말해야 하는가?
솔직하게 말하면, 상처를 받을 것이다. 그렇다고 좋은 말만 하자니, 그 상태로 안주하면 안 되기 때문에 그럴 수 없다. 글을 봐 달라는 부탁을 받을 때마다, 이래저래 고민이 많다.
어쨌든 많은 설교자들이 한 주제로 글쓰기를 잘 하지 못한다. 한 주제로 글쓰기가 어렵다면, 들리는 설교 만들기는 요원하다 해도 과언이 아니다.
에세이는 A4 용지 1/2쪽에서 1쪽 정도 쓴다. 책일 경우 한 챕터당 A4 용지 약 2.5쪽 전후를 쓴다. 설교일 경우, 한 주제로 글쓰기가 더욱 더 어렵다. 설교는 A4 용지 5쪽 전후의 분량을 써야 하기 때문이다. A4 용지 5쪽을 쓰는 것은 글쓰기 훈련을 오래할 때에야 가능하다.
설교 글, 한 주제로 써야 한다
보편적 글쓰기 지식을 갖추지 않은 설교자들은, 한 가지 이야기가 아니라 두 가지 혹은 세 가지 이야기를 쓴다. 특히 단락마다 말의 연결이 잘 안 된다. 이런 이유로 필자는 한 주제로 글을 쓰지 못하는 설교자에게 '세 포인트' 설교를 하길 권한다.
설교자는 청중 배려에 능해야 한다. 청중 배려 중 제일 먼저 할 것은, 설교가 무엇을 말하고자 하는지 명확하게 알아듣도록 말하는 것이다. 즉 한 주제로 설교를 할 수 있어야 한다.
필자는 설교 글쓰기를 배우는 설교자들로부터 이런 질문을 자주 받는다. "어떻게 하면 한 주제로 설교를 할 수 있습니까?"
그 때마다 두 가지로 이야기해 준다. 하나는 설교 글쓰기를 배우라고 한다. 또 다른 하나는 글을 매일, 그리고 많이 쓰라고 한다.
설교 글쓰기를 배워야 한다. 글을 매일 그리고 많이 써야 한다. 세상에 불가능한 것은 거의 없다. 단 자신감 결여만 있을 뿐이다.
프랭클린 루즈벨트(Franklin Roosevelt) 대통령이 이런 말을 했다. "우리가 두려워 한 유일한 것은 두려움 자체다."
설교자는 설교 글쓰기를 할 때 두려움을 갖지 않아야 한다. 도리어 자신감을 가져야 한다. 자신감을 가져야 할 이유가 있다. 하나님은 설교자에게 두 가지 은사를 주셨기 때문이다.
하나는 설교할 수 있는 은사를 주셨다. 또 다른 하나는 성경을 가르칠 수 있는 은사를 주셨다. 즉 하나님께서 주신 은사를 두려움이 아니라, 자신감으로 활용코자 해야 한다.
자신을 시대에 맞추라
며칠 전 어떤 설교자로부터 아래와 같은 질문을 받았다. "저는 가능합니까?" "저도 설교 글쓰기를 할 수 있을까요?"
그 설교자의 말은, 자신이 청중에게 들리는 설교를 하지 못한다면 목회를 그만두어야 한다는 것이다. 그 설교자뿐 아니라 다른 설교자들도 설교 때문에 목회 지속 여부를 심각하게 고민한다.
설교 글을 쓰는 것은 영성의 문제가 아니라 지적인 문제다. 자신 스스로 설교를 만들 수 있는 보편적인 지식을 갖춰야 한다.
'한 달에 13번 월급 받는 남자'이자 국내 유일의 '관점 디자이너'인 박용후는 그의 책 《관점을 디자인하라》에서 다음과 같은 말을 한다. "보는 것과 아는 것은 다르다."
보는 것과 아는 것은 다르다. 아는 것과 만들 수 있는 것은 더 다르다. 설교자들은 어떤 설교가 좋은 설교인지를 잘 안다. 좋은 설교가 뭔지 안다고 설교를 잘 만드는 것은 다르다.
박용후는 보는 것과 아는 것을 구별하라고 한다. 지금 자신이 느끼는 '당연함을 부정하라'고 말한다. 그 이유는 '모든 것이 마땅히 그래야 한다'고 받아들인다면, 변화는 존재하지 않기 때문이란다.
세상이 엄청 변했다. 지금도 급변하고 있다. 변한 세상은 기존과 다른 관점을 갖고 있다. 그렇다면 설교자도 시대와 사람에 맞게 관점을 변화시켜야 한다.
하나님 말씀은 변하지 않는다. 하지만 설교는 시대에 맞게 변해야 한다. 이미 청중이 변했기 때문이다.
일제 시대는 그 시대에 맞게 설교해야 했다. 산업화 시대에는 산업화 시대에 맞게 설교해야 했다. 제4차 산업혁명 시대는 제4차 산업혁명 시대에 맞게 설교를 해야 한다.
시대가 바뀌었다는 것은 사람이 바뀌었다는 말이다. 사람이 바뀌니 시대가 변했다. 이미 청중은 확 바뀌었다. 청중은 과거에 들었던 설교가 아니라 지금 시대에 맞는 설교를 듣기 원한다.
문제는 청중이 원하는 설교가 바뀌었는데, 설교자들의 설교는 과거와 변화되었다고 받아들이기 어렵다. 그럼 청중은 스스로 '가나안 교인'을 자처한다. 그러므로 설교에 대한 설교자의 생각이 바뀌어야 한다.
세계 1위 기업 GM이 지금까지 존재할 수 있었던 것은 '끊임없는 혁신' 덕분이다. 즉 스스로 변했기 때문이다. 반면 서양 교회가 쇠퇴한 이유 중 하나는, 바뀌어야 하는데 바꾸지 않았기 때문이다.
한국교회도 진작 변했어야 했다. 설교도 변화했어야 했다. 하지만 설교는 여전히 변화되지 않고, 20세기 스타일에 머물러 있다. 여전히 예전 방식의 설교가 난무하고 있다.
삼성그룹의 이건희 회장이 "마누라 빼고 다 바꾸라"고 말했다. 설교자는 전에 신학교에서 배워서 하고 있는 것을 속히 바꿔야 한다. 2018년에 알고 있던 설교도 바꿔야 한다.
서울대학교 소비자학과 교수인 김난도가 쓴 《트렌드 코리아 2020》을 읽으면, 《트렌드 코리아 2019》와 얼마나 변했는가를 보고 놀라게 된다. 변화의 속도가 너무 빨라 두 눈을 의심하지 않을 수 없다.
설교자는 한 주제로 설교할 수 있어야 한다. 세 가지 주제의 설교를 한 주제의 설교로 바꿔야 한다. 이미 세상은 한 주제의 글로 도배되어 있다.
그렇다면 설교자들은 하나님의 말씀을 빼고서는 다 바꿔야 한다. 그럴 때 청중이 말씀의 꼴을 맛있게 먹고 행복한 신앙생활, 기대되는 사회생활을 할 수 있다.
김도인 목사/아트설교연구원 대표(https://cafe.naver.com/judam11)
저서로는 《설교는 인문학이다/두란노》, 《설교는 글쓰기다(개정 증보)/CLC》, 《설교를 통해 배운다/CLC》, 《아침에 열기 저녁에 닫기/좋은땅》, 《아침의 숙제가 저녁에는 축제로/좋은땅》, 《출근길, 그 말씀(공저)/CLC》 등이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