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야흐로 지식의 시대가 끝나가고 생각의 시대가 열리고 있다. ‘구글(google)’로 상징되는 인터넷 혁명은 정보와 지식을 어디서나 찾아볼 수 있게 만들었다. 문제는 단지 정보의 수집자 내지 수용자로 전락하느냐 아니면 그 정보와 지식으로 진실과 지혜를 만들어 내는 사람이 되느냐 하는 것이다.
‘생각의 시대’의 저자 김용규는 지식은 늘 새로 생겨나 자꾸 불어났지만, 몇 가지 생각의 도구들에 의해 반복 재생산되어 왔다고 말한다. 그리고 이 ‘생각의 도구’들을 찾아내 익히면 그동안 누적되어 온 지식들을 패턴별로 파악하는 능력을 가지게 될 것이라고 이야기한다. 그리고 그 생각의 도구들을 서양 문명을 만든 고대 그리스에서 발견한다.
기원전 8세기 이전의 그리스인들은 수학을 포함한 문명 전반에서 이집트에 한참 뒤떨어져 있었고, 건축과 천문학에서는 고대 바빌로니아인들에게도 뒤졌으며, 법률과 문학에서는 자신보다 1,200년 전 사람들인 수메르인들조차 따라가지 못했다. 그런데 무슨 영문에선지 기원전 8세기에 이르러 ‘생각의 도구’라고 부르는 방법들을 하나둘씩 개발해 부지런히 갈고 닦기 시작했다. 이 생각의 도구들은 당시 그리스인들에게 보편적이고 거시적이며 합리적인 사유능력을 제공했을 뿐만 아니라 인류의 보편문명으로 자리 잡아 오늘에까지 이르게 만들었다.
서양 문명은 호메로스로부터 시작되었다. 호메로스는 『일리아스』와 『오디세이아』를 통하여 사물들에는 공통성이, 사건들에는 원인과 결과가, 세상에는 어떤 법칙이 존재한다는 생각을 한 최초의 서양인이다. 김용규는 이런 생각을 ‘생각 이전의 생각’, ‘1차적인 생각의 도구’라고 말한다. 이어서 기원전 8세기 이후 그리스인들이 발견한 ‘2차적 생각의 도구’, ‘일상적의 생각의 도구’를 다섯 가지로 설명한다.
은유(메타포라, metaphora)는 우리의 사고와 언어, 학문과 예술을 구성하는 가장 원초적이고 근본적인 도구다. 은유 없이는 우리의 사고도, 언어도, 학문도, 예술도 불가능하다. 은유란 대상이 가진 본래의 관념으로는 전달할 수 없는 의미를 표현하기 위해 유사한 특성의 다른 사물이 가진 관념을 써서 표현하는 비유법이다. 은유는 내용을 ‘이미지화(imaging)’할 수 있게 만든다. 이미지는 말이나 글로는 표현할 수 없는 것까지도 상상하게 하고 이해시킨다.
원리(아르케, arche)란 우리가 그것을 통해 세계를 이해하고 구성하고 조종하거나 지배할 수 있게 하는 생각의 도구다. 또한 우리가 당면한 크고 작은 문제를 합리적으로 해결할 수 있게 하는 생각의 도구이기도 하다.
문장(로고스, logos)은 오늘날 보통 ‘이성’을 뜻하는 말로서 이해하지만 고대 그리스어에서 로고스는 문장을 뜻하는 용어였다. 문장은 시종일관 우리가 우리의 생각들을 논리적으로 전개하고 분석하고 검증할 수 있게끔 해준다. 은유는 창의력을 키울 수는 있지만 논리력을 향상시킬 수는 없다. 설득력의 핵심인 언어적 논리력은 오직 문장을 통해서만 획득할 수 있다.
수(數, 아리스모스, arithmos)는 원리와 마찬가지로 자연을 합리적인 패턴으로 드러나게 하여, 우리가 그것을 이해하고 조종하게 만든다. 고대 그리스인들에게 수는 ‘질서와 조화의 학문’이었다. 우리가 잘 아는 ‘철학(Philosophia)’이라는 말도 질서와 조화에 대한 사랑으로부터 출발했다.
수사(레토리케, rhetorike)의 목적은 ‘사람들을 설득하여 움직이는 것’이다. 수사학은 시기적으로나 내용적으로나 문학과 논리학의 중간에서 출발했다. 그리고 언제나 문학과 논리학 양쪽에 다리를 걸치고 있다. 그 한 다리가 문예적 수사이고 다른 한 다리는 논증적 수사다. 그 하나가 감동시키기에 주력하고 다른 하나가 확증하기에 매진한다. 인간의 마음은 감성과 이성, 두 개의 날개로 날아오르는 새이기 때문이다.
정보혁명의 시대에 사람들은 더 이상 생각하려 하지 않는다. 단지 욕망에 따라 지식을 편식하는 ‘지식 소비자’로 남을 뿐이다. ‘생각의 시대’는 지식이라는 원석을 지혜로 가공해 내는 방법을 담은 김용규의 필드노트(현장 기록노트, 관찰 기록노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