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번 주 박욱주 박사님의 '브리콜라주 인 더 무비'에서는 돌풍을 일으키고 있는 영화 <조커>에 대해 살펴봅니다. 호아킨 피닉스(조커), 재지 비츠(소피 두몬드), 로버트 드 니로(머레이 프랭클린), 프란시스 콘로이(페니 플렉), 브래트 컬렌(토마스 웨인) 등 배우들의 호연과 함께 토드 필립스 감독이 연출을 맡은 영화 <조커>는 '악마의 탄생'에 대해 다루고 있습니다. -편집자 주
절망과 죄성: 비극 속의 코미디, 조커
영화 <조커>의 서사는 주인공 아서 플렉(호아킨 피닉스 분)의 극단적 심경 변화를 기준으로 전반부와 후반부로 나뉘게 된다.
영화의 전반부는 아서의 고독과 절망이 임계점을 향해 가는 장면들을 보여준다. 그는 불량 소년들에게 구타와 강도질을 당하고, 공연 중 실수로 떨어뜨린 권총 때문에 해명 기회조차 얻지 못한 채 급작스럽게 해고를 당한다.
지하철에서는 세 취객에게 집단으로 놀림과 구타를 당하고, 애써 준비한 스탠딩 코미디는 방송을 통해 공개적인 조롱거리가 되었으며, 자신의 생부인줄 알았던 백만장자 토머스 웨인에게는 굴욕적인 박대를 당한다.
가장 결정적으로는 그의 삶에 희망과 의미를 부여해주는 기둥과 같았던 어머니 페니 플렉이 실은 그가 겪어온 모든 고난의 중요한 원인(학대로 인한 정신병과 거짓말로 인한 망상)을 제공했다는 것을 알게 된다.
바로 이 시점에 아서의 고독과 절망은 해소되지 못한 채 최고조에 이르게 된다. 그가 겪는 심적 고통에 동정과 위로를 보내줄 긍휼한 마음을 가진 이가 동료인 게리 외에는 단 하나도 존재하지 않는다는 사실은 그에게 극단의 고독감을 전달해 주고, 이러한 고독이 구제될 길이 없는 현실에 대해 아서는 절망하게 된다.
이처럼 고독과 절망이 극에 달한 시점의 아서는 더 이상 삶을 이전의 비참한 상태대로 유지할 수가 없었다. 삶이 너무도 고통스럽기에 그는 어떻게든 근본적인 차원의 변화를 일으켜야 했다.
처음 그가 생각한 변화의 방도는 두 가지였는데, 하나는 어머니 페니를 살해하는 것, 다음으로는 스스로 목숨을 끊는 것이었다. 그는 평생에 걸쳐 동경하던 생방송 코미디 무대에 출연해 모든 사람이 지켜보는 가운데, 화려하게 자신의 머리에 총을 쏘는 자살 퍼포먼스를 준비했다.
물론 아서는 그 전에 이미 지하철에서 세 취객을 총으로 살해했지만 이 살인은 우발적으로 행해졌던 반면, 어머니 페니에 대한 살해와 자살극은 미리 계획되었다는 점에서 이전의 살인과는 성격이 크게 달랐다.
게다가 생방송 중 자살 계획은 코미디 프로 진행자인 프랭크 머레이(로버트 드니로 분)를 총으로 살해하는 쪽으로 실행 방향이 변해버렸다.
아서의 심경 변화를 암울하고도 담담하게 나열한 영화 <조커>의 전반부는 사회, 타인, 그리고 인간 자신 때문에 초래된 고독과 절망이 한 사람을 어떻게 타락시키고 죄인의 길로 인도하는지 보여주는 서글프고 현실적인 인생극장이다.
이 추락 과정이 탁월한 연출과 충격적인 연기력을 통해 강한 감정적 호소력을 가진 서사로 소개되는 덕분에, 영화의 후반부를 이루는 아서의 폭주 장면이 짙은 카타르시스를 전달할 수 있게 된다.
이로써 아서가 어머니 페니를 살해하기 직전 내뱉은 대사가 현실화된다. "늘 내 삶이 비극이라고 생각했었는데, 이제야 알겠어. 사실 지독한 코미디였던 거야."
이처럼 <조커>는 불행하지만 선량한 청년 아서가 잔혹한 연쇄살인마 조커로 추락해 가는 과정을 매우 '개연적으로' 설명하고 있다는 점 때문에, 평단과 관객의 호평을 받고 있다.
그러나 기독교적 관점으로 볼 때, <조커>는 아쉽게도 이 개연성을 초월할 수 있는 인간의 의지를 무력한 것으로 그려내는 데 머물러 있다. 이로 인해 인간의 실존적 고독과 절망이 순전히 악을 위해 예비된 삶의 조건인 것처럼 잘못 소개하고 있다.
절망과 신앙: 비극 속의 초월, 단독자
인간의 도덕적 무력함, 그리고 사회의 야만적 냉혹함 속에서 자기 삶의 무게 하나조차 제대로 감당하지 못하고 고독과 절망에 짓눌린 인간 군상이라는 <조커>의 테제는 원래 현대 실존철학의 중심 물음을 이룬다.
구호로 전락해 버린 도덕률과 신앙, 허울만 갖춘 사회윤리에 대한 극한의 실망감 뒤에 인간에게 남는 선택지는 무엇일까?
영화 속 아서의 선택, 즉 극단적 도덕적 퇴락을 통한 해방의 추구는 현대 무신론과 허무주의의 거두라 할 수 있는 프리드리히 니체(Friedrich Nietzsche, 1844-1900)의 가르침을 상기시킨다.
그는 건강이 악화되고 광기가 심화되어 가던 시기(1880년대)에 자신의 철학을 완성시켰다. 이 시기 니체 사상의 요체는 그리스적 형이상학(특히 관념론에 경도된 형이상학)과 기독교 신학에 의해 정립된 서구의 '거짓되고 허무한' 도덕률로부터 완벽하게 해방되어 자신의 삶의 가치를 스스로 창조하는 가치의 권력을 획득하라는 것이었다.
살인마인 동시에 무정부적 혼돈의 아이콘이 되기로 결심한 조커의 모습은 <차라투스트라는 이렇게 말했다>에서 니체가 소개한, '권력에의 의지'를 용감하게 따르는 '초인(der Übermensch)'의 형상에 상당한 수준으로 부합한다.
이는 무신론자였던 니체, 그리고 신앙에 대해 알지 못했던 아서에게는 당연하고도 이상적인 행보로 여겨졌을 것이다.
기존에 사회에서 통용되던 도덕률과 가치가 자신의 삶을 보호해주는 대신 폭력적으로 억압해 온 것임을 깨닫게 될 때 당연히 택해야 하는 길은 분노의 표출과 복수의 실천을 통한 해방이다. 이러한 선택은 지당하고 개연적이다.
그러나 아서가 처해 있는 것과 같은 상황에서 인간이 선택해야 하고, 또 선택할 수 있는 다른 길이 있다고 가르친 사상가들도 존재한다.
전편의 논평에서 소개한 현대 실존철학의 선구자이자 기독교 문필가 쇠렌 키에르케고르(Søren Kierkegaard, 1813-1855)는 <죽음에 이르는 병>에서 극한의 고독과 절망이 '하나님 앞의 단독자'로 서기 위해 반드시 감내해야 하는 계기라고 가르친다.
키에르케고르의 단독자는 니체가 선포한 자존적 초인과는 완전히 다른 길을 따른다. 키에르케고르는 인간의 필연적 삶의 정황이자 본질을 이루는 죄성, 탐욕, 도덕적 무력함, 그리고 그에 대한 염세적 절망이 오히려 인간 스스로에 대한 오만한 희망이라는 근대 계몽주의의 허구적 낙관을 분쇄한다고 믿는다.
그리고 참으로 가치있는 삶, 고결한 삶은 오직 하나님 앞에서 세상과 자신의 죄성을 절박하게 수긍하는 한없이 비참한 절망의 체험으로부터 출발한다고 역설한다.
니체와 키에르케고르, 두 사람 모두 동일하게 인간 실존의 가장 어둡고 부정적인 지점을 들여다본다.
그렇지만 이 지점으로부터 인간이 행해야 할 일들에 대한 두 사람의 견해는 완전하게 다른 방향성을 갖는다. 그리고 이런 차이를 만드는 결정적 요인은 바로 신에 대한, 하나님에 대한 신앙이다.
키에르케고르는 죄성이 편재하는 세상을 향해 분노와 복수심을 표출하는 우회적 방편을 올바른 대응법으로 여기지 않는다.
그는 세상과 자신 안에 도사리고 있는 죄성이 삶을 옥죌 때 오히려 그 절망 자체를 처절하리만치 수긍하고 직시함으로써, 삶의 유한성을 온전히 깨닫는 동시에 그 유한성 체험을 통해 계시되는 하나님의 초월적 숭고함과 거룩함에 대한 경외를 일깨울 것을 촉구한다.
이는 신앙 없는 무신론의 입장에서는 허구적이고 불가능해 보이는 선택지이지만, 신앙을 삶의 제일 원리로 삼는 기독교의 입장에서는 지당하면서도 가장 개연적인 선택지가 된다.
영화 <조커>는 주인공 아서 플렉에게 니체적 초월의 길을 알려준다. 그렇지만 그 길은 종래에는 타인만 아니라 자기 자신마저 추락시키는 파괴적인 삶의 궤적으로 귀결된다.
이런 결말에도 분명 현실성은 존재한다. 그렇지만 이는 무신론적인, 신앙 없는 이들의 현실에 적용되는 것이다.
절박한 겸비의 신앙은 고독과 절망의 극점에서 가장 밝게 빛난다. 그럴듯한 타락의 길, 죄악의 길을 넘어서는 고결함을 따를 수 있는 의지의 힘을 제공하기 때문이다.
죄악과 고독, 절망으로 어그러진 삶의 극한 나락에 이르러 비로소 참된 신앙과 선 의지를 따르게 되는 사례는 무수한 믿음의 선진들의 삶에서 실증적으로 확인된다.
그러므로 기독교적 인간 이해의 관점으로 판단할 때, 아서의 타락은 결코 필연적인 것이 아니다.
<조커>는 한 빌런의 탄생을 정당화하기 위해 아서의 타락을 필연에 가까운 개연으로 규정하지만, 영화 바깥 삶의 현실은 오히려 그 상황에서도 선 의지 발현이 가능함을 입증한다.
특히 신앙은 이 가능성을 극대화시켜주는 초월적이고 강력한 힘을 선사한다.
박욱주 박사(연세대 연합신학대학원 겸임교수)
연세대학교에서 신학을 전공했으며, 동 대학원에서 조직신학 석사 학위(Th.M.)와 종교철학 박사 학위(Ph.D.)를, 침례신학대학교에서 목회신학 박사(교회사) 학위(Th.D.)를 받았다. 현재 서울에서 목회자로 섬기는 가운데 연세대 연합신학대학원 겸임교수로 재직하고 있으며, 기독교와 문화의 관계를 신학사 및 철학사의 맥락 안에서 조명하는 강의를 하는 중이다.
필자는 오늘날 포스트모던 문화가 일상이 된 현실에서 교회가 보존해온 복음의 역사적 유산들을 현실적 삶의 경험 속에서 현상학과 해석학의 관점으로 재평가하고, 이로부터 적실한 기독교적 존재 이해를 획득하려는 연구에 전념하고 있다. 최근 집필한 논문으로는 '종교경험의 가능근거인 표상을 향한 정향성(Conversio ad Phantasma) 연구', '상상력, 다의성, 그리스도교 신앙', '선험적 상상력과 그리스도교 신앙', '그리스도교적 삶의 경험과 케리그마에 대한 후설-하이데거의 현상학적 이해방법' 등이 있다.
브리콜라주 인 더 무비(Bricolage in the Movie)란
브리콜라주(bricolage)란 프랑스어로 '여러가지 일에 손대기'라는 의미를 갖고 있다. 이 용어는 특정한 예술기법을 가리키는 용어로 자주 사용된다.
브리콜라주 기법의 쉬운 예를 들어보자. 내가 중·고등학교에 다니던 학창시절에는 두꺼운 골판지로 필통을 직접 만든 뒤, 그 위에 각자의 관심사를 이루는 온갖 조각 사진들(날렵한 스포츠카, 미인 여배우, 스타 스포츠 선수 등)을 덧붙여 사용하는 유행이 있었다. 1990년대에 학창시절을 보냈다면 쉽게 공감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