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감의 시대다 

사람이 가장 갖기 어려운 중 하나가 '공감력'이라 생각된다. 사람은 자기 입장에서 생각하고 행동하는 것이 보편적이기 때문이다.

얼마 전 친구가 필자의 행동에 대해 비판을 한 적이 있다. 필자의 마음과 형편은 고려하지 않고 한 비판이었다.

친구 자신의 입장과 필자의 상황은 달라도 너무 다르다. 하지만 그 친구는 오직 자기 입장에서 비판을 했다. 그러면 따라오는 것이 아픔이다.

필자는 친구에게 비판받을 행동을 하지 않았다고 생각한다. 그 이유는 공감하지 않은 상태에서 한 행동이기 때문이다.

자기 입장에서 생각하면, 모두 비판 대상이 된다. 그래서 예수님은 비판하지 말라고 하셨던 것 같다. 잣대가 각자가 다르니, 비판이 꼬리에 꼬리를 물게 되기 때문이다.

비판을 하는 것은 그 사람이 좋고 나쁨의 문제가 아니라, 공감력의 문제다. 지금은 '다름'이 중요한 화두다. 공감력이 작동해야 된다는 말이다. 공감력이 작동되지 않으면, '다름'은 무조건 비판의 대상이 된다.

진리가 아닌 것에는 공감으로 다가가야 한다. 공감, 누구나 하고 싶지만 누구나 하지 못한다. 공감력은 높은 차원의 삶의 방식이기 때문이다.

지금은 말을 할 때나 행동을 할 때, 자기 입장이 아니라 상대방의 입장과 상황을 먼저 헤아려야 한다.

지금 한국 사회는 보수와 진보로 첨예하게 대립하고 있다. 보수가 진보를 대하는 것과, 진보가 보수를 대하는 것에, 공감은 찾아볼 수 없다. 보수와 진보는 대립할 뿐이다.

우리는 한 민족이다. 그러나 작금의 상태를 보면 원수와 다를 바 없다. 이는 공감의 시대에 공감을 발휘하지 않기 때문이다.

경제학자인 제러미 리프킨(Jeremy Rifkin)은 "21세기는 공감의 시대"라고 했다. 공감의 시대인데, 공감력이 발휘되지 못하고 있다. 도리어 헐뜯기가 절정에 이르고 있다.

지금 대립각을 세우는 보수와 진보의 가치관보다 더 중요한 것은, 공감력으로 서로를 이해하고자 하는 것이다. 그럴 때 공감의 시대인 21세기의 시민으로 살아갈 수 있다.

공감력은 일체화로부터 시작된다

강신장과 황인원은 그의 책 《감성의 끝에 서라》에서 새로움을 보는 법 네 가지를 제시한다.

첫째, 당신의 눈을 잘 쓰는 법으로 '간절함의 눈을 떠라'
둘째, '일체화를 하라'
셋째, '사물의 마음을 보라'
넷째, 사색하고 관찰하고 질문하면 통찰이 생긴다는 의미인 '사관질통' 하라

다른 것도 공감력을 갖게 한다. 설교자는 '일체화를 하라'를 통해 공감력을 키우면 좋다고 생각한다.

저자는 시인 장석주 시인이 시 '대추 한 알'을 쓸 수 있었던 비결을 '일체화'라고 말한다. 장석주 시인은 대추 속에서 태풍을 보고 있다. 대추 속에서 초승달을 보고 있다. 이렇게 볼 수 있었던 비결은 바로 '일체화'였다.

장석주 시인의 시인 '대추 한 알'을 보자.

저게 저절로 붉어질 리는 없다
저 안에 태풍 몇 개
저 안에 천둥 몇 개
저 안에 벼락 몇 개

저게 저 혼자 둥글어질 리는 없다
저 안에 무서리 내리는 몇 밤
저 안에 땡볕 두어 달
저 안에 초승달 몇 날이 들어서서
둥글게 만드는 것일게다

대추야
너는 세상과 통하였구나!

시인은 자신의 삶을 몽땅 대추 속으로 들고 들어갔다. 대추가 처해 있는 상황 속으로 들어갔다. 그럼 이제껏 보지 못했단 대추의 삶이 보였다. 시인과 대추가 일체화 되는 순간 대추에 대한 새로운 눈이 뜨였다.

마찬가지로 공감의 시대는 상대방 마음 속으로 들어가야 한다. 그럼 비판할 수 없다. 도리어 이해할 수 있다. 공감할 수 있다. 한 마음이 될 수 있다.

설교는 '역지사지'로부터 출발한다

공감의 시대다. 공감하는 사람이 이 시대에 잘 어울린다. 그럼, 공감이란 무엇인가? 가장 쉬운 말로 하면, 상대방의 입장에 서는 것이다.

필자는 공감력이 좋지 않다. 감성이 떨어진다. 그 결과 공감력 있는 글을 쓰기 위해 부단히 노력할 수밖에 없었다. 그렇다고 아직 잘 쓰지 못한다. 하지만 끊임없이 노력한다. 공감 능력이 중요함을 절감하기 때문이다.

공감력은 설교에서 더욱 더 중요함을 깨닫고 있다. 설교자는 하나님과 공감해야 한다. 교인과 공감해야 한다. 그러려면 먼저 자신의 설교와 공감해야 한다.

그럼 설교자들은 공감을 중요시하고 있는가? 그렇지 않은 것 같다.

제가 군대에서 가장 많이 들었던 말이 있다. "까라면 까지 무슨 말이 많아!"

제가 설교자들과 대화에서 자주 듣는 말이 있다. "하나님께서 선포하라고 하셨으니, 나는 할 일 다했다."

설교자들이 예로 드는 성경 구절이 아래와 같다. 하나는 디모데후서 4장 2절이다. "너는 말씀을 전파하라 때를 얻든지 못 얻든지 항상 힘쓰라 범사에 오래 참음과 가르침으로 경책하며 경계하며 권하라".

또 다른 하나는 고린도전서 3장 6-7절이다. "나는 심었고 아볼로는 물을 주었으되 오직 하나님께서 자라나게 하셨나니 그런즉 심는 이나 물주는 이는 아무 것도 아니로되 오직 자라게 하시는 이는 하나님뿐이니라".

설교나 전도에 대한 "말씀을 전파하라"는 말씀으로, 교인의 상황 이해나 공감의 필요성을 대치시킨다. 설교는 그저 선포일 뿐, 공감을 통한 설득이 아니라고 이야기한다.

그리고 고린도전서 3장 6절 말씀대로 "오직 하나님께서 자라게 하신다"면서, 설교자가 해야 될 역할을 축소시킨다. 그러나 고린도전서 3장 말씀은 시기와 분쟁에 대한 해결책을 위한 공동체의 한 지체라는 관점에서 제시된 말씀이다.

설교자들은 교인들과의 공감을 통해, 교인들이 공감할 수 있는 설교를 해야 할 책임이 있다. 이미 비즈니스를 하는 사람들은 '역지사지', 즉 상대방의 입장이 되어보려는 것을 기본으로 한다. 공감은 비즈니스나 설교 별반 다르지 않다. 아니 똑같다.

설교학 책을 보면, 시를 많이 읽으라고 한다. 특히, 데이비드 고든 (T. David Gordon) 교수는 그의 책 《우리 목사님은 왜 설교를 못할까》에서, 설교자들에게 시를 읽으라고 강력하게 말한다. 설교자가 시를 읽어야 하는 이유는, 교인의 입장이 되는 보는 것은 물론, 교인의 마음을 가져야 하기 때문이다.

앞서 언급한《감성의 끝에 서라》에서도, 시인들이 일체화를 하는 것은, "상대방의 입장이 되어보는 정도가 아니라 자신이 곧 '그것'이 되기 때문"이라고 말한다.

설교자는 설교를 준비할 때, 역지사지로부터 출발해야 한다. 나아가 교인과 말씀과 일체화, 즉 교인과 한 마음을 갖기 위해 몸부림쳐야 한다.

마음을 들여다보라

'윤치영 스피치아카데미'를 운영하는 윤치영은 그의 책 《아하! 스피치》에서, 공감 형성이 이루어지는 스피치를 세 가지로 설명한다.

첫째, 청중은 그 내용이 자신들의 삶에 필요하거나 중요한 것임을 인식하게 되면 공감한다.

둘째, 목적을 제시한다(one point, 즉 하나로 제시한다): 뚜렷한 목적이 담겨 있을 때 청중은 마음이 끌린다. 목적을 거울을 보듯 선명하게 부각시켜야 한다.

셋째, 접촉점을 만들어라. 현대인의 심리상태 등으로 접촉점을 형성하게 할 수 있다.

윤치영의 말도 일리가 있다. 이보다는 설교자가 마음을 잘 읽어내야 한다. 하나님의 마음, 성경 등장인물의 마음, 교인의 마음을 잘 읽어내야 한다.

설교자들의 설교는 '팩트'를 말하는 것이 주를 이룬다. 반면 '마음'을 읽어내는 것은 보기가 힘들다. 이는 팩트를 해석하고 설명하는 것이 쉽기 때문이다. 하지만 마음을 읽어내는 것은 어렵다.

설교자는 설교에 마음을 담아야 한다. 하나님의 마음을 담아야 한다. 성경 등장인물의 마음을 담아야 한다. 교인들을 헤아린 마음을 담아야 한다. 할 수만 있다면 하나님과 교인의 마음이 하나 됨을 느낄 수 있게 해야 한다.

공감 있는 설교 글, 어떻게 쓸 것인가?

공감 있는 글쓰기에 대한 두 가지 예를 들고자 한다. 하나는 하나님의 마음이다. 또 다른 하나는 등장인물의 마음 읽기다.

먼저, 하나님의 마음이다. 여호수아 4장 19절에서 24절에서 드러나는 '하나님의 마음'을 보자.

하나님은 여호수아와 이스라엘 사람들의 한 행동에 대해 감격하셨다. 그들은 자신들의 편안함을 추구할 수 있었다. 하지만 하나님을 먼저 기념한다. 그러니 고맙다. 눈물겹게 고맙다. 더 사랑해 주고 싶다. 필요한 것을 찾아서라도 도와주고 싶다.

하나님은 주고 싶은 것 있으면 다 주고 싶은 마음이다. 그 이유는 여호수아와 이스라엘 사람들이 하나님을 향한 초첨 맞추기를 끝까지 했기 때문이다. 그 행위가 기념비를 세우는 것이었다. 그리고 후손에게까지 이어지는 것이었다.

이런 마음을 갖는 것은 쉽지 않다. 말로는 할 수 있다. 하지만 행동으로 옮기는 것은 어렵다. 이런 모습을 보니 하나님께서도 해바라기가 되고 싶은 마음이다.

오늘 여호수아와 이스라엘 사람들은 하나님께서 하신 일들을 다시 생각한다. 잊고 싶지 않기 때문이다. 자신들만 하나님의 복을 받으려 하지 않는다. 하나님의 복이 끝까지 내려가길 바란다. 이런 모습에 하나님은 끝까지 함께 하고자 하신다.

하나님은 여호수아와 이스라엘 사람들에게 눈맞춤을 하신다. 아이들은 부모와 눈맞춤을 원한다. 하나님께서도 이스라엘로부터 눈을 떼지 못하신다. 고개만 돌리면 눈맞춤을 안할 수 있다. 하나님은 고개를 돌릴 수 없으시다. 영원히 바라보고 싶을 뿐이다.

하나님은 여호수아와 이스라엘 사람들이 눈 맞춤을 잃지 않았음을 아셨다. 하나님도 이 시간에 한 가지 다짐하신다. 끝까지 이스라엘 백성의 편에 서시겠다는 것이다.

김도인 목사.
김도인 목사.

다음으로, 등장인물의 마음이다. 같은 본문인 여호수아 4장 19절에서 24절에서 드러나는 '여호수아의 마음'이다.

여호수아는 하나님을 다시 한 번 생각한다. 피상적이지 않고 내면적이다. 하나님의 마음 안으로 깊숙이 들어간다. 여호수아는 하나님을 생각할 때마다 가슴이 눈물로 채워진다. 그 눈물은 감격의 눈물이다. 자신이 쓰임받았다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뜻이 이루어진 것에 대한 감격의 눈물이다.

사람이라면 자신이 한 일을 내세우고 싶어진다. 그리고 누군가로부터 수고했다는 말을 듣고 싶어진다. 그러나 여호수아는 정반대였다. 하나님을 위해 할 일이 또 없을까를 찾았다.

하나님을 위해 할 일을 생각하니, 여호수아는 가슴이 뜨겁다 못해 불타오른다. 신앙생활에서 첫 사랑이 중요하다고 말한다. 여호수아는 예외다. 언제나 불타올랐기 때문이다.

여호수아는 하나님의 말씀이 이루어지는 것을 목격했다. 이젠 그 후손들까지 그 목격의 내용이 흘러들길 바란다. 이런 꿈을 꾸고 있다. 자신에게 역사하신 하나님께서 하신 일을 후손들도 맛볼 것을 꿈꾼다.

김도인 목사/아트설교연구원 대표(https://cafe.naver.com/judam11)
저서로는 《설교는 인문학이다/두란노》, 《설교는 글쓰기다(개정 증보)/CLC》, 《설교를 통해 배운다/CLC》, 《아침에 열기 저녁에 닫기/좋은땅》, 《아침의 숙제가 저녁에는 축제로/좋은땅》, 《출근길, 그 말씀(공저)/CLC》 등이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