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95년 8월 부임해 24년간 사역한 김춘기 목사가 지난달 마지막 주일을 끝으로 에덴스한인장로교회에서 은퇴했다. 처음이자 마지막 담임 목회였고, 부임할 당시 담임 전도사였기 때문에 목사 안수도 본 교회에서 받았다. 중간 중간 고비가 많았고 말 못할 가슴 앓이도 있었지만 하나님 앞에 엎드려지고 간구할 때 언제나 길을 열어주시고, 한결 같이 이끌어 주셨다.
은퇴를 앞두고 만난 김춘기 목사는 아쉬우면서도 홀가분한 얼굴이었다. 원래 지난 12월 은퇴 할 계획이었는데 당회의 요청으로 6개월 연장해, 후임 청빙과정을 진행하는 동안 멕시코 선교지에서 안식월을 가졌다. 선교지에서 하도 걸어서 얼굴이 타고 살도 빠졌다고 한다. 한 교회에서 1개월 뺀 24년 동안 70에서 1년 뺀 69세까지 목회하고 은퇴하는 소감은 어떨까?
김춘기 목사는 먼저 “하나님께 드린 서원이 있어 늦깍이 신학공부는 했지만 목회할 생각은 없었어요. 교수를 하고 싶었고 그 길을 향해 가고 있었는데, 아는 목사님의 급한 부탁으로 임시직이라고 생각하고 왔던 에덴스한인교회에서 은퇴까지 할거라고는 상상도 못했죠(웃음). 휴학계 내고 처음 올 때 공부를 중단할 수도 있겠구나 싶어 적잖은 마음의 갈등이 있었는데 와서 2년 정도 목회해보니 목회가 너무 재밌고, 영혼들을 향한 마음이 커져서 학교 그만두는건 오히려 쉬었습니다”라고 처음 에덴스에 발을 들여 놓은 시간을 회고했다.
이어 “돌아보면 3번에 걸친 큰 위기가 있었고, 교회를 떠날 수 있는 기회도 있었어요. 하지만 제 선택으로 온게 아니라 하나님께서 전적으로 옮겨 놓으셨다는 확신이 있었기 때문에 버티고 지킬 수 있었습니다. 제가 ‘혹시 다른 곳인가요’ 기도할 때 응답이 없으셨고, 다른 이들이 저를 떠나게 하려고 할 때도 그들의 일이 되지 않게 막으셨습니다. 돌아보니 하나님께서 저와 교회를 긍휼히 여기셨고, 지켜주셨고, 여기까지 인도해 주셨습니다”라고 덧붙였다.
캠퍼스 타운인 에덴스 지역에 대표적인 유학생 교회이기도 한 에덴스한인장로교회에 김춘기 목사를 부르신 것은 어쩌면 ‘의외의 한 수’였다. 찢어지는 가난에 초등학교만 겨우 졸업하고 시장 좌판 장사와 공장을 전전하며 재수, 삼수도 아닌 7전 8기로 중, 고등학교를 검정고시로 마쳤지만 여전히 공부에 대한 갈망과 아쉬움이 너무 커 만족이 안됐다고 한다. 모두가 이제 충분하다고 말릴 때 고집스럽게 학업에 전념해 만 26에 대학에 입학한 그다.
그 과정 가운데 교회에서 음악을 알게 되고 성가대 지휘까지 하면서 은혜를 경험했고, 18살에 목사가 되겠다고 서원한 것을 하나님께서는 잊지 않으셨다. 그래서 한참 신나게 공부하던 박사학위 과정 딱 중간에 부르셔서 '그 정도면 됐다. 이제 나의 일을 하라'고 방향을 꺽으신게 아닐까? 산전수전 다 겪고, 남들은 겪어보지 못한 공중전까지 겪은 그를 유학생이 다수인 이민교회에 데려다 놓으니 모난 사람, 둥근 사람 두루 두루 품을 수 있는 ‘잘 참고 마음이 따뜻한 목사’로 이 자리를 지켜올 수 있었다.
유학생 비율이 많은 교회의 특성상 여름방학이면 예배당이 휑 하고, 몇년 신앙생활 잘 하다 자기 앞길 찾아 떠나는 성도들을 보며 마음이 아릴 때도 있었지만, 선교사를 보낸다는 마음으로 교회는 늘 헌신적으로 섬겨왔다. 그렇게 배출된 에덴스교회 ‘동문’이 헤븐리터치 미니스트리 손기철 장로를 비롯해 다수의 목회자와 장로들, 이름도 빛도 없이 섬기는 수 많은 든든한 신앙의 용사들이다. 이들이 몇년 전, 교회가 모기지 문제로 예배당을 뺏길 수 있는 급박한 상황에서 전 세계 곳곳에서 연락해 왔고, 기도는 물론 크고 작은 헌금으로 어려움을 함께 극복해 나가는 저력을 보여줬다.
마지막 예배는 전 교인이 함께하는 감동과 은혜의 시간이었다. 김춘기 목사가 헌신적으로 섬겨온 시간을 감사하며 함께 해주신 하나님께 한 마음으로 영광을 돌렸고, 그가 앞으로 걷게 될 길을 축복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