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지는 故 한경직 목사님의 생전 설교 전문을, 한경직목사기념사업회 제공으로 매주 한 차례, [그 때 그 설교] 코너에서 소개합니다. 한 목사님은 얼마 전 한 설문조사에서 '가장 존경하는 목회자' 1위에 오르기도 했습니다. 고인의 생전 설교가 살아있는 하나님의 말씀으로 오늘날 한국교회에 생생히 울려퍼지길 바랍니다.
마태복음 11:25~30
마태복음 11장 28절, 여러분 잘 아시는 말씀을 한 번 더 읽습니다. "수고하고 무거운 짐 진 자들아 다 내게로 오라 내가 너희를 쉬게 하리라"
현대인의 생활 특징 가운데 하나는 아마 여행을 많이 하는 것인 듯합니다. 제가 자란 이북 농촌에는 그때에 서울 구경을 한 이가 하나도 없었습니다. 그때에는 출입한다는 이라야 그 촌에서 100리 밖에 안 되는 평양을 갔다 온 이들이 더러 있을 뿐이었습니다.
그러나 지금은 어떻습니까? 김포공항에 나가 보세요. 미국을 비롯해서 동남아, 중동지역, 구라파 등 온 세계를 향해서 나가는 손님들로 가득합니다. 그런데 여러분 주의하여 보셨습니까? 빈손으로 여행하는 이는 하나도 없습니다. 모두 짐을 많이 부치고, 그것도 부족하여 양손에 들고 비행기를 타는 모습을 우리는 매일 봅니다. 옛날부터 인간의 일생을 한 나그네로 본 이들이 많이 있는데 사실 그러합니다. '인생여로(人生旅路)'란 말과 같이 사실 인간의 일생이 한 나그네의 길입니다. 옛날에는 지게가 있어서 짐을 지고 다녔고, 또 오늘날 산에 올라가는 이도 보면 모두 배낭을 지고 올라가는 모양입니다. 오늘 '인간과 그 짐'에 대한 성경의 교훈을 잠깐 생각하고자 합니다.
첫째는, "각각 자기의 짐을 질지니라"
갈라디아서 6장 5절에 이렇게 가르칩니다. 각각 자기가 져야 할 짐이 있습니다. 이것을 '책임'이라는 말로도 표현합니다. 부모는 부모의 책임이 있습니다. 아기를 낳았으면 그 아기를 길러야 할 어머니의 책임이 있습니다.
오늘날 사회 문제 가운데 하나로 대두하는 것은 소위 기아(棄兒) 문제입니다. 어떤 어머니는 아기를 낳고도 자기가 기르지 아니하고 내다버립니다. 오늘날 고아원에는 이런 아기들이 적지 아니합니다. 부모는 부모의 짐 곧 책임을 질 줄 알아야 합니다. 바른 교육을 시키며 바로 기를 책임이 부모에게 있습니다. 비록 대학교에 가서 공부한다고 할지라도 그때에도 부모의 책임이 있다고 하는 것을 부모들은 기억해야 합니다.
그뿐만 아니라 물론 교사는 교사의 책임을 져야 합니다. 오늘날 소위 학원의 소요문제는 한마디로 교장과 교사의 책임이라는 것을 우리는 지적할 수밖에 없습니다. 그리고 회사에서는 사장은 사장의 책임, 근로자는 근로자의 책임이 있습니다. 좀더 넓게 우리나라를 생각할 때에 국민은 국민으로서의 책임을, 공무원은 공무원으로서의 책임을, 경찰은 경찰의 책임을, 군인은 군인의 책임을 잘 감당할 때에만 그 국가는 안정되고 경제와 문화가 발전될 것입니다.
그러므로 인간의 짐을 생각할 때에 우리는 먼저 남에게 전가할 수 없는 짐, 곧 책임의 짐이 있다는 것을 기억하고 그 짐을 잘 지도록 결심과 노력이 필요합니다. 그런데 어떤 이들은 이 책임의 짐을 소홀히 합니다. 이런 이들을 흔히 무책임한 사람, 혹은 책임감이 부족한 사람이라는 말로 표현합니다.
교회 안에서도 우리는 모두 자기가 마땅히 질 책임이 있습니다. 짐이 있습니다. 장로이면 장로의 짐, 집사이면 집사의 짐이 있습니다. 내가 교회 안에서 져야 할 짐을 어떻게 지는가, 때때로 반성하여 볼 필요가 있습니다. 우리 교우 모두가 내 가정에서, 내 직장에서, 내 교회에서, 내 나라에서 마땅히 질 짐을 어떻게 지는가, 반성하여 보아야 하는 것입니다.
요사이 공해라는 말을 우리가 자주 듣습니다. 물이 오염됩니다. 공기도 오염됩니다. 신문지상에서 보는 대로 어떤 공장에서는 정화시설을 해 놓고도 가동치 않는다는 말이 혹 들립니다. 제가 남한산성에 살고 있지만 오늘날 큰 문제 가운데 하나는 한국의 모든 유원지들이, 명산대천들이, 말하자면 쓰레기로 더러워지는 현상입니다. 한마디로 이러한 문제는 우리 국민들이 각각 자기가 질 짐을 지지 않는 데서 일어납니다.
성경은 분명히 가르칩니다. "각각 자기의 짐을 질지니라" 전가할 수 없는, 남에게 맡길 수 없는 내 짐이 누구에게나 있다고 하는 것을 깨닫고, 그것이 무엇인가 살펴서 나날의 생활을 할 때에 꼭 내가 질 책임을 내가 져야 합니다.
둘째는, "너희가 짐을 서로 지라 그리하여 그리스도의 법을 성취하라"
성경은 또한 갈라디아서 6장 2절에서 이렇게 가르칩니다. 서로 져야 할 짐이 또한 있습니다. 이것은 무슨 뜻입니까? 인간 사회에는 내 짐을 내 스스로 질 수 없는 이들이 적지 아니합니다.
가령 어린아기들이 자기 짐을 질 수 있습니까? 아기의 짐은 어머님과 부모들이 반드시 져야 합니다. 요사이 우리 사회에서 장애자라는 말이 많이 들립니다. 이 세상에는 장애자들이 적지 아니합니다. 가령 육체 장애자들, 시각 장애자, 눈먼 이들, 청각 장애자, 귀먼 이들, 척수 장애자, 걸을 수 없는 이들, 그밖에 여러 장애자들이 있으며, 더욱이 정신 장애자들, 정신병자들도 우리 사회에 적지 아니합니다.
이들은 자기들의 짐을 스스로 질 수가 없습니다. 누군가가 같이 짐을 져 주어야 살아갈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성경은 짐을 서로 지라고 둘째 번으로 우리에게 가르쳐 줍니다. 짐을 서로 지는 것이 그리스도의 법이라고 또한 지적합니다. 장애자뿐 아니라 우리 사회에는 스스로 짐을 질 수 없는 이들이 적지 아니합니다.
가령 부모 없는 고아들, 외로운 젊은 어머니들, 그리고 요사이 사회 문제로 대두하는 노인 문제도 역시 이 문제에 속하는 줄 압니다. 그러므로 교회는 전도와 교육에만 힘쓸 수 없고, 이러한 불행한 이들의 짐을 지는 데 솔선수범해야 합니다.
그러므로 본 교회에서도 일찍부터 보린원이니, 경로원이니, 모자원 등을 설립해서 이들의 짐을 같이 지려고 힘을 쓰며, 아마 머지않아서 장애자 센터도 실현될 줄로 믿고 있습니다. 또 짐을 서로 지기 위하여 매주 넷째 주일을 봉사주일로 지키며, 일시적으로 불행에 빠지는 교우들과 일반 사회를 도와 올리도록 힘을 쓰는 중에 있는 것입니다. 이것이 다 서로 짐을 져주기 위해서 하는 운동인데 여러분 깊이 생각하시기를 바랍니다. 여러분 아시는 대로 우리 교회 뜰에서 종종 헌혈 운동을 하는 것도 모두 짐을 서로 지라는 성경의 교훈을 받아 그리스도의 법을 성취하기 위한 것입니다.
사실 이 문제를 생각할 때에는 우리는 국내 문제만 생각할 수는 없습니다. 온 세계를 바로 볼 줄도 알아야 합니다. 세계 각국, 특별히 아프리카의 여러 나라에서는 지금 이 시간에도 굶주리는 이들이 수없이 많고, 또 자유를 찾아서 작은 배를 몰래 타고 바다로 탈출하는 소위 보트 피플(boat people)도 적지 아니한데, 듣는 대로 이들을 받는 나라가 별로 없다고 합니다. 일전에 신문을 통하여 한국에 온 보트 피플도 있다는 말을 들었으며 또 우리 정부가 이들을 받아 수용한다고 하니 실로 감사한 일입니다.
교회도 이런 일에 무관심할 수 없습니다. 우리 믿는 이들은 교회적으로, 국가적으로, 또는 세계적으로 이 서로 돕는 운동에, 짐을 서로 지는 운동에 솔선수범해서 그리스도의 법을 성취할 수 있기를 바랍니다. 우리 주님께서는 십자가 위에서 만민의 짐을 지신 분입니다.
그리고 셋째는, 자세히 들으세요. 성경은 쓸데없는 짐은 반드시 버리라고 또한 가르칩니다.
안 져야 될 짐을 그냥 지고 있을 필요는 없습니다. 사실 이러한 쓸데없는 짐들은 벗어 버려야 마땅히 질 짐들을 바로 질 수 있습니다. 우리가 제일 먼저 벗어 버려야 할 짐은 그저 간단히 죄의 짐이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주님께서는 "수고하고 무거운 짐 진 자들아 다 내게로 오라 내가 너희를 쉬게 하리라"고 말씀하셨는데, 그 뜻은 무엇보다도 먼저 죄의 짐을 벗어 버리라는 뜻인 줄 생각합니다. 죄를 짓고 사함을 받지 못하면 큰 짐이 됩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주님께 나와 예수를 내 구주로 영접하게 되면 제일 먼저 과거의 죄를 사하여 주시고 죄의 짐을 그 등에서 벗겨 주십니다. 예수님께서는 십자가 위에서 우리의 모든 죄를 대신하여 고난을 받으시고 누구든지 주를 믿고 그를 의지하는 자에게는 그 등에서 죄의 짐을 벗겨 주십니다.
그런데 어떤 이들은 믿기는 믿지만, 옛날 <천로역정>이라고 하는 유명한 소설이 있지 않습니까? 그 책에 나오는 기독도와 같이 처음에는 예수를 믿고 따르기는 하지만 죄의 짐은 그냥 지고 따르는 이들이 적지 아니합니다. 여러분 기억하시는 대로 이렇게 죄의 짐을 지고 따르는 기독도가 한번은 십자가를 분명히 바라보게 되었습니다. 자기를 대신하여 고난을 받으신 것을 정말 깨닫게 될 때에 그 죄의 짐까지 스스로 벗겨졌습니다.
오늘날도 이렇게 믿는 이들이 더러 있지 아니한가 염려됩니다. "십자가 십자가" 찬송은 부르지만 과거의 죄 때문에 그냥 죄의 짐은 그냥 지고, 고통은 그냥 받는 이들이 없지 않아 있는 듯합니다. "세상 죄를 지고 가는 하나님의 어린 양을 보라"고 하는 성경 말씀을 기억하실 줄 믿습니다. 중심으로 죄를 회개하고 믿는 이들은 이미 죄 사함을 받았습니다. 죄의 짐은 이미 벗겨졌습니다.
이 시간 주님의 약속을 믿고 과거의 모든 죄의 짐은 온전히 벗어 버리시기를 바랍니다. "죄악 벗은 우리 영혼은 기뻐뛰며 주를 보겠네" 기뻐 뛰며 찬송하십시다.
그리고 둘째로는 우리가 마땅히 벗어 놓아야 할 짐이 있습니다. 그것은 근심과 염려의 짐들입니다. 여러분, 산상보훈에 우리 주님께서 어떻게 가르치셨는가를 기억하십니다.
"목숨을 위하여 무엇을 먹을까 무엇을 마실까 몸을 위하여 무엇을 입을까 염려하지 말라 목숨이 음식보다 중하지 아니하며 몸이 의복보다 중하지 아니하냐" 그리고 하시는 말씀이 "공중의 새를 보라 혹은 들의 백합화가 어떻게 자라는가 생각하여 보라 오늘 있다가 내일 아궁이에 던지움을 받는 들풀도 하나님이 이렇게 입히시거든 하물며 너희일까 보냐"
그다음에 무슨 말이 있는지 압니까? "믿음이 작은 자들아 그러므로 염려하여 이르기를 무엇을 먹을까 무엇을 마실까 무엇을 입을까 염려하지 말라" 이는 다 하나님을 모르는 이방인들이 하는 일이라고 지적하면서 하시는 말씀은 "너희는 먼저 그의 나라와 그의 의를 구하라 그리하면 이 모든 것을 너희에게 더하시리라"고 말씀하십니다. "너희 염려를 다 주께 맡겨 버리라 이는 저가 너희를 권고하심이니라" 베드로 사도는 베드로전서 5장 7절에 이렇게 권면합니다.
스트레스라는 말을 요새 여러분은 다 아실 거예요. 이 스트레스가 모든 병의 근원 가운데 6할 내지 7할이 된다고 의학계에서는 지적합니다. 스트레스라는 말은 쉽게 말하면 근심과 걱정입니다. 고혈압이니, 신경통이니, 소위 성인병의 제일 큰 원인은 스트레스에 있다고 합니다. 신앙생활이란 죄의 짐만 벗는 것이 아닙니다. 이 스트레스라고 하는 염려의 짐도 벗어 버리는 것을 의미합니다.
"할 수 있거든이 무슨 말이냐 믿는 자에게는 능치 못할 일이 없느니라" 우리 주님이 말씀하십니다. "내게 능력 주시는 자 안에서 내가 모든 것을 할 수 있느니라" 사도 바울이 증언합니다. "두려워 말라 내가 너와 함께 함이니라 놀라지 말라 나는 네 하나님이 됨이니라 내가 너를 굳세게 하리라 참으로 너를 도와주리라 참으로 나의 의로운 오른손으로 너를 붙들리라" 하나님께서 약속하십니다.
"수고하고 무거운 짐 진 자들아 다 내게로 오라 내가 너희를 쉬게 하리라" 주님께서 부르십니다. 이 주님께 나아와 모든 죄의 짐, 근심과 염려의 짐은 온전히 벗어 놓고 마땅히 져야 할 나의 짐과 서로 져야 할 짐을 잘 지면서 기쁨으로 찬송하면서 삶의 길을 걸어갈 수 있기를 축원합니다. 기도합시다.
아버지시여, 이 시간 여기 앉아서 예배드리는 모든 아버지의 자녀들의 마음을 보시고 마음 속에 아직까지도 염려나 근심이나 죄의 짐을 그냥 지고 나온 이가 있으면 이 시간 주님의 음성과 약속을 듣고 온전히 벗어버리는 이 축복을 우리에게 주시기를 간절히 기도합니다. 그리해서 우리는 과거의 짐은 온전히 벗어놓고 현재에 내가 마땅히 져야 할 짐들 내 책임들 또 서로 져야 할 짐들 봉사의 짐을 잘 질 수 있는 아버지의 자녀들이 다 되게 하여 주시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하옵나이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