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타임>지는 지난 1,000년 동안의 가장 위대한 인물로 구텐베르크를 선정했다. 구텐베르크를 선정한 이유는 그의 인쇄술 창안 때문이다.
이에 대한 생각이 사람마다 다를 것이다. 어떤 책에 보니 인쇄술 발명은 인류 최고의 위대한 유산인 <성경>을 인쇄한 것이라고 한다. 나는 이 의견에 동의하는 편이다.
그리스도인에게 최고의 재산은 성경이다. 그리고 필자의 생각에 설교자에게 최고의 재산은 글을 쓸 줄 아는 것이다.
물론 성경을 많이 알아야 한다. 성경을 통찰력 있게 해석할 수 있어야 한다. 그러나 이런 것들이 글을 표현될 때 그 가치를 인정받는다. 만약 글을 쓸 줄 모른다면, 가치와 효과는 반감될 수 있다.
교회의 리더인 설교자는 글을 쓸 줄 알아야 한다. 이는 설교가 글쓰기이기 때문이다. 글로 쓰여진 설교라야 설교라 할 수 있다.
설교자는 자신의 생각을 글로 표현할 수 있어야 한다. 설교자는 자신이 묵상한 말씀을 설교로 표현하고 싶어 한다.
하지만 누구나 글을 쓸 줄 아는 것은 아니다. 설교자가 글을 쓸 줄 알야야 하는 것은, 글을 쓸 줄 아는 사람과 글을 쓸 줄 모르는 사람이 나뉘기 떄문이다.
문맹의 정의가 예전에는 글을 읽을 줄 아는 여부에 있었다. 문학의 시대인 지금은 글을 쓸 줄 아는가의 여부에 있다.
설교자들을 가르쳐 본 바에 따르면, 설교자도 자기 글을 쓰는 설교자와 그렇지 못한 설교자로 나뉜다. 전자는 '직업적 글쓰기'를 할 줄 아는 것이고, 후자는 '학교의 글쓰기'를 할 줄 아는 것이다.
학교 글쓰기와 직업 글쓰기의 차이
박소연은 그녀의 책 <일 잘 하는 사람은 단순하게 합니다>에서 '학교의 글쓰기'와 '직장의 글쓰기'를 비교한다.
"학교의 글쓰기는 나의 지식과 생각을 효과적으로 보여주기 위한 것이라면, 직장의 글쓰기는 상대방이 원하는 것을 효과적으로 알려주기 위한 것이다."
학교의 글쓰기는 아마추어 글쓰기다. 직장의 글쓰기는 프로의 글쓰기다. 아마추어 글쓰기는 자기를 위한 글쓰기다. 자기를 위한 글쓰기의 대표적인 것이 일기다.
직장의 글쓰기는 독자를 위한 글쓰기다. 직장의 글쓰기는 독자의 입장에서 독자가 원하는 것을 쓸 수 있는 사람이다.
일기만을 쓰던 사람은 독자를 위한 글을 쓰기 어렵다. 직장 글쓰기가 될 때, 직업으로서의 글쓰기가 가능하다. 설교자는 직업으로서의 글쓰기 하는 사람이다.
'학교의 글쓰기'와 '직장의 글쓰기'의 뚜렷한 차이점은, 글을 '두괄식으로 쓰느냐' 여부다. 설교자들에게 글쓰기를 가르치면 공통점이 있다. 두괄식으로 글을 쓰는 설교자를 만나기가 희박하다는 것이다. 그 동안 많은 설교문을 써 왔음이 틀림없다. 하지만 신학교에서 귀에 따갑게 들은 '귀납적 추론, 귀납적 성경공부'의 영향 때문인지, '미괄식'으로 글을 쓴다.
일방적으로 들어야 하는 교인의 입장에서, 나중에 결론을 내리는 미괄식 글은 인내심을 갖고 들을 수 없다. 박소연은 아랫사람이 윗사람에게 미괄식으로 보고하면 딴 생각하거나 화를 낸다고 말한다.
보통 사람들은 미괄식의 글을 10분 이상 듣지 못한다. 그러므로 설교자는 두괄식으로 글을 쓸 줄 알아야 한다. 두괄식으로 글을 쓰는 여부만 봐도 글을 쓸 줄 아는가를 판단이 가능하다.
직장에서는 글을 쓸 때 아래와 같이 써서 보고해야 한다. '두괄식 + 30초 설명'이다. 즉 결론을 포함한 도입부 + 결론 = 성과 어필로 말해야 한다.
박소연에 따르면 대화를 할 때 '기-승-전-결'을 갖춰 이야기를 하면, 상대방은 '승' 때부터 이미 딴 생각을 한다고 한다.
더 안타까운 것은 듣는 입장에서는 다 듣고 난 뒤, 결론 전의 이야기를 모두 잊어버린다는 것이다. 그러므로 글을 쓸 때는 첫째도 둘째도 셋째도 두괄식으로 써야 한다.
아마추어 글은 언제나 미괄식이다. 글을 쓸 졸 모르는 설교자도 미괄식으로 글을 쓴다. 설교자는 글은 두괄식으로 써야 한다. 그럴 때 직장의 글쓰기를 지나 직업으로서의 글쓰기가 가능하다. 설교자는 직업으로서의 글쓰기를 하는 사람이다.
글쓰기가 프로와 아마추어를 결정한다
글쓰기는 프로와 아마추어를 가르는 기준이다. 전에는 스펙인 학위가 중요했다. 이젠 자신만의 것을 갖췄느냐가 중요하다. 책 쓰기 세미나에 갔더니, 책 한 권 쓰는 것이 박사 학위나 사법고시 정도 된다고 이야기한다.
글이 중요해졌다. 그 결과 글의 중요성에 대한 세상의 환경이 확 달라졌다. 전에는 글을 쓸 줄 몰라도 설교에 크게 문제 되지 않았다. 이제는 글을 쓸 줄 모르면 교인에게 설교하는 것이 어려워졌다.
며칠 전 지인을 만났는데, 설교자의 설교에 대해 무시하는 듯 이야기를 하는 것을 듣고 깜짝 놀랐다. 설교자가 생각하기에는 좋은 글이지만, 교인들에게는 보이기 때문이다. 그만큼 교인들의 지적 수준이 높아졌다.
지금은 '어떻게 쓰느냐?'는 그 자체가 하나의 학문이다. '얼마나 잘 쓰는가?'는 중심이 되었다. 오늘도 지인을 만났는데, 글 잘 쓰는 작가에게 마음을 완전히 빼앗긴다고 말한다. 이런 시대에 설교자는 남다른 필력을 지녀야 한다.
앞에서도 이야기했지만 미국 아이비리그 대학들은 글쓰기가 학업의 중심에 있다. 그 이유는 세계적인 리더의 자격을 갖추는데 글쓰기가 필수적이기 때문이다.
나는 책을 읽기만 하는 사람들을 자주 만난다. 속으로는 '읽기만 하는 바보'라고 생각한다. 쓰지 않는 읽기는 독서의 본래 기능을 상실한 읽기이기 때문이다.
아트설교연구원 수업에서는 회원들에게 글쓰기를 강조한다. 수업 자체도 80% 이상이 글쓰기다. 어떤 글을 보니, 읽기의 1/3을 쓰기에 투입하라고 말한다. 맞는 말이다. 읽기에 그치면 설교를 만들 수 없다. 책으로 영원히 나올 수 없다.
글쓰기를 할 줄 알면 자기의 설교가 되어 나온다. 다른 사람들이 읽는 책으로 출간된다. 다른 말로 인생이 검색당하는 인생으로 바뀐다. 결국 쓰기만이 자기다운 인생을 살게 해준다.
하버드대 학생 1,600명을 무려 16년 동안 인터뷰했더니, 대학 생활 성공 비결의 하나가 글쓰기였다고 한다. 이는 글쓰기의 시급성과 글쓰기의 힘을 보여주는 통계다.
설교자는 프로다. 프로는 글을 쓸 줄 알아야 한다고 했다. 만약 글을 쓸 줄 모른다면 껍데기는 프로인데 속은 아마추어다.
아마추어 설교자가 아니라 프로 설교자가 되려면?
로버타 진 브라이언트 (Roberta Jean Bryant)는 글쓰기의 법칙을 말한다. 그는 책 <누구나 글을 잘 쓸 수 있다>에서 글쓰기의 법칙을 아래와 같이 이야기 한다.
글쓰기의 제7법칙
1. 글쓰기는 행동이다. 생각하는 것이 글쓰기가 아니다.
2. 열정적으로 쓰라.
3. 정직하게 쓰라. 알몸을 드러내라.
4. 재미로 쓰라. 자기를 위해 써라.
5. 무조건 쓰라.
6. 다작하라. 모든 것을 이용하여라.
7. 몰입하라.
위의 글쓰기 법칙은 아마추어 설교자의 글쓰기라고 생각된다. 이런 식의 글쓰기는 마음만 먹으면 할 수 있기 때문이다.
설교자는 설교를 하므로 글을 쓸 줄 안다. 어쨌든 주일, 수요일, 새벽기도회 등 설교를 글을 써서 해내기 때문이다.
프로 글쓰기는 무조건 쓰거나 몰입 해 쓰는 것으로 되지 않는다. 글을 쓰는 사람들은 이 정도 상태는 모두 겪는다.
프로 글쟁이는 '왜 글을 써야 하는가?'는 물론, '글을 어떻게 써야 하는가?'에 대한 답변을 할 수 있다.
설교자는 프로 글쓰기다. 아니 프로 글쟁이여야 한다. 그렇다면 아래와 같은 글쓰기의 법칙으로 글을 쓸 수 있어야 한다.
프로 설교자의 글쓰기 법칙은 아래와 같다.
프로 설교자의 글쓰기 제8법칙
1. 서론, 본론, 결론과 설명, 논증, 적용으로 글을 쓰라.
2. 논리 있는 글을 쓰라.
3. 단문으로 글을 쓰라.
4. 대조를 활용해 글을 쓰라.
5. 개념으로 글을 쓰라.
6. 두괄식으로 글을 쓰라.
7. 역동적으로 글을 쓰라.
8. 한 주제로 글을 쓰라.
위의 글쓰기 법칙은 나의 책 <설교는 글쓰기다>에도 상당 부분 언급돼 있다. 하지만 전체가 언급되어 있지는 않다.
글쓰기의 제1법칙부터 글쓰기의 제8법칙까지는 오는 7월 8일 오후 1시부터 6시까지 서울 종로 연지동에 소재한 '한국기독교군선교연합회' 1층 세미나실에서 있을 '1st 크로스로드 포럼'에서 강의할 계획이다.
▲김도인 목사. |
김도인 목사/아트설교연구원 대표(https://cafe.naver.com/judam11)
저서로는 《설교는 인문학이다/두란노》, 《설교는 글쓰기다/CLC》, 《설교를 통해 배운다/CLC》, 《아침에 열기 저녁에 닫기/좋은땅》, 《아침의 숙제가 저녁에는 축제로/좋은땅》, 《출근길, 그 말씀(공저)/CLC》 등이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