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애완견에게 113억 원의 유산이 남겨졌습니다. 유산을 남긴 주인공은 지난 20일 숨진 미국의 부동산 거물 리오나 헴슬리입니다. 리오나는 자신의 애완견에게 천 200만 달러, 우리 돈으로 113억 원 가량의 유산을 남겼습니다. 애완견은 흰색 말티즈 종으로 이름은 '트러블'입니다. 리오나는 유언을 통해 '트러블'을 돌보는 기금으로 천 200만 달러를 물려줬는데요, '트러블'이 죽은 뒤에는 리오나 부부의 무덤 곁에 묻히게 된다고 합니다. 리오나는 또 남동생에게 천만 달러를 손자 2명에게는 각각 500만 달러씩을 남겼는데요, 이유는 애완견 '트러블'이 죽을 때까지 돌보는 대가라고 합니다. 이에 따라 애완견 트러블이 40억 달러에 이르는 헴슬리의 재산 중 가장 많은 유산을 상속받게 됐습니다.”
“한국 정부가 인질 석방의 대가로 탈레반에게 2백만 달러, 우리 돈 약 18억 원을 지불했다고 일본 아사히 신문이 아프가니스탄 정부 측 협상관계자의 말을 인용해 보도했습니다. 아사히신문은 아프가니스탄의 한 중개자가 한국과 탈레반 간의 합의에 이르기 며칠 전 아프가니스탄 주재 한국대사에게 몸값을 지불하지 않고는 해결할 수 없다고 조언했으며 탈레반 현지 사령관이 중개자를 통해 1인당 10만 달러를 요구했다고 전했습니다. 한국 대표단은 이러한 탈레반의 요구에 1인당 5만달러라면 지불할 용의가 있다는 뜻을 전했으나 아프가니스탄 협상 관계자는 한국정부가 지불한 돈은 결국 1인당 10만 달러 이상인 200만 달러였다고 말했다고 아사히는 전했습니다.”
이상은 공교롭게도 거의 같은 시기에 세인들의 많은 관심을 끌며 토픽으로 보도된 내용이다. 물론 인질석방을 위한 몸값은 없었다고 부인하고 있으나 어째든 사실여부를 떠나 왠지 씁쓸한 마음을 넘어 은근히 화마저 치밀어 오르는 것은 왜 일까?
아무리 “개 팔자가 상팔자” 라는 말도 있다지만 사람 몸값보다 개 값이 더 많다는 즉 개만도 못하게 된 사람의 처지가 이유일게다. 따라서 돈의 가치기준은 과연 무엇일까? 하는 생각을 자연스럽게 해보게 된다.
단순히 많고 적음이라는 부피보다는 사용되는 용도와 목적이 가치기준이 되어야 한다는 생각이며, 이 기준은 물론 돈이라는 물질뿐 아니라 어떤 분야의 영역이든 동일하게 적용되어야 가치부여에 혼돈이 없을 것이다. 특히 물질만능사상과 수단과 방법이라는 과정을 무시하고서라도 결과위주의 성공지상주의가 만연한 이 시대에는 더욱 그렇다. 아니 어찌 보면 인간의 죄의 기원으로부터 거슬러 올라가는 전형적인 범죄의 유형이기도 하다. 나는 이 기사를 대하면서 문득 성경의 한 기사를 떠 올리게 되었다.
어느 날 베다니 문둥이 시몬의 집에 머무시던 예수님에게 한 여인 찾아와 자신의 귀한 향유옥합을 깨드려 예수님의 발에 붓고 자기 머리털로 그 발을 씻을 때에 제자 중 가롯유다가 심히 분하게 여기며 가난한 자들에게 주지 않고 낭비한다고 성질을 낸다. 그러나 성경은 이어서 그러한 가롯유다의 본심에 대해 정확히 기록하고 있다.
"이렇게 말함은 가난한 자들을 생각함이 아니요 저는 도적이라 돈 궤를 맡고 거기 넣는 것을 훔쳐 감 이러라”(요12: 6)
“ 그 돈 나나 주지 너 미쳤어!” 하는 말을 그럴 듯 하게 포장한 즉 자신의 음흉한 흑심을 감추고 겉으로만 가난 한자들을 교묘히 이용한 이중적 모습이었던 것이다. 그의 본심에 대한 성경의 기록은 결국 며칠 후 스승인 예수를 당시 노예몸값에 해당하는 은 30에 팔아넘기는 배신을 통해 보다 구체적인 실체로 드러나게 되었다.
한편 돌이켜 내가 기사를 보고 개 값에 분노했던 이유가 혹 “개에게 유산 상속은 무슨 그럴 돈 있으면 나나 주지 미친....” 했던 것이 나의 보다 솔직한 속내였을 거란 생각에 스스로 치사하다 못해 부끄러워 낯이 뜨거워지면서도 슬쩍 이런 엉뚱한 생각이 든다.
"내 몸값은 얼마나 될려나?"
“한국 정부가 인질 석방의 대가로 탈레반에게 2백만 달러, 우리 돈 약 18억 원을 지불했다고 일본 아사히 신문이 아프가니스탄 정부 측 협상관계자의 말을 인용해 보도했습니다. 아사히신문은 아프가니스탄의 한 중개자가 한국과 탈레반 간의 합의에 이르기 며칠 전 아프가니스탄 주재 한국대사에게 몸값을 지불하지 않고는 해결할 수 없다고 조언했으며 탈레반 현지 사령관이 중개자를 통해 1인당 10만 달러를 요구했다고 전했습니다. 한국 대표단은 이러한 탈레반의 요구에 1인당 5만달러라면 지불할 용의가 있다는 뜻을 전했으나 아프가니스탄 협상 관계자는 한국정부가 지불한 돈은 결국 1인당 10만 달러 이상인 200만 달러였다고 말했다고 아사히는 전했습니다.”
이상은 공교롭게도 거의 같은 시기에 세인들의 많은 관심을 끌며 토픽으로 보도된 내용이다. 물론 인질석방을 위한 몸값은 없었다고 부인하고 있으나 어째든 사실여부를 떠나 왠지 씁쓸한 마음을 넘어 은근히 화마저 치밀어 오르는 것은 왜 일까?
아무리 “개 팔자가 상팔자” 라는 말도 있다지만 사람 몸값보다 개 값이 더 많다는 즉 개만도 못하게 된 사람의 처지가 이유일게다. 따라서 돈의 가치기준은 과연 무엇일까? 하는 생각을 자연스럽게 해보게 된다.
단순히 많고 적음이라는 부피보다는 사용되는 용도와 목적이 가치기준이 되어야 한다는 생각이며, 이 기준은 물론 돈이라는 물질뿐 아니라 어떤 분야의 영역이든 동일하게 적용되어야 가치부여에 혼돈이 없을 것이다. 특히 물질만능사상과 수단과 방법이라는 과정을 무시하고서라도 결과위주의 성공지상주의가 만연한 이 시대에는 더욱 그렇다. 아니 어찌 보면 인간의 죄의 기원으로부터 거슬러 올라가는 전형적인 범죄의 유형이기도 하다. 나는 이 기사를 대하면서 문득 성경의 한 기사를 떠 올리게 되었다.
어느 날 베다니 문둥이 시몬의 집에 머무시던 예수님에게 한 여인 찾아와 자신의 귀한 향유옥합을 깨드려 예수님의 발에 붓고 자기 머리털로 그 발을 씻을 때에 제자 중 가롯유다가 심히 분하게 여기며 가난한 자들에게 주지 않고 낭비한다고 성질을 낸다. 그러나 성경은 이어서 그러한 가롯유다의 본심에 대해 정확히 기록하고 있다.
"이렇게 말함은 가난한 자들을 생각함이 아니요 저는 도적이라 돈 궤를 맡고 거기 넣는 것을 훔쳐 감 이러라”(요12: 6)
“ 그 돈 나나 주지 너 미쳤어!” 하는 말을 그럴 듯 하게 포장한 즉 자신의 음흉한 흑심을 감추고 겉으로만 가난 한자들을 교묘히 이용한 이중적 모습이었던 것이다. 그의 본심에 대한 성경의 기록은 결국 며칠 후 스승인 예수를 당시 노예몸값에 해당하는 은 30에 팔아넘기는 배신을 통해 보다 구체적인 실체로 드러나게 되었다.
한편 돌이켜 내가 기사를 보고 개 값에 분노했던 이유가 혹 “개에게 유산 상속은 무슨 그럴 돈 있으면 나나 주지 미친....” 했던 것이 나의 보다 솔직한 속내였을 거란 생각에 스스로 치사하다 못해 부끄러워 낯이 뜨거워지면서도 슬쩍 이런 엉뚱한 생각이 든다.
"내 몸값은 얼마나 될려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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