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독교 신앙의 중요 교리는 모두 초월적이다. 하나님이 사람의 몸을 입으신 성육신도, 그가 택자의 죄를 대속하기 위해 십자가에서 죽으심도 초월적이다. 또 하나님의 아들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지옥 멸망에서 건짐을 받는 구원도, 구원받은 성도가 죽음 없이 영원히 사는 영생도 초월적이다.
거듭남도 자유주의자들의 궤변처럼 삶과 행동의 개과천선이 아닌, 새로운 피조물로 다시 나는(고후 5:17) 초월적 사건이다. 불의한 죄인을 오직 믿음으로 의롭다 해주는 '이신칭의(以信稱義)' 역시 초윤리적 개념이다.
이처럼 모든 기독교의 핵심 사안들은 자연적 이성이나 현세적 개념으로는 못 받아들이는 초월성을 담지한다. 자연적인 것만 받아들이는 자유주의 신학자들은 이러한 기독교의 초월적 개념들을 부정하려고 그것들을 상징화, 은유화시키거나 혹은 형이상학적인 개념들로 대치하므로 그 본의를 훼손했다.
무엇보다 그들은 '하나님 나라' 개념에서 종말 개념을 배제시키므로 하나님나라 운동을 초월성이 배제된 윤리 공동체 운동, 평화운동, 유토피아(utopia, 理想鄕) 운동 등으로 변질시켰다.
또 의도적으로 종말 개념을 배제시키지는 않았지만, 하나님 나라를 '이미와 아직(already but not yet)'이라는 구도로 설정하고 '이미(already)', 곧 하나님 나라의 '현재화 구현'에 방점을 두므로 초월적인 '종말 개념'을 약화시킨 이들도 있었다. 19세기 화란의 신칼빈주의자들(new calvinisnists)이 그들이다.
그들은 후천년설(後千年說, post- millennialism) 입장에서 칼빈주의 문화 건설, 곧 '모든 영역에서 그리스도를 왕이 되게 하자'는 하나님 주권 실현을 하나님 나라의 구현으로 보려 했다.
현세에서 완전한 구원 공동체를 실현하려는 언약적 신율주의자들(covenantal nomism) 역시 하나님 나라의 현재화에 치중했다.
'하나님 나라'의 핵심이 초월적인 종말 개념인데, 이들은 하나님 나라의 현재적 구현 곧 '이미'에 치중한 나머지, 종말 개념인 '아직'을 약화시켜 현세적 개념만 두드러지게 했다. 오늘날 신학 운동들이 종말 의식(천국 신앙)이 결여된 현세적 하나님나라 운동에 홀릭된 것은 사실 알맹이가 빠진 것이다.
반면 지나치게 종말 의식에만 매몰된 하나님 나라 운동들도 있었다. 종교개혁 직후 천년왕국(千年王國, millennium)을 세우려고 했던 '재세례파(Anabaptist) 공동체', 영국 청교도들이 미국의 뉴잉글랜드(New England)를 중심으로 건설하려 했던 '언덕 위의 도시(city on a hill)'가 그것이다.
물론 둘이 강온(強穩)의 온도차는 있지만 종말론 의식에 심취했던 점에서는 동일하며, 모두 하나의 실험으로 끝났다. 오늘날 재세례파는 세상과 단절된 고립 공동체(isolated Community)인 '메노나이트(Mennonite)', '아미쉬 공동체(Amish Village)' 형태로 그 명맥을 이어가고 있다.
"내 나라는 이 세상에 속한 것이 아니다(요 1:36)"는 예수님의 말씀과 "나라이 임하옵시며 뜻이 하늘에서 이룬 것 같이 땅에서도 이루어지이다(마 6;10)"는 주기도문의 가르침은, 하나님나라 운동은 근본 종말론적인 동시에 현세적이어야 함을 가르친다.
그러나 이런 균형을 이루기가 쉽지 않았음은, '현세와 종말'의 균형을 이루도록 해 주는 복음 전도가 간과됐기 때문이다(물론 여러 다양한 이유들도 있겠지만 여기선 주로 복음전도와 연관지어 말하고자 한다).
실제로 예수님은 복음전도에 종말론적이고 초월적인 하나님 나라 개념을 담으셨다. 복음의 별명을 '천국 복음(마 4:23; 9:35; 24:14)', '하나님나라(눅 4:43: 16:16)' 복음이라고 한 것은 복음과 하나님 나라의 불가분리를 말씀한 것이다.
세상의 종말과 하나님 나라의 도래도 전도의 완성과 함께 이루어지게 했다. "이 천국 복음이 모든 민족에게 증거 되기 위하여 온 세상에 전파되리니 그제야 끝이 오리라(마 24:14)".
사도 바울과 베드로 역시 그것을 복음 전도와 연결지었다. 그는 하나님이 하루를 천년 같이 천년을 하루같이 종말의 도래를 연기하고 계심은 복음 전도를 통한 택자 구원을 성취하기 위해서라고(벧후 3:8-9) 했다.
하나님 나라의 권능적 임재이며(막 9:1) 종말의 표상인 성령 강림(눅 9:27) 역시, 제자들이 오해했듯이 이스라엘의 해방 같은 정치적 실현이 아닌 종말운동으로서의 복음 전도를 위한 것이었다(행 1:4-8).
"저희가 모였을 때에 예수께 묻자와 가로되 주께서 이스라엘 나라를 회복하심이 이 때니이까 하니 ... 오직 성령이 너희에게 임하시면 너희가 권능을 받고 예루살렘과 온 유대와 사마리아와 땅 끝까지 이르러 내 증인이 되리라 하시니라(행 1:6-8)".
장차 도래할 종말론적인 하나님 나라의 통치가 복음 전도를 받아들이는 사람 안에서 현재적으로 성취되고, 나아가 그가 들어 갈 종말론적인 하나님 나라 입성을 준비시킨다는 점에서, 복음 전도는 종말론적인 사건이다.
다시 말하지만 하나님 나라 운동의 실패는, 아예 종말론 개념이 부정되거나 '이미'에 경도 (傾倒)된 현세 편향적인 하나님 나라 개념 때문이다. 이러한 왜곡 편향된 하나님나라 개념들이 사람들로 하여금 종말의식을 망각하게 하고 온통 세상에 치중하게 했다.
그리고 그 결과 사람들로 하여금 세속화로 치닫게 했다. 하나님나라의 형이상학화(形而上學變化)와 편향을 막고 균형잡힌 개념을 갖게 해 주는 것이 복음 전도이다.
복음 전도를 통해 초월성과 종말성을 고양받을 수 있는 메커니즘들(mechanisms)은 많다. 우선 복음 자체가 갖다 주는 천국, 영생에의 소망이 사람들에게 초월적인 종말의식을 증진시킨다.
"회개하라 천국이 가까웠다(마 4:17)", "하나님이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사 독생자를 주셨으니 이는 저를 믿는 자마다 멸망치 않고 영생을 얻게 하려 하심이니라(요 3:16)."
복음에 담긴 '구원과 심판'의 종말 개념이 듣는 자는 물론 복음을 말하는 전도자에게 끊임없이 종말의식을 고양시키기 때문이다.
복음을 전할 때 사람들로부터 받는 무시와 핍박 역시, 전도자로 하여금 자신이 세상에 속하지 않은 천국 신민이라는 자기 정체성을 확인받게 하고 종말 의식을 고취받는다.
동시에 복음 전도는 전도자로 하여금 세상과 끊임없이 관계를 맺도록 유도받게 하므로, 그로 하여금 세상과의 극단적인 분리를 불가능하게 한다.
과거 은둔주의자들이나 급진적 종말론자들이 세상과 고립되어 신비주의나 불건전한 신앙으로 흐른 것은 세상과 소통할 복음 전도가 없었기 때문이다. 이런 점에서도 복음 전도는 영혼의 안전책이다.
마지막으로 초월적인 하나님 나라는 성도에게 성령으로 말미암아 현재적으로 경험될 수 있음을 말하고자 한다. 이는 앞서 말한 하나님 나라의 현세적 구현과는 다른 성도 개인의 초월적인 체험이다. 다음의 구절들이 그것을 말한다.
"하나님의 나라는 먹는 것과 마시는 것이 아니요 오직 성령 안에서 의와 평강과 희락이라(롬 14:17)", "심령이 가난한 자는 복이 있나니 천국이 저희 것임이요(마 5:3)", "사람이(물과 성령으로) 거듭나지 아니하면 하나님 나라를 볼 수 없느니라(요 3:3)".
초월적인 하나님 나라의 현재적 도래가 '현재완료형'의 시제로 표현된 것에서도 그 가능성은 담보된다. "내가 하나님의 성령을 힘입어 귀신을 쫓아내는 것이면 하나님의 나라가 이미 너희에게 임하였느니라(마 12:28)".
특히 그리스도 재림 이전에 성령으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나라가 현재적으로 경험될 것을 언약하신 대목에서 더욱 그것을 확증받는다. "내가 참으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여기 섰는 사람 중에 죽기 전에 하나님의 나라를 볼 자들도 있느니라(눅 9:27)".
이는 오순절 이후 성령께서 이 땅에 오신 사건(the chokmah 주석), 곧 오순절 성령 강림을 통해 구원받은 성도들에게 경험될 초월적인 하나님 나라를 말씀한 것이다.
하나님 나라는 종말론적으로 구현될 것인 동시에, 초월적인 성령으로 말미암아 성도에게서 현재적으로 경험된다. 그리스도로 통치되는 종말론적인 하나님나라가 동일한 그리스도의 영 성령으로 거듭난 성도에게 현재적으로 경험되게 하셨다.
하나님 나라의 종말성을 부정하고 오직 현세에서만 '가시적'으로만 구현된다고 주장하는 자유주의자들과는 사뭇 다르다. 거듭나지 못해 초월적인 하나님 나라의 현재적 경험이 없는 그들이, 종말성과 초월성이 배제된 현세적인 하나님 나라만을 주장할 수 밖에 없었던 것은 어쩌면 당연해 보인다.
이경섭 목사(인천반석교회, 개혁신학포럼 대표, byterian@hanmail.net)
저·역서: <이신칭의, 값싼 은혜가 아닙니다(CLC)>, <개혁주의 신학과 신앙(CLC)>, <개혁주의 영성체험(도서출판 예루살렘)>, <현대 칭의론 논쟁(CLC, 공저)>, <개혁주의 교육학(CLC)>, <신학의 역사(CLC)>, <기독교신학 묵상집(CLC, 근간)> 등