현대 이스라엘 개관
1948년 5 월 14 일 현대 이스라엘 국가가 탄생되었다. 모세가 이집트에서 이끌어낸 히브리 민족이 여호수아의 인도로 가나안을 정복한 때로부터 약 3400 년 후의 일이며, 다윗으로부터는 약 3 천년이 지난 후이다. 로마 제국이 주후 70년 예루살렘을 함락한 때로부터 약 1900년 이후 새로 건설된 이스라엘 국가는 어떻게 탄생되었는지를 오토만 터키 시대 말부터 간략히 정리한다.
오토만 터키 제국은 성경의 땅인 이스라엘을 1517-1917 년 지배하였다. 그러나 19 세기 말 터키의 영향력이 약해진 중동 지역은 영국, 독일, 러시아, 프랑스의 이권 다툼으로 인한 각축장이 되었다. 그 중에 중동 지역에 특히 관심이 많았던 영국이 가장 활발하게 움직였다. 세계에서 가장 막강한 함대와 상선을 보유한 영국은 중동의 석유를 탐냈기 때문이다. 그래서 영국은 1882 년부터 이집트를 점령, 지배하기 시작하였다. 1914 년 터키는 중동에서의 패권을 회복하기 위하여 독일과 연합하여 영국과 전쟁을 시작하였다. 당시 카이로에 있던 영국 고등 판무관인 헨리 맥마흔은 아랍 지도자인 후세인 (Hussein ibn Ali al-Hashimi)과 몇 차례 서신 (the McMahon-Hussein Correspondence)을 교환하였다.
서신의 주요 내용은 “만약 아랍인들이 터키와 독일을 상대하는 전쟁에서 영국을 돕는다면 전쟁 후 아랍 연합의 독립을 인정한다”는 내용이다. 후세인은 오토만 터키에 반란을 일으켜 아랍 독립을 주도했던 지도자였다. 이 전쟁에서 영국은 승리하지만, 전쟁 이후 영국은 아랍의 독립을 인정하는데는 소극적이었다.
19세기는 산업의 발달로 로스차일드와 같은 유대인 상인과 금융인들이 막대한 부를 축적할 수 있었다. 그러나 일반인들과의 빈부의 격차는 극심하였다. 부익부 빈익빈의 전형을 보는 시대였다.
같은 시기인 1880 년에서 1890 년 유럽과 러시아에서는 반 유대주의 (Antisemitism)가 격렬해졌다. 안티세미티즘 (Antisemitism)이란 단어만 보면 아랍인들을 포함한 모든 셈족들을 차별하는 것처럼 보이지만, 사실 이 단어는 1879 년 독일에서 처음 시작된 유대인을 증오하는 대표적인 용어이다. 유대인 차별은 러시아에서 가장 심하였다. 러시아는 1821-1906 년에 걸쳐 드러내놓고 유대인을 박해하였다 (Anti-Jewish Pogroms). 약 500 만의 유대인들을 제한된 지역에서만 살게 했다. 그리고 러시아의 경제적 빈곤의 원인을 유대인들에게 물어 많은 유대인들이 희생되었다.
1894 년 프랑스 파리에서는 유대인 출신 프랑스 육군 포병 대위인 알프레드 드레푸스 (Alfred Dreyfus) 대위가유대인이란 것 때문에 유죄 판결을 받는 사건이 발생하였다. 프랑스 군사 법정은 문서를 위조하여 드레푸스에게 스파이 혐의를 씌여 유죄 판결을 내렸다. 1896 년 드레푸스는 증거 없음이 밝혀졌지만 프랑스 사법부는 서둘러 이 사건을 종결짓고 여전히 프레푸스를 유죄로 인정하였다. 하마터면 드레푸스 유죄 판결은 사람들의 관심에서 사라질 뻔 했지만, 1898 년 1 월 에밀 졸라 (Emile Zola) 기자는 드레푸스의 부당한 재판을 파리의 한 신문에 기고하였고, 점차 드레푸스 사건의 부당함이 세상에 알려지게 되었다. 사람들은 군사 법정의 불공정함과 드레푸스 사건의 재심의를 위해 정부를 상대로 시위하였다. 결국 종신형을 선고받았던 드레푸스는 프랑스령 기아나에 있는 악마의 섬에서 5년을 보낸 후 1899 년 석방되었다.
유럽의 대표적인 반 유대주의 (Antisemitism) 사건인 드레푸스 재판은 유럽의 많은 유대인들에게 자신들의 정체성을 깨닫게 하였다. 특히 데오도르 헤르쩰 (Theodor Herzel)은 훗날 “드레푸스 사건을 통해서 자신은 시온주의자가 되었다”고 고백하였다. 헤르쩰은 “유럽에서 반 유대주의를 불식시킬 수 없다면 그것을 피할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은 유대인 국가를 세우는 것이다”라고 주장하였다. 그래서 헤르쩰은 1895 년 말부터 유대인 국가 (The State of the Jews)라는 책을 저술하기 시작하여 1896 년 2 월에 출판하였다. 팔레스틴에 유대인 국가를 건설하므로 반 유대주의를 피할 뿐만 아니라 유대인들은 자유롭게 자신의 생각을 발표하고 종교를 실천할 수 있다고 주장하였다. 헤르쩰의 주장은 유럽을 통해 전 세계 많은 유대인들에게 삽시간에 퍼져 큰 관심을 끌었다. 그래서 1897 년 8 월 29-31 일까지 스위스 바젤에서 1 차 국제 시온 대회 (First Zionist Congress)가 열린 것이다.
시오니즘 (Zionism)이란 ‘역사적으로 이스라엘 땅으로 규정된 팔레스틴에 유대인 국가를 세우는 일을 지원하는 국제 운동 (National movement of the Jewish People)’을 말한다. 1948 년까지 시오니즘의 주요 목적은 팔레스틴에 이스라엘 국가를 세우고, 흩어진 유대인들을 돌아오게 하며, 유대인들이 경험했던 유대인 차별과 박해로부터 해방시키는 것이었다.
데오도르 헤르쩰은 터키 정부에게 팔레스틴에 이스라엘 국가 건설을 제의했지만 거절당했다. 이후 헤르쩰은 영국 정부에 교섭하여 팔레스틴에 유대인 국가 건설을 요청하였다. 영국은 헤르쩰에게 팔레스틴이 아닌 시나이 반도 또는 아프리카 우간다 (Uganda Program)에 유대인 국가 건설을 제시하였다. 헤르쩰은 영국의 제안을 거절하고 시오니즘 계획에 따라 팔레스틴에 국가 건설을 추진하였다. 그러나 헤르쩰은 1904 년 심장 경화증 (cardiac sclerosis)으로 사망하였다.
헤르쩰이 사망하자 시오니즘 기구는 러시아에서 태어나 독일에서 화학을 공부하고 영국으로 귀화한 하임 와이즈만 (Chaim Weizmann, 1874-1952)이 책임을 맡았다. 와이즈만은 시온주의 지도자, 이스라엘 초대 대통령, 생화학자이기도 하다. 시오니즘의 리더로서 와이즈만은 많은 유대인들을 팔레스틴으로 이주하게 했으며 그들로 약속의 땅을 개척하여 정착하는데 큰 힘이 되었다. 와이즈만의 아세톤 연구는 1 차 세계 대전에서 영국군이 승리하는데 크게 기여하였다. 이스라엘 독립 이후 와이즈만은 초대 대통령을 지냈으며, 텔아비브의 남동쪽 레호봇 (Rehobot)에 와이즈만 연구소를 설립하여 히브리 대학 설립에도 이바지하였다.
1818 년 미국의 윌슨 대통령은 민족 자결주의 (Self-Determination)를 발표하였다. 그 내용을 보면 ‘국가적 열망은 존중되어야 한다. 이제 사람들은 자신의 동의하에 지배를 받고 통치를 받을 수 있어야 한다. 자기 결정권은 단순한 문구가 아니라 행동의 필수 원칙’이라고 말하였다. 미국 대통령의 이런 입장에 따라 영국의 외상인 밸푸어는 팔레스틴에 유대인 국가를 세우는 것은 곧 윌슨의 관심을 끌 수 있을 것으로 판단하여 유대인 사업가인 로스차일드에게 편지를 보내 유대인 국가 건설에 대한 생각을 전달하였다. 그러나 이같은 밸푸어 선언은 많은 논쟁을 일으켰다. 같은 땅을 두고 아랍 국가 건설과 유대인들에게도 이스라엘 국가 건설을 약속했기 때문이다. 아랍은 영국이 약속을 어겼다며 맹비난하였다.
1919 년 세계 1 차 대전이 끝나고 팔레스틴은 영국의 점령지가 되어 영국이 지배하였다. 팔레스틴에 이주한 유대인들은 아랍인들에 의해 테러와 죽임을 당하였다. 유대인들은 하가다, 이르군 즈바이레우머 같은 좀 더 난폭한 군대를 조직하여 보복에 나섰다. 아랍과 유대인들 간의 갈등은 점차 심해졌다. 또한 대륙에 전쟁의 기운이 감돌자 영국은 아랍을 자기 편으로 끌어들이기 위해 1939 년5월 17일 백서를 발표하였다. “유대인들의 이민자 수는 5년간 매년 1만명으로 제한한다. 그 이후에는 아랍인의 동의 없이는 더이상 이주할 수 없다. 그리고 유대인들은 팔레스틴에 땅을 살 수는 있어도 국가를 건설할 수는 없다” 이것이 영국 백서의 내용이다.
그러나 이 백서가 발표된지 얼마 지나지 않은 1940 년 제 2 차 세계 대전이 발발하였다. 특히 1939-1945 년 나찌에 의해 약 600 만의 유대인들이 학살되자 유대인들은 자신들의 미래를 위한 최선의 길은 독립 국가를 세우는 것이라 확신하였다. 제 2 차 세계 대전은 연합군의 승리로 끝나고 영국의 위치는 더욱 강해졌다. 그러나 팔레스틴에서 아랍과 유대인들 간의 갈등은 더욱 심각해졌다. 이에 영국은 1948 년 5 월 15 일까지 팔레스틴 문제에서 손을 떼고 UN 이 제시한 분할 통치안을 승인하였다. UN 분할이란 유대인 지역, 아랍인 지역, UN 관할령 이렇게 세 지역으로 구분하여 통치한다는 것이다. 이에 유대인들은 팔레스틴에 국가를 세우는 것이므로 찬성, 아랍은 반대하였다.
1948 년 5 월 14 일 벤 구리온 (Ben Gurion)은 팔레스틴에 이스라엘 국가 창설을 선포하였다. 초대 수상으로는 벤 구리온, 초대 대통령은 하임 와이즈만이 취임하였다. 국가 선포에 대한 벤 구리온의 연설에 이런 표현이 나온다. “만약 그것을 하겠다는 의지가 있다면 그것은 더이상 꿈이 아니다.” 미국과 러시아도 이스라엘 국가 건설에 지지 성명을 발표하였다. 출애굽한 히브리 민족은 광야에서 40 년을 방황했지만 그의 후손들은 수 천년간 세계를 전전하며 방황했던 것이다. 그 방랑 민족이 드디어 국가를 갖게 된 것이다.
1948 년 5 월 15 일 시리아, 요르단, 레바논, 이라크의 아랍 연합 국가들은 신생 국가인 이스라엘을 상대로 전쟁을 시작하였다. 이때에 유대인들은 자기들의 패배는 곧 새 나라의 파멸임을 너무도 잘 알아 결사 항전하였다. 전쟁이 극에 다다르자 유엔은 아랍 연합과 이스라엘을 중재하여 6월 11일 격렬한 전쟁은 한 달 간 휴전되었다. 유대인들은 이 기간을 틈타 군대를 재정비하였다. 그리고 휴전 후 이스라엘은 전쟁의 승기를 잡았다. 1 차 중동 전쟁은 두 진영 모두 준비 없이 시작된 전쟁이었다.
1949 년 1 월 전쟁은 중단되었다. 독립 전쟁에서 이스라엘은 약 5 천명의 희생자를 냈지만 승리했고 갈릴리 전역과 그외 유엔이 정한 지역보다 넓은 곳을 차지하였다. 이때에 벤구리온은 골다 메이어를 뉴욕으로 파견하였다. 당시 골다 메이어는 10 달러를 수중에 갖고 있었지만 한 달 만에 성공적인 캠페인을 벌여 미국의 부유한 유대인들로부터 약 5 천만 달러를 모금하고 귀국하였다. 이 돈은 이스라엘의 생존에 결정적 역할을 하였다.
1966-1967 년 이스라엘과 이집트, 요르단, 시리아 국경에서 잦은 충돌이 있었다. 아랍은 이스라엘을 상대로 전쟁을 준비하고 있었다. 이집트 나세르 대통령은 시나이 반도에 있는 유엔군의 철수를 명령하였다. 이제 전쟁은 초읽기에 들어갔다. 이스라엘의 국방 장관에는 모세 다얀이 임명되었다. 신생 국가는 1948 년 이후 최대의 위기에 몰렸다. 전쟁 준비를 마친 시리아, 요르단, 이집트 세 국가를 동시에 상대하는 것은 너무 벅찬 전쟁이기에 이스라엘은 선제 공격하였다.
1967 년 6 월 5 일 아침, 이스라엘 전투기는 불시에 기습 공격하여 이집트의 전투기 약 300 대를 파괴하고 이후 차례로 시리아, 요르단, 이라크의 전투기들도 폭격하여 전쟁의 기선을 잡았다. 이스라엘 군대는 이집트를 향하여 수에즈 운하까지 진격, 이집트의 유전들을 점령하였다. 이스라엘은 예루살렘, 가자, 골란고원을 확실히 점령하였다. 이 전쟁은 6 일 만에 이스라엘의 완벽한 승리로 끝났다. 역사 이래 가장 짧은 기간에 가장 완전한 승리로 평가되는 전쟁이다.
이집트의 나세르 대통령이 사망하고 사다트가 대통령이 되었다. 1973 년 사다트는 시리아와 협정을 맺고 그해 9 월 욤 키푸르 전쟁을 일으켜 시나이 반도를 진격하였다. 그러나 곧 이스라엘 군대는 시나이 반도에서 이집트를 격퇴하고 카이로까지 진격하였다. 당시 미국 국무장관인 헨리 키신저가 중동 평화를 모색하였다. 미국의 노력에 의해 사다트는 생각을 바꾸어 1977 년 예루살렘을 방문, 이스라엘 국회에서 연설하였다. 이스라엘 베긴 수상도 그 답례로 카이로를 방문하였다. 사다트는 전쟁을 하지 않고 잃었던 시나이 반도를 되찾는 방법을 찾게 되었다.
1979 년 이집트와 이스라엘은 카터 대통령과 함께 캠프 데이비드 (Camp David)에서 평화 협정을 체결하였다. 그 주된 내용은 이스라엘은 점령한 시나이 반도를 이집트에 양도하고, 이집트는 이스라엘과 평화적 관계를 맺는 것이다. 이에 이스라엘은 평화와 안전을 위해 점령지인 시나이 반도를 포기하고, 사다트는 시나이 반도를 회복했지만 주변 아랍국가들로부터는 맹비난을 받았다. 결국 1981 년 사다트는 극단적 무슬림에 의해 암살당하였다.
이스라엘은 이집트와의 평화 협정에 따라 이집트 국경에 배치했던 많은 군사력을 북쪽인 시리아와의 위협에 대비하였다. 팔레스타인 해방기구인 PLO 의 테러, 갈등은 1970 년에 절정에 이르렀다. 요르단에 거점을 갖고 있던 PLO 는 후세인 왕의 반대로 레바논으로 거점을 옮겼다. 1977 년 메나헴 베긴은 말하기를 ‘레바논의 베이루트가 국제 테러 집단의 온상지이므로 정리되어야 한다’고 말하였다.
1982 년 런던 주재 이스라엘 대사가 테러를 당하였다. 이스라엘은 갈릴리 평화 작전이라 하여 이스라엘과 레바논의 국경선에서 40km 밖으로 PLO 를 몰아내고 베이루트까지 침공하여 10 주간 베이루트를 초토화하였다. 1990 년 걸프 전쟁에 이어 이스라엘은 몇 차례 중동 전쟁과 테러와의 전쟁을 치르면서 과거 어느 때보다 평화롭고 안전하며 탄탄한 국가와 사회를 이루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