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화, 흡혈귀, 루시퍼: 흡혈귀와 마귀 모티프의 매력
드라마 <화유기>에 반영된 <서유기>의 카니발리즘(cannibalism), 즉 식인에 대한 신화적 인식은 흡혈(hematophagy) 모티프를 동반하고 있다.
<화유기>는 그 설정의 기원인 <서유기>와 달리, 요괴들이 삼장 진선미의 '살을 먹는 것'에만 집착하지 않고, 그녀의 '피를 맛보는' 것에도 광적인 관심을 보인다. 실제로 작중 환혼시(還魂屍: 혼이 돌아온 시체, 서양식으로 말하면 좀비)로 등장하는 좀비 소녀 진부자(이세영 분)는 원래 죽은 시체이지만, 우연하게 삼장인 진선미의 피를 받아 부활한 것으로 소개된다.
사실 서구 기독교 문화권의 대중문화에서는 흡혈 모티프가 자주 애용되어 왔으나, 동양권 문학에서는 이를 쉽게 발견하기 어렵다. 육체적 생명의 기원을 피로부터 찾는 유대교-기독교 문화의 영향으로, 서구에서는 중세부터 민담 등을 통해 흡혈 모티프가 형성돼 왔다. 1897년 브람 스토커(Bram Stoker)가 집필한 소설 <드라큘라(Dracula)>를 통해 하위문화계 내부에 하나의 주된 흐름을 형성하기에 이르렀다.
<드라큘라>의 설정 가운데 가장 직접적으로 기독론을 연상시키는 것은 첫째로 드라큘라가 피를 마심으로써 허기와 갈증을 달랜다는 것, 둘째로 햇빛을 쬐거나 심장에 나무말뚝이 박히는 등 특별한 조건을 충족시키지만 않는다면 죽음 없이 영원히 살아간다는 것, 셋째로 드라큘라에게 물리거나 그 피를 마신 자는 그에게 종속된 흡혈귀가 된다는 점 등이다.
이런 설정은 흡혈 모티프의 기원인 세르비아 밤피르(вампир) 전설에서 주로 유래됐고, 그 외에도 루마니아 스트리고이(Strigoi) 신화 등에 의해 그 내용이 추가된 바 있다. 스토커는 이런 민담, 전설, 신화적 서사를 왈라키아(Wallachia, 오늘날 루마니아)의 전설적 영웅이자 실존인물인 블라드 체페슈(Vlad Ţepeş)의 일대기에 융합해서 <드라큘라>라는 작품을 완성했다.
▲왈라키아(Wallachia)의 영웅적 영주 블라드 체페슈(왼쪽)와 그를 모티프 삼아 창안된 흡혈귀 드라큘라(오른쪽). |
◈신화와 흡혈귀: 기독교와 흡혈귀 오컬티즘의 불편한 공존
스토커가 <드라큘라>를 집필하던 당시 영국은 한창 빅토리아 시대(1837-1901)를 맞이하여 전성기를 구가하고 있었다. 이 시기 영국은 대부분의 자본주의 강대국들이 그러하듯, 막강한 경제력과 군사력을 바탕으로 예술과 문화를 꽃피우고 있었고, 이런 풍요와 강성함을 신의 축복이라 여겨 사회적으로 기독교적 윤리를 강조하고 있었다.
그러나 내부적으로는 여전히 전근대적이면서 위선적인 사회적 기풍, 자본가와 노동자 간의 심각한 빈부격차, 급격한 도시화에 따른 심각한 전통문화 파괴 및 도시빈민 문제 등이 심화되고 있기도 했다.
당시 영국 사회 내부에서, 더 나아가 유럽 전역에서 흔히 목격되는 경제적 풍요와 절대적 빈곤, 기독교적 윤리와 퇴폐적 욕망, 산업화와 기계화에 지배되는 일상과 고전 신화 및 전설에 의존하는 정신문화 사이의 모순된 공존은 하나의 기형적 문화콘텐츠를 탄생시키는데, 이것이 바로 <페니 드레드풀스(Penny Dreadfuls)>로 알려진 싸구려 괴기, 범죄 간행물이다.
<페니 드레드풀>이라는 이름은 여덟 페이지짜리 소책자 한 권당 몇 페니에 불과한 싼 가격(penny), 그리고 그 괴기스러운 내용(dreadfuls) 때문에 붙여진 것이다. <페니 드레드풀>의 간행 의도는 대중적 취향에 맞게 자극적이고 잔혹하며, 외설적이고 퇴폐적인 이야기들을 담아내는 데 있었다. 이 간행물 덕에 오늘날 하위문화계에서 괴기 캐릭터로 알려진 여러 괴물들이 대중문화 역사의 전면에 그 모습을 드러냈다.
늑대인간(Werewolf) 캐릭터는 이 간행물의 1847년 에피소드 가운데 하나인 '늑대인간 와그너(Wagner the Wehr-wolf)'에 의해 고전 민담으로부터 현대소설 속으로 그 무대를 옮겼다. 흡혈귀 캐릭터는 동년의 에피소드 '뱀파이어 바니(Varney the Vampire)'를 통해 현대적인 감각으로 묘사되기 시작했다.
시체를 되살려 좀비 등의 '언데드'를 만드는 마법적 힘을 지닌 네크로맨서 캐릭터는 1857년의 에피소드인 '네크로맨서(The Necromancer)'를 통해 현대화되기 시작했다. 이처럼 <페니 드레드풀스>는 <드라큘라>로 대표되는 저주받은 존재들의 문학, 바로 고딕 소설(Gothic novel)의 인기를 꽃피우는 첨병 역할을 하게 된다.
▲싸구려 괴기, 공포, 범죄 간행물 페니 드레드풀스(Penny Dreadfuls)의 대표작으로 손꼽히는 "늑대인간 와그너"(Wagner the Wehr-wolf)와 "뱀파이어 바니"(Varney the Vampire). |
이와 더불어 단순히 대중적 취향을 넘어 상당히 심오한 철학적 메시지를 담은 고딕 소설들도 등장하는데, <보물섬(Treasure Island)>의 작가로 유명한 로버트 스티븐슨(Robert Stevenson)의 단편 <지킬 박사와 하이드 씨(Dr. Jekyll and Mr. Hyde, 1886)>, 오스카 와일드(Oscar Wilde)의 <도리언 그레이의 초상(The Picture of Dorian Gray, 1890)> 등이 여기에 속한다.
고딕 소설 대부분은 주로 기독교 신앙과 유럽 전통 이교 신화 및 전설의 불편한 공존 속에서 벌어지는 다양한 초자연적 현상들을 다루고 있다. 한국인의 정신문화 한켠에 무속이 깊숙이 자리잡고 있듯, 유럽 정신문화의 한 구석에는 이교적 오컬티즘(occultism)이 깊숙하게 자리잡고 있었는데, 고딕 소설은 바로 이 점을 이용해서 대단한 인기를 누렸다.
<드라큘라> 역시 이런 유럽 정신문화의 유산에 힘입어, 그리고 빅토리아 시대 고딕 소설의 유행이라는 시대적 풍조를 힘입어 탄생한 작품이다. 반기독교적이고, 초자연적이고, 그래서 비윤리적인 흡혈귀 드라큘라를 주인공으로 삼는다.
드라큘라 캐릭터의 기원이 된 블라드 체페슈는 15세기의 인물로, 어린 시절 여러 불운에도 왈라키아 지역 영주가 되었고, 뛰어난 전술로 강대국 오스만 투르크의 침공에 저항한 루마니아의 국민적 영웅이다. 한국으로 치면 이순신급 위인이라 할 수 있다.
그러나 그는 적에 대한 잔학함과 통치민들에 대한 괴팍한 형벌 때문에 악명도 높은 인물이다. 그가 저지른 가장 유명한 악행은 투르크군 생존 포로나 자신의 마음에 들지 않는 귀족층 및 평민들, 그리고 범죄자들의 몸을 나무 꼬챙이에 꽂아 고통 속에 서서히 죽어가게 한 일이다.
▲블라드 체페슈를 역사상 가장 잔혹한 군주로 인식시킨 꼬챙이형. 체페슈는 꼬챙이에 매달린 자가 즉사하지 않고 몇 시간에서 하루 정도 지독한 고통 속에 죽어가도록 이 형벌을 개량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
스토커는 이런 악행이 지극히 반기독교적이고 비윤리적이라 여겼고, 이에 사람의 영혼을 파괴하고 그의 몸을 살아있는 시체로 만들어 자신의 종으로 삼는 괴기스러운 존재 흡혈귀에 대한 전설을 이 잔혹한 통치자에게 덧입혔다.
이로써 그는 그리스도의 피가 가진 영적인 효력을 믿고 그 피에 담긴 생명을 힘입기를 갈망하는 기독론의 핵심 교의를, 지극히 괴기스럽고 우스꽝스럽게 변형하여 대중에게 인식시키는 데 일등공신이 되었다.
오늘날 흡혈귀에 대한 모든 대중문화적 묘사는 스토커가 창안한 드라큘라 캐릭터를 넘어서지 못한다는 것이 문학 및 문화평론가들의 정설이다. <화유기>는 드라마 설정 기원인 <서유기>에서는 찾아볼 수 없는 피와 흡혈에 대한 갈망을 표현함으로써, 중국의 불교, 도교, 무속 문화유산에 변형된 기독교적 요소까지 혼합한 기형적인 서사를 선보인다.
특히 작중 삼장 진선미(오연서 분)의 피를 갈구하는 요괴들의 모습을 코믹한 대사와 연기를 통해 희화화함으로써, 은연중에 그리스도의 피에 담긴 생명을 믿는 기독교 신앙을 질적으로 저하시키는 행태를 보인다.
이외에도 <화유기>에는 <페니 드레드풀스>의 에피소드들을 주된 모티프로 설정한 미국의 드라마 <페니 드레드풀(Penny Dreadful, 2014-2016)>에 등장한 여러 장면들이 모방되어 있는 것으로 확인된다.
가장 대표적인 것이 <화유기> 1편과 2편에 등장했던 귀신 들린 목각인형 이야기인데, 이런 점은 <화유기>의 서사가 단순히 중국 불교와 무속에만 기대고 있지 않고, 서구의 반기독교적 고딕 소설과 오컬티즘에도 부분적으로 영향을 받고 있음을 확인시켜 준다.
▲미국의 드라마 <페니 드레드풀(Penny Dreadful, 왼쪽)>과 <화유기(오른쪽)>. 귀신이 붙어 입술을 움직이며 말할 수 있는 목각인형을 등장시킨다. |
◈신화와 루시퍼: 갈수록 친숙해지는 이름, 루시퍼
서구 고딕 소설과 오컬티즘이 내세우는 괴기스러운 캐릭터들의 존재적 기원은 성경의 마귀, 곧 루시퍼다. 우연인지 의도된 것인지는 알 수 없으나, <화유기>는 등장인물의 호칭, 소품, 그리고 작중 등장하는 회사명을 통해 마귀 모티프 계승에 동참하고 있다.
<화유기>의 마귀 모티프는 주로 우마왕(牛魔王) 우휘철(차승원 분)에 집중되고 있다. 우선 우마왕은 항시 비서이자 종복인 마지영(이엘 분)을 비롯해서 주변인물들에게 '마왕님'이라는 호칭으로 불린다. 여기에 그는 항상 요괴이자 마왕으로서 자신의 정체성을 일깨워주는 뿔 달린 황소 모양의 석상을 애지중지한다. 마지막으로 그가 운영하는 연예기획사의 이름은 루시퍼 엔터테인먼트다.
'마왕'의 '마(魔)'라는 글자가 가진 의미는 수행을 방해하는 악한 귀신 혹은 요괴를 뜻하는 것이다. 이 글자는 중국에 불교가 전래되면서 불교의 악신 마라 파피야스(मार पापीयस्)의 이름을 한자어 '마라(魔羅)'로 음역하기 위해 창안된 것이다. '마'라는 음가를 부여하기 위해 식물인 삼을 뜻하는 '마(麻)'자를 채택하고, 악귀 혹은 요괴라는 뜻을 부여하기 위해 '귀(鬼)'자를 채택해서 탄생한 글자가 바로 마왕의 '마(魔)'다.
그러므로 마왕이란 영격의 상승을 위한 수행과 선업을 쌓는 것을 방해하는 존재들(魔)의 우두머리(王)라는 뜻이다. 마왕이란 단어는 성서의 마귀(魔鬼) 혹은 사단을 지칭하는 단어로 자주 쓰이지는 않으나, 성서 내부에는 분명 이 단어의 뜻에 부합하는 용어가 여러 차례 등장한다. 바로 히브리어 '바알세붑'(זְבוּב בַּעַל)과 헬라어 '바알세불'(Βεελζεβούλ)이다. 마왕이라는 단어가 바알세붑이나 바알세불에 상응한다는 것은 기독교인들뿐 아니라 불교인들도 일반적으로 인정하는 바다.
"바알세불은 기독교에서 이야기하는 '귀신들의 왕' 사탄을 의미한다. 불교에서는 부처님의 성도를 방해한 마라, 부처님께서 중생을 향해 전법하는 것을 만류한 마왕 파순이 바알세불에 해당할 것이다. 바알세불은 히브리어로는 '파리떼의 왕'이라는 뜻이다(김영국, '바알세불과 마왕파순의 부활', <불교저널> 2017. 07. 27)."
▲블레셋 사람들의 도시 에그론(Ekron)의 주신이었던 바알세붑. |
널리 알려져 있다시피, '바알세붑'에서 '바알(בַּ֫עַל)'은 주(主) 혹은 주인을 의미하며, 세붑(זְבוּב)은 파리를 의미하는데, 여기서는 블레셋 사람들(Philistines)의 도시 에그론(Ekron)의 주신(主神)을 말하는 것이다.
에그론 사람들은 파리를 주신으로 섬겼다. 이들이 파리를 신으로 섬긴 이유는 파리가 가장 더러운 곳, 다시 말해 분뇨, 썩어가는 사체나 음식 등에 붙어 살므로 온갖 더러움과 역병을 주관하고 다스린다고 믿었기 때문이다. 즉 에그론의 신 세붑은 역병을 두려워하는 블레셋인들의 종교심을 반영한 우상이라 할 수 있다.
1954년 영국의 작가 윌리엄 골딩이 문단 데뷔작으로 <파리대왕(Lord of the Flies)>이라는 소설을 집필했는데, 이 소설의 제목이 바로 바알세붑이라는 용어를 직역한 것이다. 골딩은 이 소설 덕에 1983년 노벨문학상을 수상했다.
헬라어 '바알세불'은 일반적으로 히브리어 바알세붑을 헬라어로 옮긴 용어로 알려져 있다. 바알세불의 기원에 대해서는 이것 외에도 다른 설명들이 있지만, 일단 바알세붑이라는 용어의 의미가 획득된 이상, 여기서 바알세불에 대해 더 이상 살펴볼 필요는 없을 듯하다.
일단 중요한 사실은 <서유기>에 등장하는 마왕이라는 용어가 불교의 마라 파피아스로부터 유래된 용어이며, 성경에는 여기에 상응하는 바알세붑, 바알세불이라는 용어가 존재한다는 점이다.
예수께서는 바알세붑, 바알세불이라는 용어를 마귀를 뜻하는 디아볼로스(διάβολος), 혹은 사단을 뜻하는 사타나스(Σατανᾶς)를 지목할 때 사용하셨다. 디아볼로스와 사타나스는 하나의 동일한 존재자를 다른 의미로 지칭하는 용어들이다.
디아볼로스라는 용어는 '참소하다, 중상모략하다'는 뜻의 헬라어 동사 '디아발레인(διαβάλλειν)'으로부터 파생된 것이다. 이 디아발레인은 두 단어가 합성된 것으로 '디아(δια)'는 '가로지름, 사이를 가름'이라는 의미를, '발레인(βάλλειν)'은 '욕설을 퍼붓다, 타격을 주다'라는 의미를 갖는다.
곧 디아볼로스란 용어는 하나님과 사람 사이를 중상모략을 통해 이간해서 사람의 영혼에 타격을 주는 자란 뜻으로 밝혀지며, 한글 성서에는 마귀(魔鬼)로 번역되어 있다.
사타나스라는 용어는 원래 '대적하는 자, 원수'를 뜻하는 히브리어 '사탄(שָׂטָן)'을 헬라어로 음역한 것으로, 하나님께 대적하는 자, 반역자라는 의미를 갖는다. 한글 성서에는 히브리어 음가 그대로 사단이라는 용어로 번역되어 있다.
▲<화유기>의 마귀 모티프를 대변하는 우마왕. |
이처럼 <화유기>에서 수도 없이 반복되는 마왕이라는 단어는, 비록 불교로부터 유래된 말이지만 현대적 관점에서는 기독교의 마귀 모티프를 반영하는 것으로 보아도 무방하다. 그리고 <화유기>에는 이런 의혹을 보다 확실하게 밝혀주는 장면들이 등장한다. 우마왕이 황소 모양의 석상을 애지중지하는 장면들이 바로 그것이다.
작중 우마왕의 황소 석상에 대한 애착은 물론 <서유기>의 우마왕 캐릭터를 희화화하기 위해 채택된 설정이지만, 묘하게도 구약성서에 등장하는 이스라엘 민족의 우상숭배(출 32:1-35)를 연상시킨다. 고대에 소 숭배는 전 세계적으로 널리 퍼져 있던 신앙이었는데, 이스라엘 민족은 지도자 모세가 죽은 것이 아닌가 하는 불안감에 모세 없이 하나님을 섬기겠다고 송아지 모양의 우상을 만들었다.
광야에 나온 이스라엘 민족이 왜 하나님을 소 모양으로 형상화했는지에 대해서는 여러 해석이 있다. 그 가운데 가장 널리 회자되는 것으로는 주변 이방 민족들이 황소의 우상을 신으로 섬기던 사상(특히 이집트의 황소 신인 아피스 숭배사상)을 이어받았기 때문이라는 해석이다.
당시 메소포타미아, 이집트, 그리고 레반트 지역에서 가축화되지 않은 야생의 황소나 물소는 가장 강력한 힘을 갖춘 동물 중 하나로서, 사자도 쉽게 건들지 못하는 맹수 축에 속했다. 특히 근력과 지구력 측면에서 비견될 동물이 없었다.
그래서 소 숭배 신앙은 힘, 권능을 숭상하는 신앙이었고, 이런 종교적 동기를 가진 신앙이 광야의 황량함에 노출된 채 지도자를 잃었다고 믿는, 즉 생존의 위기에 처해 있는 이스라엘 민족을 사로잡았을 것이라는 해석이 전반적으로 정설로 받아들여지고 있다.
▲<화유기>의 우상숭배 모티프를 대변하는 황소 석상. |
여기에 더해, 드라마 <화유기>는 결정적으로 우마왕이 경영하는 연예기획사의 사명(社名)을 '루시퍼 엔터테인먼트'로 소개하는 가운데, 우마왕 캐릭터를 기독교의 마귀 모티프에 확정적으로 연결시킨다. 라틴어 '루키페르(Lucifer)'는 서구에서 오랜 시간 마귀 혹은 사단을 지칭할 때 사용된 이름이다.
사실 이 이름이 미가엘(מִיכָאֵל)이나 가브리엘(גַּבְרִיאֵל)처럼 성서에 정확하게 명시된 천사의 이름은 아니다. 이는 단지 마귀의 타락 이전 신분을 유비적으로 표현한 호칭 중 하나인 히브리어 '헬렐(הֵילֵל)', 즉 계명성(啓明星, 새벽별, 사 14:12)을 라틴어로 의역한 명칭이다. 루치페르의 '루키(Luci)'는 '빛'을 뜻하는 라틴어 '루키스(lucis)'로부터, 그리고 '페르(fer)'는 '나르다, 전달하다'를 뜻하는 라틴어 '페레(ferre)'로부터 파생된 것이다.
즉 루키페르란 빛을 나르는 자, 빛을 전달하는 자, 다시 말해 하나님의 영광의 빛을 대신해서 전달하는 자라는 뜻을 갖고 있다. 이는 마치 새벽별인 금성이 태양의 빛을 반사해서 새벽에 가장 밝은 빛을 발하듯, 타락 전의 마귀가 자체적으로 발광하는 자가 아니라 하나님의 영광을 반사해 나타내는 역할을 지닌 자였음을 의미한다.
<화유기>에 채용된 이 명칭들이 의미하는 바는 분명해 보인다. <화유기>는 <서유기>에 반영된 불교적, 중국무속적 요괴 모티프에 기독교의 마귀 모티프를 섞어내는 종교혼합주의(syncretism)를 시도하고 있다. 이는 이 드라마에 서구적이고 현대적인 감각을 선사하는 동시에, 우마왕이라는 등장인물을 보다 매혹적인 존재로 부각시키는 데 기여하고 있다. 성서의 마귀는 이간하는 자이기 이전에 유혹하는 자로 등장한다(창 3:1-5).
<화유기>의 우마왕은 이 드라마의 코믹한 요소를 주도하는 가운데, 어떤 측면에서는 손오공(이승기 분)이나 진선미보다 더 인상적인 모습을 보이는 주동인물격 캐릭터로 등장한다. 그래서일까. 이 드라마에 반복적으로 등장하는 마왕의 호칭, 소에 대한 애착의 모습, 그리고 루시퍼라는 사명이 기독교인 입장에서는 못내 불편하게 여겨진다.
마왕과 루시퍼라는 호칭을 친숙하게 만들 뿐 아니라, 우상숭배의 모습을 우스꽝스럽게 희화화함으로써 즐거움의 재료로 삼는 행태는 분명 반기독교적인 것이기 때문이다. <끝>
▲<화유기>의 루시퍼 엔터테인먼트. |
박욱주 박사(연세대 연합신학대학원 겸임교수)
연세대학교에서 신학을 전공했으며, 동 대학원에서 조직신학 석사 학위(Th.M.)와 종교철학 박사 학위(Ph.D.)를, 침례신학대학교에서 목회신학 박사(교회사) 학위(Th.D.)를 받았다. 현재 서울에서 목회자로 섬기는 가운데 연세대 연합신학대학원 겸임교수로 재직하고 있으며, 기독교와 문화의 관계를 신학사 및 철학사의 맥락 안에서 조명하는 강의를 하는 중이다.
필자는 오늘날 포스트모던 문화가 일상이 된 현실에서 교회가 보존해온 복음의 역사적 유산들을 현실적 삶의 경험 속에서 현상학과 해석학의 관점으로 재평가하고, 이로부터 적실한 기독교적 존재 이해를 획득하려는 연구에 전념하고 있다. 최근 집필한 논문으로는 '종교경험의 가능근거인 표상을 향한 정향성(Conversio ad Phantasma) 연구', '상상력, 다의성, 그리스도교 신앙', '선험적 상상력과 그리스도교 신앙', '그리스도교적 삶의 경험과 케리그마에 대한 후설-하이데거의 현상학적 이해방법' 등이 있다.
브리콜라주 인 더 무비(Bricolage in the Movie)란
브리콜라주(bricolage)란 프랑스어로 '여러가지 일에 손대기'라는 의미를 갖고 있다. 이 용어는 특정한 예술기법을 가리키는 용어로 자주 사용된다.
브리콜라주 기법의 쉬운 예를 들어보자. 내가 중·고등학교에 다니던 학창시절에는 두꺼운 골판지로 필통을 직접 만든 뒤, 그 위에 각자의 관심사를 이루는 온갖 조각 사진들(날렵한 스포츠카, 미인 여배우, 스타 스포츠 선수 등)을 덧붙여 사용하는 유행이 있었다. 1990년대에 학창시절을 보내신 분들은 쉽게 공감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