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모스와 같은 시대에 일한 사람이 호세아입니다. 그러나 호세아는 아모스와는 성품이나 분위기가 사뭇 다릅니다. 호세아는 정의를 가지고 외치는 아모스와는 달리 사랑으로 호소하는 선지자였습니다. 그는 음란한 자기 아내 이야기를 하면서 백성을 설득하려고 했던 사랑의 선지자였습니다.
신앙의 패턴도 이렇게 다릅니다. 어떤 사람은 하나님의 정의와 심판을 강조하는 자가 있는가 하면, 어떤 사람은 하나님의 사랑을 강조하는 자도 있습니다. 어떤 사람은 성도들의 세상적, 물질적 욕구에 아부하는, 그냥 잘되고 복주고, 잘되고 복주고, 그런 것만 가지고 하는 자가 있고, 어떤 사람은 맨날 구원, 구원, 도대체 십원은 안되고 맨날 구원 타령을 하는 자도 있습니다. 그런 사람들은 나중에 구원파 비슷하게 됩니다. 또 어떤 사람은 맨날 신비를 추구하여 성도들로 하여금 하나님의 말씀의 본질을 알지 못하게 가로 막는 자도 있습니다. 어떤 목회자를 만나느냐에 따라 성도들의 신앙 생활은 전혀 다른 길을 걸어갑니다.
우리는 어느 한 쪽으로 치우치면 안됩니다. 하나님의 공의도 있지만 사랑도 있습니다. 하나님의 사랑만 계속 강조하면 성도들이 방자하게 되고, 하나님의 공의만 가지고 윽박지르면 하나님이 사랑의 하나님이란 것을 망각해 버리게 됩니다. 축복, 은혜 등 기복적인 것만 강조하면 십자가의 은혜를 외면하게 됩니다. 멸시 천대 십자가는 주가 지고 가셨으니, 그저 우리는 잘먹고 잘살고 누리며 살리라는 식입니다. 사람들을 많이 끌어 모아서 그것이 목회 성공이라고 하면, 이슬람이 제일 성공한 것입니다. 카톨릭은 두 번째 성공한 것이고, 기독교가 제일 실패한 것입니다. 사람 많이 모았다는 것을 성공이라고 하면, 이슬람이 제일 많이 모아 놓았고, 다음이 카톨릭이고, 그 다음에 기독교이기 때문입니다.
아모스와 호세아는 같은 시대에 일했는데, 정의의 선지자 아모스는 짧게 일했고, 사랑의 선지자 호세아는 길게 사역을 하였습니다. 호세아는 북왕국 사람이었지만 아모스는 남왕국 사람이었기 때문에 북왕국에 가서 오래 머물 수가 없었기 때문이었습니다.
아마샤가 아모스의 입을 틀어 막고 예언을 하지 못하게 할 때 아모스는 그에게 "지금은 네가 하나님 말씀을 부담스러워 하며 쓴 소리를 듣기 싫어하는 모양인데 때가 되면 듣고 싶어도 듣지 못할 때가 올 것이다. 양식이 없어서 기근이 아니라 물이 없는 기갈이 아니라 하나님의 말씀을 듣지 못하는 기근과 기갈이 있는데 바로 지금이다" 라고 말합니다. 아모스와 호세아는 이스라엘의 마지막 예언자입니다. 하나님은 이스라엘에게 회개할 마지막 기회를 주시고자 하였지만 그들의 입을 틀어 막으려고 했습니다.
호세아 선지자에 대해서 우리가 잘 아는 것은 없습니다. 하나님께서는 호세아에게 음란한 아내를 취하여 음란한 자식을 낳으라고 하십니다. 이런 말씀은 특별한 때에 특별한 사람에게 특별히 주어진 말씀이지 보편성 있는 말씀이 아닙니다. 이런 것을 분별하지 못하면 이상한 믿음을 가지게 됩니다. 이것은 그 당시 그 사람에게만 해당되는 것입니다. 따라서 우리가 어떤 말씀을 들을 때, 언제, 어디서, 누가, 무엇을, 어떤 말씀을, 왜, 어떻게라는 것을 이해 해야 합니다.
어떤 말씀이 자기 마음에 와 닿았다 하여 하나님이 내게 말씀을 주셨다고 착각하면 안됩니다. 대개 큐티(QT)하는 사람들이 그런 실수하는 범합니다. 반드시 사실 파악을 먼저 해야 합니다. 즉, 이 말씀이 언제 어디서 누가 무엇을 무슨 말씀을 어떻게 왜 주어졌던 말씀인지 앞뒤를 잘 읽어보고, 적어도 그 책을 다 읽어보고, 그 책을 읽어봐서 안되면, 그 책의 전후에 있는 역사들이 있는 다른 책을 또 읽어봐야 합니다. 그렇지 않으면 엉뚱한 소리, 뚱딴지 같은 소리를 하게 됩니다.
호세아는특별한 시대에, 특별한 사명을 감당하기 위해서, 음란한 여자가 남편에 대한 정조를 다하지 않을 때, 그 남편의 마음이 어떤 식으로 얼마나 상하는 지를 경험하여 하나님의 심정을 조금 이해하고 설교할 수 있게 했다는 것입니다. 남자들 결혼을 해서 아내가 착하고 아름다우면 행복할 것이고, 아내가 못되고 악하면 바로 신학자가 됩니다.
호세아는 디블람의 딸 고멜을 취하여 아들을 낳았는데 하나님께서 장자의 이름을 '이스르엘'이라고 지으라고 하셨습니다. 이 이름의 뜻은 '조금 후에 내가 이스르엘의 피를 예후의 집에 갚으며 이스라엘 족속의 나라를 폐할 것이라는 의미가 들어 있었습니다. 고멜이 다시 잉태하여 딸을 낳으니 여호와께서 딸의 이름을 '로루하마'로 지으라고 하십니다. 이름의 뜻은 '내가 다시는 이스라엘 족속을 긍휼히 여기지 아니할 것이라'는 것입니다. 로루하마를 젖을 뗀 후에 또 잉태하여 아들을 낳고 이름을 '로암미'라고 하셨습니다. 그 이름의 뜻은 '너는 내 백성이 아니요, 나는 너희 하나님이 되지 않을 것이다. 완전히 관계를 끝을 내겠다.'는 것입니다.
호세아의 장남 이름을 이스르엘이라고 한 것이 가장 핵심입니다. 오므리 왕조(오므리, 아합, 아하시아, 여호람)이 잘못 되었을 때, 예후가 쿠데타를 일으켜 이스르엘 평지 나봇의 포도밭에서 오므리 왕조를 끝장 낸 사건을 기억하실 것입니다. 하나님께 거룩히 쓰임 받았던 예후 왕조가 아합왕과 같은 짓을 하니까 예후 왕조도 끝장을 내시겠다는 말씀이 호세아의 장자 이름을 '이스르엘'이라고 하셨던 것입니다. 이런 것은 하나님의 감정을 모르면 해석이 안되는 것입니다. 아무리 기도를 많이 하고, 영적으로 해석하고 묵상해도 안되고 역사를 알아야 해석이 되는 것입니다.
옆에서 누가 역사적인 사실들을 지도해 주는 사람 없이 혼자 큐티(QT) 하다가 이단과 사이비가 되고 마는 것입니다. 대부분의 이단 사이비가 혼자서 큐티 하다가 나온 것들입니다. 혼자서 동굴을 파다가 다시는 나오는 곳을 몰라 돌아오지 못하고 엉뚱한 길로 나간 자들이 바로 이단 사이비입니다. 그래서 혼자서 성경을 읽는 것은 별로 잘하는 것이 아닙니다. 읽기는 혼자 읽되, 반드시 안내자의 안내를 받아 같이 공부하는 것이 좋습니다.
많은 사람들을 교회에 데려다 놓고, 안 가르치고, 잘못 가르치고, 못 가르치고 해서 망치고 있는 것이 오늘의 현실입니다. 찬양도 잘하고, 기도도 잘하고, 전도도 잘하고, 헌금도 잘하고, 주일예배 출석율도 세계 1등이고, 다 잘 하는데 딱 한가지 하지 않는 것이 있습니다. 성경만 가르치지 않는 것입니다. 이런 것을 신천지 무료성경신학원이 깨닫고 교인들을 공략하고 있는 것입니다. 성도들의 지적인 수준이 많이 향상되었기 때문에 성경을 통째로 알고 싶은데, 교회에서는 통째로 안 가르치니까 신천지같은 이단 사이비들이 득실거리는 것입니다. 교회마다 모두 자신들이 정통이라고 떠들어 댑니다. 그러나 가만히 따지고 보면 정통이 아니라 깡통입니다. 성경을 가르치지 않고 정통, 정통하니까 아주 정통으로 잘못된 것입니다. 이 모든 책임은 목사에게 있습니다.
이스르엘이란 호세아 장자의 이름의 의미를 깨닫지 못하면 나머지 로루하마, 로암미에 대한 것이 이해가 되지 않습니다. 이스라엘은 하나님을 철저하게 배신하였습니다. 하나님은 죽도록 사랑했는데, 그 사랑을 받는 이스라엘은 배신합니다. 믿음을 배반하고, 신앙을 배반하고, 하나님의 사랑을 배반합니다. 하나님은 죽도록 사랑했는데, 이스라엘 백성들은 거짓 것을 섬기고, 우상을 섬겼습니다.
호세아는 아내 고멜과 같이 살아보니까 하나님의 심정을 조금씩 배워가게 됩니다. 고멜은 처음부터 음란한 여자였습니다. 그러나 결혼하면 마음을 잡고 살림을 착실하게 하려나 생각했는데, 버릇을 고치지 못하고 결혼한 후에도 자꾸 다른 남자를 따라다니고, 잡아다 놓으면 또 달아나고, 집에 가면 이스르엘도 울고, 로루하마도 울고, 로암미는 그냥 마루바닥에 엎어져 자며 집안은 모두 엉망이었습니다. 호세아는 아들에게 '엄마 어디 갔느냐?' 하니까, 어떤 남자를 따라갔다는 것입니다. 호세아는 아내를 찾아 나섭니다. 어떤 마을에 들어가니 아내가 어떤 놈팽이하고 살고 있는 것이었습니다. 호세아가 그놈에게 아내를 내놓으라고 하니까, 그 놈이 하는 말이 '아내를 데려가려면 돈을 가져와라'는 것이었습니다.
호세아는 아내를 데려올 돈이 없어 집으로 돌아오는데 하나님께서 호세아에게 말씀하십니다."이스라엘 백성이 여호와가 이스라엘 백성이 다른 신을 섬기고 그 앞에 건포도 떡을 먹고 앉아 있을지라도 내가 이스라엘 백성을 사랑한단다. 호세아야, 너도 음부가 된 내 아내를 빨리 가서 찾아오거라" 호새아는 그 후에도 아내를 몇 번이나 더 데려오면서 하나님의 심정을 알게 되었습니다. 호세아는 하나님의 심정을 깨닫고 외칩니다. '여호와를 알자, 힘써 여호와를 알자. 하나님께서 나는 인애를 원하고 제사를 원치 아니하며, 번제보다 하나님 아는 것을 원한다.' 그러나 아무도 하나님을 이해하는 사람이 없었습니다.
호세아는 아내를 돈을 주고 찾아오면서 아내에게 '너는 많은 날 동안 나와 함께 지내고 행음하지 말며 다른 남자를 좇지 말라. 나도 네게 그리하겠노라.'고 말합니다. 호세아는 속이 뒤집어지고, 자존심이 상할 대로 상한 것을 사람들에게 이야기해야 하니 얼마나 괴로웠겠습니까? 호세아의 이런 입장을 생각하며 하나님의 심정을 깨닫기를 바라는 마음에서 기록된 말씀이 호세아서입니다. 그러나 사람들은 호세아서를 읽지 않으며, 하나님의 심정에 대해서는 전혀 관심이 없습니다. ♣
[출처: LEAD THE BIBLE]