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전에 학부생들을 대상으로 기독교와 세계 문화의 관계에 대한 교양강의를 진행할 때의 일이다. 논술문제로 영화 <설국열차>를 플라톤의 '동굴의 비유'와 기독교 신앙에 대한 알레고리(allegory)로 상정하고 분석하라는 문제를 제출했다.
문제를 출제할 당시에는 내심 학생들이 꼭 답변해 줬으면 하는 기대를 가졌고, 몇몇 학생들이 내 의도에 부합하는 답변을 적어줬다. 이 문제에서 내가 가장 관심을 가졌던 요소는, 학생들이 영화에서처럼 기독교 신앙을 단지 '동굴에 비치는 그림자'에 불과한 것으로 보는가 하는 점이었다.
2013년 개봉된 봉준호 감독의 영화 <설국열차>는 한국영화 사상 최대 제작비인 437억을 들인 영화로, 같은 해 개봉한 영화들 중 전체 흥행순위 2위를 차지했다. 국내 최종 누적 관객수는 935만 명으로, 막대한 제작비에도 불구하고 흥행에 성공한 영화들 중 하나라는 평가를 받는다.
현재까지 나온 봉준호 감독의 대표작들(살인의 추억, 괴물, 마더 등)을 보면, 그가 영화를 통해 관객 각자의 삶의 경험을 돌아보도록 하는 데 대단히 능숙하다는 사실을 발견하게 된다. 그 가운데서도 설국열차는 오늘날의 사회에서 플라톤(Plato)과 하이데거(Heidegger)의 사상, 그리고 기독교 신앙이 갖는 가치를 반성적으로 평가하고 대비해볼 수 있는 기회를 준다. 그렇기 때문에 상당히 흥미롭게 관람한 작품으로 기억된다.
열차: 플라톤의 동굴의 비유(The Allegory of the Cave)
플라톤은 그의 저서 <국가(Republic) > 제7권에서 '동굴의 비유'를 기술하고 있다. 이 유명한 비유가 서구 사유의 역사에서 갖는 독보적 위상에 대해서는 재론의 여지가 없다. 비유는 다음의 이야기를 담아내고 있다.
어둑한 동굴 안에 죄수들이 갇혀 있다. 이 죄수들은 태어나서부터 단 한 순간도 다른 곳으로 눈을 돌릴 수 없도록 몸과 얼굴이 결박돼 있다. 그들이 볼 수 있는 것은 오직 정면에 펼쳐진 동굴의 벽뿐이다. 죄수들이 결박돼 있는 뒤편에는 몇몇 사제들이 다양한 사물의 모양을 가진 판들을 들고 왕래한다. 사제들의 뒤에는 큰 모닥불이 있어, 사제들이 움직이는 판으로 빛을 발산한다. 이로 인해 죄수들이 보는 벽에는 움직이는 사물들의 그림자가 비친다. 죄수들은 평생 이 그림자가 존재하는 것들의 진리라고 믿고 살아간다.
어느 날 누군가(진리를 아는 철학자)가 동굴 안에 들어와 한 죄수의 결박을 풀고, 그를 동굴 밖으로 데려가려 한다. 죄수는 크게 당황한다. 그는 사제들이 판을 들고 돌아다니는 곳과 모닥불이 있는 곳을 지나쳐 동굴의 입구로 끌려간다. 죄수는 아직 사제들과 횃불이 가지는 의미를 이해하지 못한다. 동굴의 입구를 벗어나자, 이 죄수는 더 큰 당혹감에 휩싸인다. 어두컴컴한 동굴에서 평생을 산 나머지 동굴 바깥의 태양빛을 쳐다보는 게 고통스럽기만 하다.
그러나 시간이 지나자 그의 눈은 서서히 바깥의 세상에 적응된다. 그는 눈을 들어 주변을 둘러본다. 태양빛에 반사되어 천연색으로 보이는 세상은 아름답고 진실된 것이다. 그는 그간 그림자로만 보아온 짐승과 새, 꽃과 나무, 산과 강, 들판 등을 바라본다. 이로써 그는 평생 동굴 벽에서 목격해온 모든 것이 조작된 그림자일 뿐임을 깨닫는다. 그리고 눈이 태양빛에 완전하게 적응됐을 때 그는 빛을 발산하는 태양을 직시한다. 그 순간 그는 모든 존재의 진리가 태양이 비치는 빛에 의해서 드러난다는 사실, 즉 태양이야말로 존재의 진리가 유래되는 근원이라는 사실을 알아내고야 만다.
영화 설국열차는 '동굴의 비유'를 또다른 알레고리로 정교하게 재구성한다. 인류는 인위적 기후조절을 시도하다 극한의 빙하기를 맞이하고, 생존을 위해 열차 안에 스스로 갇히고 만다. 첨단기술을 총동원하여 자급자족이 가능한 열차를 제작한 재벌 윌포드는 살아남은 인류의 지배자로서 철저한 계급제도와 우상화에 기반을 둔 지배질서를 정립한다. 열차의 앞부분에서 호화롭게 생활하는 엘리트들은 자신들에게 이익이 되는 이 질서를 옹호하며, 열차 뒷부분에서 빈민으로 살아가는 하층민들은 이 질서의 부당함을 알고 수차례에 걸쳐 혁명을 일으킨다.
그러나 열차의 지배자 윌포드가 혁명지도자 커티스를 만났을 때 고백한 바대로, 열차 안의 모든 사람들은 입장의 차이와 무관하게 모두 '열차에 갇힌 죄수들'이다. 갇혀있는 상태에서 벗어나서도 생존할 수 있을만큼 열차 바깥의 기온이 회복되었다는 사실을 간파한 사람은 열차의 보안시스템 설계자인 남궁민수와 그의 딸 요나뿐이다. 오직 두 사람만이 동굴 바깥의 진리를 알아차리고 있다. 영화의 전체 플롯 안에서 둘은 죄수를 동굴 밖으로 인도해내는 철학자의 역할을 맡고 있다.
오리겐(Origen)과 어거스틴(Augustine)을 비롯한 다수의 고대 기독교 교부들은, 플라톤의 '동굴의 비유'를 기독교의 진리를 변증하는 도구로 애용했다. 이들은 인간의 영혼이 하나님으로부터 수여되는 참된 진리를 알고 그 은혜에 참여하는 사건을, '동굴의 비유'를 통해 존재론적 방식으로 재해석한 바 있다. 그들은 하나님께서 모든 진리의 근원인 태양과 같은 분이고, 동굴에서의 탈출은 영혼이 고달프고 거짓된 현실의 삶에서 벗어나 인간이 영원히 거해야 하는 천국을 향해가는 여정이라고 해석했다.
존 번연(John Bunyan)의 <천로역정(The Pilgrim's Progress)>에서도 이와 유사한 모티프와 플롯이 확인된다. 어거스틴이나 번연 등에게 동굴 밖 진리의 세계는 복음의 진리와 하나님의 은혜가 충만하게 자리잡고 있는 곳이었다. 그러나 영화 <설국열차>에서는 기독교가 동굴 바깥 진리의 자리를 상실하고, 동굴 속 사제들(진리를 기만하는 자들)이 만들어낸 그림자의 하나에 불과한 것으로 묘사된다. 영화는 이런 묘사를 위해 직접적이고 직관적인 방식으로 윌포드 우상화를 그려낸다.
세뇌: 우상화에 의한 지배질서 확립
영화는 철도재벌 윌포드가 우상화되는 장면과 대사들을 반복적으로 보여준다. CW-7(인공적 기온 강하를 목적으로 제조된 냉각제)이 살포돼 빙하기가 도래하기 전 인류가 생존할 공간을 마련했다는 이유로, 윌포드는 열차 내 엘리트들에 의해 예언자적 인물이자 새로운 시대의 창조자로 추앙된다. 그는 '신성하며 자비로운(divine and merciful) 이'로 여겨진다.
열차의 엔진은 현재 살아남은 전 인류의 생존을 책임지고 있다는 이유로 '거룩하고 영원한 엔진(Sacred and Eternal Engine)'으로 불리며, 계급 간 이동이 전적으로 금지되어 있는 열차 내의 계급제도는 '거룩한 질서(Sacred Order)'로 지칭된다. 그러나 윌포드 본인이나 열차의 최고 수뇌부는 윌포드가 CW-7의 사용이나 빙하기의 도래를 미리 알지 못했고, 그가 만든 엔진도 결코 거룩하거나 신성하지 않다는 사실을 알고 있다. 그들이 열차 내 모든 인간들에게 강요한 우상화는 결국 부당한 사회질서에 정당성을 부여하기 위한 고안물에 불과하다.
종교에 대한 이 비판적 묘사는 특히 기독교를 표적으로 삼고 있는 것이 분명하다. 엘리트 계층 어린이들의 세뇌교육 장면에서는 풍금연주에 맞추어 아이들이 합창하는 장면이 나온다. 이 합창은 윌포드 및 신성한 엔진에 대한 칭송과 열차 밖으로 나가면 죽는다는 메시지를 담아내고 있다. 합창 와중에 두 손을 들고 구호를 외치는 장면이나, 풍금을 연주하는 교사의 심취한 표정 등은 우리가 교회 부흥회에서 흔히 볼 수 있는 찬양, 설교, 통성기도 장면들에 대한 패러디로 보인다.
이로써 영화는 기독교에 대하여 다음과 같이 말하는 듯하다. "예수 그리스도는 윌포드와 같이 우상화된 인간일 뿐이며, 그리스도를 기반으로 세워진 교회나 교의는 윌포드가 만든 엔진과 사회질서와 같이 부당한 억압의 도구에 불과할 뿐이다. 교회 지도층이나 신학자들은 그들 자신도 믿지 않는 것을 사람들에게 믿도록 강요하고 세뇌하고 있다." <계속>
◈칼럼니스트의 辯
브리콜라주 인 더 무비(Bricolage in the Movie)란
브리콜라주(bricolage)란 프랑스어로 '여러가지 일에 손대기'라는 의미를 갖고 있다. 이 용어는 특정한 예술기법을 가리키는 용어로 자주 사용된다.
브리콜라주 기법의 쉬운 예를 들어보자. 내가 중·고등학교에 다니던 학창시절에는 두꺼운 골판지로 필통을 직접 만든 뒤, 그 위에 각자의 관심사를 이루는 온갖 조각 사진들(날렵한 스포츠카, 미인 여배우, 스타 스포츠 선수 등)을 덧붙여 사용하는 유행이 있었다. 1990년대에 학창시절을 보내신 분들은 쉽게 공감할 것이다.
이처럼 어떤 의미로든 자기 삶에 연관된 모든 감각적이고 관념적인 재료들을 손에 잡히는 대로 격식 없이 조합하여 하나의 멋진 작품을 만드는 일을 브리콜라주라고 한다. 이 기법은 오늘날 광고나 뮤직비디오, 조형예술, 팝아트(pop art) 등에 자주 동원되며 영화에서도 빈번하게 활용된다.
오늘날의 영화는 삶의 모든 관심사들을 매혹적인 방식으로 조합하여 그려내고 있다. 그 안에는 기독교인들이 환영할 만한 요소와 불편해할 만한 요소들이 정교하고 복잡하게 뒤섞여 있는 경우가 다반사이다. 본 칼럼은 관객들에게 큰 호응을 받은 영화들 속에 뒤섞여있는 아이디어들을 헤아려 보고, 이를 기독교적 입장에서 어떻게 해석하고 평가할 것인지 고민하는 기회를 만들어보려 한다.
박욱주 박사
연세대학교에서 신학을 전공했으며, 동 대학원에서 조직신학 석사 학위(Th.M.)와 종교철학 박사 학위(Ph.D.)를, 침례신학대학교에서 목회신학박사(교회사) 학위(Th.D.)를 받았다. 현재 서울에서 목회자로 섬기는 가운데 연세대 연합신학대학원 겸임교수로 재직하고 있으며, 기독교와 문화의 관계를 신학사 및 철학사의 맥락 안에서 조명하는 강의를 하는 중이다.
필자는 오늘날 포스트모던 문화가 일상이 된 현실에서 교회가 보존해온 복음의 역사적 유산들을 현실적 삶의 경험 속에서 현상학과 해석학의 관점으로 재평가하고, 이로부터 적실한 기독교적 존재 이해를 획득하려는 연구에 전념하고 있다. 최근 집필한 논문으로는 '종교경험의 가능근거인 표상을 향한 정향성(Conversio ad Phantasma) 연구', '상상력, 다의성, 그리스도교 신앙', '선험적 상상력과 그리스도교 신앙', '그리스도교적 삶의 경험과 케리그마에 대한 후설-하이데거의 현상학적 이해방법' 등이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