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Photo : )

 

나는 정치에 별 관심 없는 그저 내 울타리 챙기기 급급하게 사는 시골교회 목사다. 박정희 대통령 통치 시절 대학을 다녔고, 눈치 보며 내 의지와 관계없이 여러 번 집회에 나간 적도 있었다. 한 번은 경찰의 곤봉에 손목을 맞았고 시계(중학교 때부터 차고 다녔던 나에게는 유물과도 같은)가 부서지면서 겨우 위험을 모면하기도 했다. 또 한 번은 경찰이 나를 보며 "너 솔직히 데모하고 싶지 않지?" 하며 행진대열 밖으로 끌어내기도 했다. 이 때 나는 다시 대열로 들어가야 할지 집으로 가야할지 망설이다 결국 집으로 돌아가고 말았다. 억지로 눈치를 보며 흉내를 내는 것은 내 양심이 허락하지 않았다. 데모를 선동하는 리더의 웅변은 항상 귓전만 때렸지, 마음에 동의가 일어나지 않았다. 언젠가 명동을 걷고 있는데 대통령의 딸, 근영이 다가와 "남들은 다 데모하는데 넌 여기서 뭐하니?" 라고 했다. 데모가 진행되고 있는 사실조차 모르고 명동을 누비고 다닌 것이다.

 

나는 당시 이런 나의 분열에 대해 내 스스로 해석하거나 분별할 수 있는 능력을 갖지 못했다. 가끔 장발 단속에 걸려 경찰이 쫓아올 때는 대학 캠퍼스 정문으로 뛰어 들어가 '아저씨'하며 외쳐 부르고 구원을 요청했다. 이 때 대통령 딸의 경호원이 나와서 뭐라고 한 마디만 하면 무마가 되었다. 나는 대통령의 딸과 같은 학교, 같은 과에 다니는 것을 자랑스럽게 생각하며 권력이란 이렇게 좋은 것이구나 생각했다. 늘 위안이 되었던 것은 "나는 예술을 하니까 정치는 나하고 상관없는 일이야"라고 자위하며 도피할 수 있었던 것이다. 나만의 세계에 갇혀 사찰로 또는 다른 좋은 곳으로 외유를 다니며 악상을 구하고 있었고, 멀리서 들려오는 데모의 함성소리는 스트라빈스키(I. Stravinsky)의 불새조곡(The Firebird Suite)으로 연상되었고, 현대음악의 악상으로 스케치 되었다. 데모하며 흥분하는 다른 대학생들을 보면, 다른 나라 사람을 보듯 전혀 그들을 공감하지 못했다.    

그러던 내가 어느 날 목회의 길을 가게 되었다. 갇혔던 나의 의식세계에서 나오고 보니, 나의 과거가 부끄러웠고, 나의 대학시절 증상이 자폐현상이라는 것을 알게 되었다. 자폐는 오직 내가 보기로 한 것 만 보는 것, 오직 나를 중심으로만 우주가 돌아가는 것, 오직 나만 생각하는 나르시시즘의 원형과 같은 것이다. 자폐는 모든 사람들이 어느 정도의 성향을 가지고 있기는 하지만 정도가 심하면 모든 소통을 닫아버리고, 오직 자신을 방어하기 위해 단단한 보호막을 만드는 것이다. 때문에 다른 사람의 이야기를 전혀 듣지도 못하고 들을 수도 없는 것이다. 터스틴(F. Tustin)이라는 정신분석학자는 이 보호막을 조개껍질(shell)이라고 불렀다. 그 정도로 딱딱하다는 것이다. 자폐증에 걸린 사람들에게 주사를 놓으면 주사바늘이 들어가지 않고 부러지고 만다. 딱딱한 캡슐이 그를 덮고 있기 때문이다. 때문에 자폐는 모든 소통을 거부한다. 자신만의 논리와 전능 속에 갇힌 것이다. 대학시절 데모하며 나라를 걱정하는 학생들과 전혀 소통할 수 없었던 내 증상은 일종의 자폐였던 것이다. 오직 내 전공 외에 내 주변에서 일어나는 일에 어떤 관심도 가질 수 없었던 현상이 그것이다. 그리고 지금 나는 이러한 자폐현상을 오늘날 기독교 종교를 통해서 보고 있다. 

오늘날 대부분의 기독교가 이러한 자폐적이고 유아적인 상황에 빠지게 된 이유는 오랜 역사의 산물이다. 정치와 교회의 연합과 분리 과정은 오랜 역사를 가지고 있다. 이스라엘 백성이 사무엘에게 "우리에게도 왕을 주소서"라고 탄원할 때 하나님이 심히 분노하고 걱정하며 이스라엘에게 왕을 허락했다(호13:11). 그 때 하나님의 근심은 오늘날의 정치적 사태들을 예견한 근심이었다. 처음 정교가 분리된 것은 신정정치라는 구심점을 갖고 시작되었다. 과거 선한 정치지도자들은 선지자들의 신탁을 의지하며 제사장과의 유기적인 소통을 갖고 있었지만, 악한 왕들은 결국 그 구심력을 끊어내고 만다. 그  결과 이스라엘은 70년의 '바벨론유수'라는 엄청난 고통을 겪게 된다. 예수님 역시 당시 유대교권과 로마 정치의 복잡한 이해관계에 휘말려 십자가의 죽음을 맞게 된다. 그러나 기독교가 로마의 국교로 인정되고 난 후 교권은 다시 살아난다. 세속 권력의 저항에도 불구하고 교권은 비대해졌고 오만해졌다. 그 결과는 종교개혁으로 이어졌고 이로 인해 세속정치가 교권에서 다시 분리되기 시작한다. 아우구스티누스(S.A Augustinus)는 히브리사상과 헬라사상의 간극을 해결하기 위해 두 사상이 화합하고 소통하는 길을 열었지만 종교개혁은 '오직 믿음'으로라는 슬로건으로 종교를 세속에서 보호하기 위해 소통을 거부하기 시작한다.

그들은 문화가 교회 안으로 들어오는 것을 철저히 거부했다. 쯔빙글리(U, Zwingli)는 심지어 교회에 올겐을 마귀의 도구라 생각하고 도끼로 부수기도 했다. 반면 카톨릭은 반개신교의 전략으로 문화를 적극 수용하였고 개신교는 이를 세속화로 평가절하했다. 기독교의 이러한 고립주의와 경건주의 전략은 계몽주의와 함께 더욱 심화된다. 이후 현대 포스트모던 사상가들의 무신론적 유물론에 의해 세상과 교회의 소통은 완전히 막혀버리게 된다. 그동안 세속은 너무 비대해졌고 교회는 그들의 무신론 영향을 두려워하여 더욱 높게 담장을 쌓아나가야 했다. 이제 수구보수기독교는 세상에 의해 함몰될 것을 걱정하고 더욱 움츠려 자폐적인 현상을 유지해야만 살아남게 되었다. 그러나 이런 자폐라는 방어는 사실 의식적으로 일어나는 것이 아니라 생존하기 위한 '무의식적 반복 작동'인 것이다. 하나님의 영역인 정치를 세상에 내어준 기독교는 세상과 소통할 수 없는 자폐상태에 빠져 저들에게 다가갈 수 없다. 세상은 자폐화된 조개껍질을 발로 차며 '개독교'라고 야유를 해도 전혀 아픔을 느끼지 않는다. 단단한 껍질 덕분인 것이다. 그리고 기독교는 이것을 구원의 방주라고 생각한다. 

자폐란 무엇인가? 엄마의 뱃속에서 나온 유아의 첫 생애를 생각하면 된다. 그들은 자폐로 생애를 시작한다. 박해불안을 느끼는 유아는 자신을 보호하기 위한 자구책으로 자폐껍질을 만들 수밖에 없다. 때문에 유아는 아무것도 보지 않고 아무것도 듣지 않는다. 이런 유아가 서서히 자폐에서 나오기 시작하고 이후 현실에 발을 딛기까지는 또 다른 '잠재적 공간'을 필요로 한다. 잠재적 공간은 놀이터와 같은 곳으로 현실과 환상이 만나고, 주관과 객관이 만나는 장소다. 일종의 완충장치로 현실의 충격을 흡수해 주는 곳이다. 아이들은 이 잠재적 공간에서 여러 가지 도구를 사용한다. 이 잠재적 공간의 경험이 없는 아이는 현실의 두려움을 달랠 수 없어 다시 자궁 속으로 들어가려 할 것이고 이것이 바로 자폐인 것이다. 

성인에게 이 잠재 공간은 문화의 영역이다. 이 문화영역은 넓은 의미에서 이성과 감성이 만나고, 정치, 경제, 사회의 모든 분야가 신앙과 만나는 장소이다. 일반은총 영역과 특별은총이 만나는 장소다. 이질적인 것들의 교집합이 일어나는 장소다. 부분가능도 인정된다. 그러나 교집합이 일어나는 부분을 全部와 全無로 억지 고집하면 놀이판은 깨지고 만다. 이 영역에서는 특별은총의 영역이 침범 받는 것도 아니고 일반은총도 함께 놀지 못할 이유가 없는 곳이다. 이 교집합의 영역에서는 문학도, 학문도, 신학도 그리고 예술도 함께 교류된다. 이 영역에서 놀이와 승화가 일어나지 않는다면, 잠재적 공간은 발달하지 못한다. 이 영역은 대체의 영역이지 원대상의 영역은 아니다. 어쩔 수 없이 원형은 흐려지고 다른 것으로 대체되고 중화되고 타협이 일어난다. 원형을 찾기 위한 몸부림은 근본주의로 치닫게 되고, 그 거룩한 소명의식은 소통의 마비로, 살기(殺氣)로 채워진다. 이러한 살기가 억압되면, 그들은 삶의 공허와 빈곤에 시달리게 된다. 항상 죄책감을 느끼며 하나님이 주신 자유를 누리지 못하고 이 세상을 평가절하하며 죽음 저 너머의 세계로 도피한다. 교회는 세상과 천국의 잠재적 공간의 역할을 해야 하는 곳이다. 교회는 십자가의 고난과 특별계시를 가르쳐야 하지만 일반은총이 들어와 함께 소통하는 영적인 놀이터인 것이다. 이러한 놀이를 못하는 사람은 자폐에 빠지게 되고, 좌우 대립과 종북 빨갱이의 논쟁으로 놀이판을 깨는 사람이 된다.  

그리스도가 닦아 놓은 이 터는 말씀이 화육되어 만들어진 터다. 그 반석의 터는 아무리 이질적인 것이 담겨도 절대로 변하거나 무너지지 않는다. 교회가 견고한 성이 되기 위해서는 여러 이질적인 것들과 다른 사상에 의해서 흔들리는 터가 되어야 한다. 오늘날 세상을 설득하고 그들을 데려오기 위해서는 과거의 전략과 달라야 한다. 고도의 세련된 접촉점을 만들지 않으면, 그들과 유리될 수밖에 없고 복음의 기회는 막히게 된다. 사도바울도 율법 없는 자에게 율법 없는 자와 같이 되고 약한 자들에게 내가 약한 자와 같이 되었다고 했다. 그가 여러 사람에게 여러 모습이 된 그 이유는 아무쪼록 몇 사람이라도 구원하고자 함이요 복음에 참여하고자 함이라(고전9:21-23)고 했다. 흔들리지 않는 터와 벽은 유연성이 없어 결국 무너지게 된다. 일본에서는 지진을 견디기 위해 만들어진 집은 상하 좌우로 흔들리는 집이다. 흔들리는 집은 단단한 집보다 훨씬 더 많은 경비가 든다. 경직되고 독선적이고 다른 사람의 의견을 거부하고 폄하하는 것은 강한 것 같지만 허약한 울타리다. 교집합의 영역에서는 준비된 놀이도구나 게임의 규칙이 없으면 싸움만 벌어진다. 결론은 항상 "저 새끼 죽일 놈"으로 끝나고 놀이판은 깨진다. 민주주의는 놀지 못하는 우리 인간을 위해서 만들어 놓은 선물이다. 어느 누구든 독주하지 못하도록 만들어진 것이 민주주의의 틀이다. 민주의의라는 게임의 룰과 도구는 이질적인 것들의 불협화를 놀이로 승화시키는 도구다. 그러나 대부분의 교회는 이 민주주의 틀에 호의적이지 않다. 근본주의를 추구하는 자폐성향에 더 익숙하기 때문이다.

민주주의는 문화의 영역이다. 이곳에서 정치인들은 놀이하고 때로 싸우지만 타협하고 양보하며 절충안을 찾는다. 좌든 우든 정치인에게 어떤 기대를 갖는 것은 환상일 뿐이다. 모든 인간은 전적으로 부패했기 때문이다. 단지 우리는 민주주의의 틀을 원하는 것이다. 이 틀은 흔들릴 수 있는 틀이다. 이러한 틀이 깨어져 시민들이 흥분한 것이다. 잠재적 공간을 만들어주고 많은 돈까지 주어가면서 놀이하라고 국회로 보냈는데 좌우논쟁으로 싸움박질만 하고 정부 산하조직들에서도 민주주의는 전혀 작동되지 않으니 화가나 시민이 거리로 나온 것이다. 그래서 시민이 대신 놀이하는 것이다. 시민혁명은 법 위에 군림하는 것이 아니라 법이 작동되게 하는 원동력이다. 광화문 촛불집회에는 놀이가 있고 문화가 있다. 징과 꽹과리와 북이 어우러지고 문화공연이 있다. 모두가 한 판 놀이를 벌이고 있는데 오직 기독교인들만이 침묵을 지키고 있다.  

놀이와 문화는 세상과 세속의 간극을 해결하기 위한 잠재공간이다. 대결구도가 소통의 구도로 바뀌는 장소다. 현실과 환상이 만나고, 좌와 우가 만나는 곳이다. 타협이 일어나는 곳이다. 성경이 모든 것을 포괄하고 초월하는 절대기준이라는 이유 하나만으로 그 속에 숨어서 밖으로 나가지 않거나 세상과 소통을 거부하는 것은 직무유기다. 차라리 수도스님처럼 산으로 올라가 가부좌를 틀고 불쌍한 중생들을 내려다 보며 기도할 것이면 굳이 세상에서 높은 담을 쌓을 것이 아니라 산으로 올라가면 되는 것이다. 우리는 지금 중세 수도원에서 살고 있는 것이 아니다. 개인경건에만 머무는 것이 바로 자폐요 이것이 오늘날 기독교에서 일어나고 있는 병리현상이다. 이 병적인 자폐껍질을 깨고 나오기 위해서 시민들은 몸부림치는데 교회는 기도와 회개만 강조한다. 그것도 중요하지만 일어나 나아가 행동해야 한다. 

 

박종서
▲박종서 목사

민주주의는 서로가 서로를 흔들고 흔들릴 줄 아는 놀이인 것이다. 전 세계에서 좌우 빨갱이의 망령이 사라지지 않은 나라는 오직 우리뿐이다. 멸공사상, 좌우논쟁, 음모론으로 계속 놀이판을 깨버리면 우리 모두가 자폐의 혼돈으로 다시 들어갈 수 밖에 없다. 전쟁의 위험도 여기서 올 것이다.

 

우리의 우울함은 마땅히 치루어야 할 대가지만 희망의 징조다. 시민의 놀이터에서 이러한 한(恨)의 정서는 승화될 것이기 때문이다. 결국 회복충동이 올라올 것이고 좋은 일은 일어날 것이다. 교회도 이 시민의 혁명에 어떤 방법으로든 참여해야 한다. 시민들은 앞서가는데 오직 교회만 침묵하며 강 건너 불 보듯 들어오지 못하고 있는 것은 마치 병든 아이가 놀이터에서 놀지 못하고 구경만 하고 있는 모습과 비슷하다. "신앙은 정치와 관계가 없어"라며 신앙의 깊이만 강조하고 현실의 지평을 무시하는 영성은 교회를 깊은 자폐증상에 빠지게 할 수 있다. 우리는 이것에 대해 심각하게 점검해야 한다.

박종서 양지평안교회 목사(평택샬롬나비 문화예술위원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