호세아서부터 시작된 12권을 소선지서라고 부른다. 유대인들은 구약 성서를 계산할 때 12권의 소선지서를 한 권의 책으로 보았다. 그들이 이 책들을 소선지서로 분류한 것은 그 내용이 대선지서보다 부족해서가 아니라 그 책들의 분량이 비교적 적기 때문이었다.
호세아 선지서는 언뜻 읽을 때 이사야서의 축약 같은 느낌이 든다(2:18 etc.). 그러나 그는 이사야 선지자 후에 예언한 것이 아니라 오히려 이사야보다 먼저 예언을 했다. 즉 예언자들 중에서 호세아가 맨 먼저 예언을 한 선지자라는 것이다.
특히 호세아는 이스라엘에 대하여 주로 예언하였고 유다는 잠깐 잠깐 언급하고 넘어갔다. 호세아 선지자는 특히 이스라엘 백성들의 우상숭배 문제와 하나님을 아는 지식이 결여된 문제를 매우 강하게 지적하였다. 그렇다! 타락은 하나님의 백성들 가운데 있는 무지 때문이다. 그러므로 호세아 선지자는 강조한다. “우리가 여호와를 알자! 힘써 여호와를 알자!” 호세아서의 주제는 “오라 우리가 여호와를 참되게 알고 그분께로 돌아가자!”이다. 타락한 백성들이 해야 할 일은 회개하고 참되게 하나님께로 돌아가는 것이다. 호세아서를 통해 우리는 하나님이 얼마나 그분의 백성들을 사랑하시는지, 그분만을 사랑하고 의지하기를 원하시는지 알 수 있다.
또한 군데군데 전후 구절과 관계없어 보이는 호세아의 잠언 같은 말씀들이 들어 있다. 무게 있는 격언들은 여러 말들보다 큰 영향력을 끼친다. 가령 “에브라임은 뒤집지 않은 전병이로다”라는 한 마디로 그들의 치우친 신앙과 잘못된 상태를 지적해 냈다. 예레미아서나 에스겔서에는 호세아서에서 차용한 것 같은 말씀들이 많이 있다(렘 7:34, 16:9, 25:10, 겔 26:13, 겔 16:16 이하, 겔 19:12 등). 또한 호세아서의 구절들을 마태복음이나 로마서에 인용한 것으로 보아 이스라엘 백성들이나 초대 교회 당시 호세아서가 중요하게 읽혀진 것임에 틀림없다(1:10, 11:1).
선지자의 책이라는 말
사도행전 7장 42절을 보면 “이는 선지자의 책에 기록된바”라고 했다. 그리고 이어서 “이스라엘의 집이여 사십 년을 광야에서 너희가 희생과 제물을 내게 드린 일이 있었느냐”라고 했다. 이것은 아모스 5장 25절에 있는 내용을 인용한 말씀이다. 따라서 사도행전에서 스데반이 ‘선지자의 책’이라고 한 것은 엄밀히 말하면 ‘여러 선지자의 책들’, 즉 소선지서들을 가리킨다. 이것은 또한 신약의 사도들 시대에 이미 구약의 소선지서들을 성경으로 간주하고 읽었다는 근거가 된다.
에브라임이라는 말
호세아 당시는 이스라엘이 북조 이스라엘과 남조 유다로 분국이 된 상태였는데, 호세아서는 주로 북방의 열 지파로 구성되어 있는 이스라엘을 향한 예언이다. 유다에 대해 언급한 부분이 1장 7절, 4장 15절, 5장 5절 등에 있지만, 유다는 호세아 예언의 주요 대상은 아니다. 호세아서에서 ‘에브라임’이라는 명칭이 36번이나 언급되는데, 이는 이스라엘을 대표하는 이름이다. 당시 에브라임이 열 지파 중에 가장 강한 지파였기 때문에 이스라엘을 부를 때 ‘에브라임’이라고 부른 것이다. 하지만 ‘이스라엘’이라는 이름도 43회 언급되었다. 그리고 ‘유다’는 14회 언급했다. 또 베냐민과 유다를 통칭하여 ‘유다국’이라고 불렀는데, 이는 유다 지파가 베냐민 지파보다 강성하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호세아서에 예루살렘은 한 번도 언급되지 않았다.
호세아서의 배경
호세아서는 뜻과 순서를 이해하기가 쉽지 않다. 그러나 잘 읽어보면 또 이해하기가 그렇게 어렵지는 않다. ‘호세아’란 히브리어로 ‘여호수아’로서 ‘여호와는 구원이시다’라는 뜻이다. 이것이 원명이고 또 여러 이름이 있다. 호세아서에는 여호와의 구원이 충만하게 나타나 있다. 즉, 여호와께서 배역한 이스라엘에 대해서 ‘구원’이 되심을 나타내는 책이 호세아서라고 할 수 있다. 다니엘서는 유다와 이스라엘이 다 망하고 바벨론으로 끌려간 후에 쓴 책이지만, 호세아는 다니엘보다 훨씬 전인 유다의 웃시야, 요담, 아하스, 히스기야 같은 왕들의 60년에 걸친 재위기간에 예언했다. 이스라엘 왕으로 본다면 주로 여로보암 때 예언한 선지자이다. 호세아와 동시대 선지자로는 이사야, 아모스, 미가가 있다. 그러나 실제로는 이사야보다 조금 일찍 예언한 것으로 보인다.
1절에 나오지만 호세아는 브에리의 아들이고 그의 아내는 고멜이라는 음탕한 여자였다. 그에게는 두 아들과 하나의 딸이 있었다. 호세아서의 문체는 부드럽다. 호세아 선지자 자체가 사랑과 온유로 충만하기 때문이다. 이스라엘이 각 방면에서 타락으로 기우는 것을 보면서 그의 어조가 근심스럽고 우울한 정서로 가다가도 사랑의 하나님을 생각할 때면, 그리고 이스라엘의 장래의 부흥과 회복을 생각할 때면 다시 그 어조가 기쁨으로 바뀐다.
호세아서의 문체는 1장과 3장만 산문체이고 나머지는 운율과 가락이 있는 시어체로 되어 있다. 히브리어로 읽는다면 많은 상징들이 있을 뿐 아니라 매우 사람을 감동시키는 온유한 비유로 되어 있다는 것을 알 수 있을 것이다.
호세아 선지자가 일어났을 때는 이스라엘이 쇠락(타락)하기 시작하고 나라의 상황이 매우 혼란스러울 때였다. 왕과 백성들은 지식을 버리고 우상을 섬기고 음란과 부정을 행하며 죄를 범하고 도적질하고 소동을 일으키고 강탈과 살인과 거짓말과 괴기가 팽배했다. 백성들은 이방인과 섞여서 결혼하고 신하들은 나라를 팔고 자신의 영광을 구하는 등 극도로 혼란스러운 상황이었다. 그래서 하나님은 ‘더 이상 이스라엘은 나의 백성이 아니다!’라고 선포하신 것이다. 따라서 호세아서는 아주 슬픈 내용의 선지서인 것이다.
내용
부정한 아내 고멜을 얻어서 아들 하나 딸 그리고 아들 셋을 낳게 하고 각각 이름을 지어서 하나님의 뜻을 나타내게 하셨다. 첫째 아들 ‘이스르엘’은 이스라엘과 발음은 비슷하지만 그 뜻은 완전히 다르다. 이것은 하나님의 심판으로 인한 ‘하나님의 흩으심’을 뜻한다. 이 이름의 의미는 당시의 예후 왕을 심판하고 이스라엘을 흩어버리게 한 것(앗수르에 포로로 잡혀가게 한 것)을 상징하는 것이다. 호세아의 첫 아들을 이렇게 ‘이스르엘’이라고 한 것은 이스라엘이 하나님의 큰 징벌을 받을 것의 표적이었다.
다음으로 딸을 낳았는데 이름을 ‘로루하마’라고 지으라 하셨다. 이는 긍휼히 여기지 않으시겠다는 말이다. 로루하마가 젖을 뗄 때 아들을 하나 더 낳고 이름을 로암미라고 하셨는데 이는 더 이상 그분이 그들의 백성이 되지 않으시겠다는 포기이다. 이는 고멜이라는 여자, 선지자의 아내의 부정한 것처럼 하나님의 아내인 이스라엘이 부정하게 되었기 때문이다.
2장에 오자 1장의 말씀을 완전히 뒤집고 계신다. 1장에서는 르암미(내 백성이 아니라)라고 하고 로루하마(긍휼히 여기지 않는다)라고 하시고는 2장에서는 돌변하셔서 내가 내 백성을 만들 것이고 내가 긍휼이 여길 것이고 용서해 줄 것이라고 말씀하시는 것이다. 반전에 반전이 거듭되는 것이 호세아의 특징이다. 이것이 또한 복음이다. 복음을 받은 사람들은 인생이 반전된 사람들이다. “내가 나를 위하여 이 땅에 심고 긍휼히 여김을 받지 못하였던 자를 긍휼히 여기며 내 백성 아니었던 자에게 향하여 이르기를 너는 내 백성이라 하리니 저희는 이르기를 주는 내 하나님이시라 하리라”.
3장은 다시 바람이 난 부정한 여인 고멜을 뭘 좀 주고(은 열다섯개 보리 한 오멜 반) 다시 사오라고 말씀하신다. 다시 다른 남자의 아내가 되었으니 속전을 주고 사와야 했던 것이다. 호세아 선지서의 내용의 특징은 사랑과 온유함이 가득하다는 것이다. 죄인들에 대한 ‘구애(求愛)’의 말씀이다. 오죽하면 여기서 ‘allure(꾀다, 매혹시키다)’라는 단어를 썼겠는가? 어떻게 해서라도 그들의 마음을 돌려서 하나님을 사랑하지 않으면 못 견디게 하시겠다는 것이다.
호세아서 4장은 백성들의 죄악상에 대해, 5장은 제사장과 왕족들의 죄악상에 대해 낱낱이 말씀하시며, 6장은 참되게 회개하기를 권면하면서 종교적인 교만을 꾸짖는 내용이다. 4장은 이스라엘이 하나님에 대하여 무지함을 탄식하신다. 내 백성이 지식이 없음으로 망한다고 하시며 ‘하나님을 알자’라는 구절이 많은 것이 호세아의 특징이다.
“여호와를 알지 못하는 까닭이라”. 호세아 선지자는 여호와를 아는 문제를 매우 중요하게 여겼다. 왜 그들이 하나님을 알 수 없었는가? 그들의 심령이 우상숭배에 점유되어 있었기 때문이다. 선지자는 이미 그들이 지식이 없으므로 망한다고 말한 바 있다. ‘음란한 마음’이란 하나님을 떠나 다른 것을 섬기고 신뢰하는 마음이다. 또 하나님과 직접 대하지 못하고 사람의 명령과 조직을 따르는 것을 좋아했다(5:11). 6장은 여호와께 돌아가자고 하며 여호와를 알자고 말한다. 7장은 에브라임이 균형이 잡히지 않은 전병 같다고 하며 이방에 힘이 삼키워졌고 얼룩얼룩하게 혼잡되었다고 말한다. 교만하고 거짓된 것도 있다(1, 10절). 주님을 부르되 성심으로 부르지 않는다고 말한다.
너희가 자기를 위하여 의를 심고 긍휼을 거두라 지금이 곧 여호와를 찾을 때니 너희 묵은 땅을 기경하라 마침내 여호와께서 임하사 의를 비처럼 너희에게 내리시리라
하나님께서 그들에게 권면하고 계신다. 의를 심고 긍휼을 거두라고 하신다. 우리가 힘을 다해 의를 행한다면 주님은 긍휼을 거두게 해주겠다고 하신다. 의를 행하는 자에게 하나님은 긍휼을 베푸신다. 이는 의를 행함에 있어서 약간의 결점이 있어도 용서하시고 후히 대해주신다는 말씀이다. 게다가 묵은 땅을 기경하기까지 한다면 ‘의를 비처럼 내리실’ 것이라고 하셨다.
호세아서에도 복음이 들어있다.
에브라임이여 내가 어찌 너를 놓겠느냐 이스라엘이여 내가 어찌 너를 버리겠느냐 내가 어찌 너를 아드마같이 놓겠느냐 어찌 너를 스보임같이 두겠느냐 내 마음이 내 속에서 돌아서 나의 긍휼이 온전히 불붙듯하도다
성경이란 하나님의 말씀이기 때문에 이해하기가 어렵다. 그렇게 징계와 심판의 말씀을 하시다가도 마음이 순간 돌아서셔서 자기 백성인 에브라임, 이스라엘을 놓지 않으시는 것이다. 어떤 신학자는 ‘사람은 멸하기 위해서 사람을 벌하고 하나님은 그 사람을 고치기 위해서 징계하신다.’고 했다. 하나님이 심판을 하시고 칼이 성읍을 치고 빗장을 깨뜨리게 하시지만 ‘이것이 내가 너희를 버리거나 놓으려는 것은 결코 아니다.’라고 하신다. 이것이 바로 복음인 것이다.
그 가지는 퍼지며 그 아름다움은 감람나무와 같고 그 향기는 레바논 백향목 같으리니
“그 가지는 퍼지며”란 가지가 멀리까지 벋어 나간다는 것이다.
그 그늘 아래 거하는 자가 돌아올지라 저희는 곡식같이 소성할 것이며 포도나무같이 꽃이 필 것이며 그 향기는 레바논의 포도주같이 되리라
“그 그늘 아래 거하는 자가 돌아올지라”. 교회는 피난처 되신 그리스도의 그늘 아래 돌아온 사람들이다. 교회는 뜨거운 사막의 햇볕의 상해로부터 보호해주는 보호막이 있는 곳이다. 어떤 번역은 “저희가 돌아온 그의 그늘 아래 거할 것이다”라고 한다. 결국 호세아서도 복음으로 끝을 맺는다. 우리는 선지자들도 동일하게 복음을 말하고 있다는 것에 놀라움을 금하지 못한다. 특히 14장 4-8절은 복음의 결정판이다.
중요한 구절들 분석
호7장 8절 에브라임이 ... 뒤집지 않은 전병이로다
전을 구울 때 한 면만 구우면 한 면만 지나치게 타서 먹기 어렵게 된다. 어떤 사람은 영적인 생활만 중시하여 땅의 생활을 잃어버리게 하고 어떤 사람은 지상의 생활만 중시하여 하늘의 생활(골3:1, 위에 것)을 잃어버리게 된다. 어떤 사람은 은혜를 중시하는데 의를 소홀히 하며 의를 중시하는 어떤 사람은 은혜가 조금도 없다. 어떤 사람은 객관적인 진리를 중시하지만 성령의 사람 안의 역사를 소홀히 한다. 즉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이미 완성하신 역사를 중시하고 내면의 주관적인 체험만을 소홀한다. 어떤 사람은 생명의 체험을 중시하되 지식을 소홀히 한다. 어떤 사람은 쉽게 한면 만을 보고 전체적인 조망을 보지 못한다. 어떤 한 진리에 치우쳐서 기타 다양한 진리를 소홀히 한다. 하나님이 우리에게 원하심은 한면으로 치우치는 것이 아니라 전체를 중시하는 것이다. 하나님은 우리가 생명이 자라고 지식이 더하게 하며 사랑하는 마음만이 아니라 불의를 미워하는 마음을 갖게 하신다. 뒤집지 않은 전병이 사람의 배고픔을 채울 수 없는 것처럼 한면으로 치우친 신앙의 사람들은 영적으로 배고픈 사람들의 필요를 채울 수 없다. 그러니 성도들은 진리의 한면의 매우 좋은 것만 보지 말고 사역자나 교회의 전체적이고 또 균형잡힌 가르침을 가르치는가를 주의해야 한다. 그렇지 못해서 이단에 빠지는 수가 허다하다.
호4장 6절 내 백성이 지식이 없음으로 망하는도다 네가 지식을 버렸으니 나도 너를 버려 내 제사장이 되지 못하게 할 것이요
그리스도인이 생명의 체험과 추구는 필수적인 것이지만 지식 또한 없어서는 안된다. 물론 생명 없는 지식만 추구하면 교만하게 하고 사망을 풍기게 하지만 그러나 생명의 성장에 있어서 지식은 매우 필요한 것이다. 그러나 생명이 먼저이고 지식이 다음이다. 생명만 있고 지식이 없으면 위험하고 지식은 있는데 생명이 없다면 사망이다. 생명은 반드시 지식으로 부축되어야 한다. 성경은 덕에 지식을(벧후1:5)이라고 하였다. 바울은 “내가 기도하노라 너희 사랑을 모든 지식과 모든 총명으로 점점 더 풍성하게 하사 너희로 지극히 선한 것을 분별하며 또 진실하여 허물없이 그리스도의 날까지 이르고”라고 하였다(빌1:9-10). 사랑을 합당하게 표현하고 실행하려면 지식과 견해가 필요하다. 그런 지식있는 사랑이 사람의 영적 유익을 돕게 된다. 그렇지 않으면 그리스도인이 합당하게 선악과 하나님의 진정한 뜻을 분별못하여 분별없는 사랑으로 사람들을 해치게 된다. 이스라엘 백성이 쉽게 우상숭배에 떨어진 것은 결국 율법에 대한 합당한 지식과 이해의 부족에서 기인되었다고 본다. 오늘 날도 지식없는 소위 영적 생명 체험자들이 이단에 빠지고 치우친 신앙으로 하나님을 떠나는 것은 흔히 볼 수 있는 일이다.
호6장 4절 에브라임아 내가 네게 어떻게 하랴 유다야 내가 네게 어떻게 하랴 너희의 인애가 아침 구름이나 쉬 없어지는 이슬 같도다.
아침 구름이나 이슬은 좋은 것이지만 그것이 쉬 없어지는 것은 아쉬움이다. 한 때 뜨겁게 주님을 사랑하는 사람들은 많다. 그러나 변함없이 사랑하는 자들은 적다. 어떤 특별한 집회나 부흥회 세미나 등을 참석해서 은혜를 받았을 때 하늘로 치솟았다가 1개월도 안되어 푹 꺼진다. 아침 구름이나 이슬 같이 쉬 없어지는 것 같다. 당시 이스라엘이 그렇게 했다. 그들은 고난 중에 하나님께 부르짖고 하나님의 긍휼로 구원을 받고 하늘에 오르고 매우 기뻐하나 얼마 안되어 다시 하나님을 버리고 우상을 섬긴다. 왜 그런가? 원인은 말씀과 지식이 너무 없기 때문일 경우가 크다. 또 신앙의 균형이 없기 때문일 경우가 있고. 처리하지 않는 죄가 있을 것이며 세상에 대한 사랑을 근본적으로 놓지 못하기 때문이다. 또한 처리하지 않은 육체, 천연적인 애정을 처리하지 못한데 있을 것이다. 또한 하나님보다 사람과의 관계를 중시하기 때문에 그러하다. 또한 그런 경우는 대부분 고집이 세고 완강하여 그러하다(호4:16).
요절들
호5:5. 이스라엘의 교만이 그 얼굴에 드러났나니 그 죄악으로 말미암아 이스라엘과 에브라임이 넘어지고 유다도 그들과 함께 넘어지리라
호11:8. 에브라임이여 내가 어찌 너를 놓겠느냐 이스라엘이여 내가 어찌 너를 버리겠느냐 내가 어찌 너를 아드마 같이 놓겠느냐 어찌 너를 스보임 같이 두겠느냐 내 마음이 내 속에서 돌이키어 나의 긍휼이 온전히 불붙듯 하도다
호3:5. 그 후에 이스라엘 자손이 돌아와서 그들의 하나님 여호와와 그들의 왕 다윗을 찾고 마지막 날에는 여호와를 경외하므로 여호와와 그의 은총으로 나아가리라
호14:4-8. 내가 그들의 반역을 고치고 기쁘게 그들을 사랑하리니 나의 진노가 그에게서 떠났음이니라 5. 내가 이스라엘에게 이슬과 같으리니 그가 백합화 같이 피겠고 레바논 백향목 같이 뿌리가 박힐 것이라 6. 그의 가지는 퍼지며 그의 아름다움은 감람나무와 같고 그의 향기는 레바논 백향목 같으리니 7. 그 그늘 아래에 거주하는 자가 돌아올지라 그들은 곡식 같이 풍성할 것이며 포도나무 같이 꽃이 필 것이며 그 향기는 레바논의 포도주 같이 되리라 8. 에브라임의 말이 내가 다시 우상과 무슨 상관이 있으리요 할지라 내가 그를 돌아보아 대답하기를 나는 푸른 잣나무 같으니 네가 나로 말미암아 열매를 얻으리라 하리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