새벽 3시 30분에 잠자리에서 일어나 잠시 기도한 후 바로 북한에 들어갈 채비를 했다. 2013년 9월 4일은 내가 처음으로 북한을 방문하는 역사적인 날이다. 우리가 묵은 연길의 성보호텔 로비에서 찰리 선생님 부부와 이수진 박사님을 만났다. 이분들은 북한에서 북한당국과 제휴하여 제약회사와 학교 의무실 운영, 대체 에너지 개발, 자립영농 프로젝트에 관여하고 있었다. 이 세분이 LA 기독교윤리실천운동의 이수웅 장로님, 서민숙 집사님 그리고 나로 구성된 2013년 방북팀을 동행하며 모든 방북일정을 도왔다. 우리가 탄 밴이 북중 국경에 가까이 갔을 때 과거 2년반동안 수백개의 북한에 관한 기사, 책, 보고서, 사진, 다큐멘터리, 탈북자 인터뷰 등을 보고 읽은 덕분에 내 마음속에 대략 북한에 관한 그림이 그려져 있었지만 내가 직접 경험할 북한의 모습이 어떨까 생각하니 가슴이 마냥 두근거리며 두렵기까지 했다.
우리 일행이 중국 출입국사무소를 통과하여 두만강 위로 난 좁은 다리를 건너고 있었다. 빗방울이 차창을 적실 때 내 뺨에는 눈물이 흘러 내렸다. 어느 방북자가 표현했던 것처럼 "수많은 비밀을 안고 묵묵히 흐르는" 두만강을 보면서 2년전 한국에서 한달간 함께 시간을 보냈던 탈북자들의 증언이 생각났기 때문이었다. 탈북하다 익사한 수많은 시체가 흘러가는 것을 목격했다는 증언, 강을 건너다가 AK-47총으로 무장한 군인들에게 체포되기 직전까지 갔다는 증언 등이 생생하게 내 머리를 스쳐 지나갔다. 나에게 두만강은 북중 국경 사이를 흐르는 단순한 물줄기만이 아니었다. 다리를 중간쯤 통과했을 때 "드디어 북한에 들어섰다"라고 외친 찰리 선생님의 목소리가 나의 생각의 흐름을 멈추게 했다.
어둡고 퀴퀴한 냄새가 나는 북한 출입국사무소를 들어서니 북한 세관원들과 중국인 여행객들의 시선이 모두 우리 일행에게 쏠렸다. 금발의 백인 부부와 19살의 여대생이 낀 방문팀이 신기하게 보였나 보다. 세관 신고서에 소지품으로 디지털 카메라와 성경책을 기록하였다. 외부인이 북한내에 성경을 가지고 들어가고 공개적으로 기도가 허용된다는 두가지 사실이 신선한 충격이었다. 45분쯤 지난 후 30대로 보이는 중간키의 안내원 이씨가 우리를 맞이하였다. 찰리 선생님 부부와 이수진 박사님과는 낯이 익은 사이였다. 안내원 이씨는 미국에서 온 우리 세 사람에게 특별한 관심을 보였다. 이씨에게서 처음 눈에 띈 것은 왼쪽 가슴에 단 김일성 주석과 김정일 국방위원장 배지였다. 간부이든 평민이든 북한에서 만난 사람가운데 이 배지를 달지 않은 사람이 없었다. 찰리 선생님 부인이 말해 주길 이 배지를 달지 않은 사람은 배급을 받을 수 없다고 했다. 북한의 모든 간부들은 김정일 국방위원장의 복사본이었다. 누구나 다 똑같은 인민복을 입었기 때문이었다. 차이가 있다면 그들에겐 위대한 영도자에게 있었던 이중턱이 없다는 점이었다.
여권에 출입국 도장을 찍은 후 소지품 검사에 들어갔다. 세관 신고서를 확인한 세관원이 성경과 카메라를 꺼내라고 했다. 다음 테이블에서 여자 세관원이 내 성경책을 손으로 훑었다. 전단지가 끼어있는지 확인한 것이었다. 카메라도 들여다 보았다. 내 가방을 뒤지다가 아침에 중국 카페에서 먹고 남은 빵 조각을 찾아냈다. 이게 먹는거냐고 묻는 말에 고개를 끄덕였다. 여자 세관원은 내 가방 더 깊은 곳에서 생리대를 발견했다. 이것도 먹는거냐고 물을 때 나는 뭐라고 대답할지 몰랐다. 일을 단순화하기 위해 다시 고개를 끄떡였다. 그 세관원의 표정이 너무 심각하게 보였기 때문에 나는 미소를 감추지 않을 수 없었다. 세관원의 마지막 질문은 USB를 소지했냐는 것이었다. 처음에는 어리둥절했지만 케네스 배씨가 USB 때문에 북한에 억류되었다는 찰리 선생님의 설명이 생각났다. 나는 얼른 고개를 좌우로 흔들었다. 세관원은 나를 잠시 째려 보더니 손으로 통과 표시를 했다. 안도의 숨을 쉬며 뒷쪽 출구로 나왔다. 이제 공식적으로 북한에 들어왔다.
출입국사무소를 떠나 라진으로 향하는 길에서 나는 북한의 때묻지 않은 자연의 아름다움에 압도되었다. 푸르고 청초한 산, 공해나 스모그가 없는 짙은 청색의 하늘이 서서히 그리고 조심스럽게 우리를 환영하고 있었다. 도로가를 걸어가는 북한 주민을 볼 때 나는 1950년대 스탈린 시대로 되돌아간 느낌이었다. 소달구지를 끄는 사람, 구식 삽과 소련식 도끼를 메고가는 사람들 옆으로 신형 아우디, 벤츠, 현대 차가 휙휙 지나갔다. 마치 그들이 역사의 한 시점에 갇혀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라진시에 도착하여 안내원이 제안한 식당으로 점심을 먹으러 갔다. 식사가 정상적으로 나왔지만 조지 오웰이 예언했던 분위기를 식당에서도 느낄 수 있었다. 안내원 이씨는 집중적으로 내게 질문을 했다. 대학교에 다니느냐, 전공이 무엇이냐, 형제가 몇이냐, 미국에 사냐, 북한 음식을 좋아하냐, 정말 19살이냐는 등이었다. 식당에 있는 TV에서 연예 생방송이 나왔다. 그러나 알고 보니 북한에서 매우 인기있는 비디오를 틀어놓은 것이었다. 찰리 선생님 부인이 말하기를 연예인들의 분위기가 많이 변했다고 한다. 전보다 훨씬 짧은 치마를 입고 살을 많이 드러내고 화장도 짙게 할 뿐 아니라 열정과 감정을 넣어서 공연한다는 것이다. 그리고 처음으로 이 그룹에 속한 연예인들의 개인 이름이 공개되었다고 한다. 찰리 선생님 부인은 북한에서 고개드는 서구적 개인주의 현상이라고 평가했다.
우리 일행은 호텔로 안내되었다. 라진항이 내려다 보이는 전망좋은 호텔이었다. 레고 조각처럼 작은 배들이 여기저기 바다위에 떠서 바람에 흔들리고 있었다. 그러나 호텔 외부 어느 곳에도 호텔 간판이 없었고 투숙객은 우리 뿐이었다. 찰리 선생님은 호텔방에도 감청장치가 있으니 말하는 것을 조심하라고 주의를 주었다. 우리 안내원들도 바로 옆방에 자리를 잡았다. 방에서 5분간의 통제되지 않은 시간을 가진 후 우리는 빵공장을 방문하기 위해 로비에 다시 모였다.
우리가 방문한 빵공장은 다른 외부 지원단체에서 운영하는 것이고 LA 기윤실에서 지원하는 빵공장은 바로 옆에 신축중이었다. 우리를 반갑게 맞이한 심 지배인은 허심탄회하고 신뢰감이 가는 여성이었다. 심 지배인 사무실에서 한시간 반 가량 북한정부를 대표한 심 지배인과 LA 기윤실 대표단 사이에 협상이 진행되었다.
서민숙 집사님이 빵공장에 대한 기대, 지원, 기한, 일정 등에 대해 설명하자 심 지배인은 각 조목마다 고개를 끄덕이며 미소를 지었다. 이번에는 심 지배인이 빵공장 건축에 대한 중간보고를 했다. 이어서 상하이에서 라진까지 어떤 방식으로 자동식 빵기계를 운반해 올 것인지, 기계를 작동할 북한 직원들에 대한 작업훈련, 컴퓨터 기술교육, 안전지침 등에 대해 진지하게 협의했다. 협의가 끝난후 심 지배인과 함께 단체사진을 찍었는데 두 영도자의 얼굴이 잘리지 않도록 세심하게 찍었다. 심 지배인의 허락으로 LA 기윤실의 지원하에 건축중인 빵공장 사진을 찍을 수 있었다.
우리 일행이 다른 지원단체의 빵공장에 들어가자 싹싹한 여직원들이 수줍은 미소를 띄며 우리에게 막 구워낸 빵을 건네 주었다. 그들은 한마디도 하지 않았지만 눈에는 우리에 대한 호기심으로 가득 차 있었다. 약간 단 맛이 나는 빵은 정말 맛있었다. 우리가 빵에 대해 좋은 인상을 받자 안내원 이씨가 흡족해 하는 눈치였다.
다음날 심 지배인과 후속 모임을 가진 후, 우리 일행은 작은 탁아소를 방문하였다. 완두콩 깍지 안의 콩알처럼 나란히 누워서 낮잠을 자고 있는 20여명의 3살배기 아이들을 보고 내 마음이 녹아내렸다. 복도 끝쪽에서는 더 어린 아이들이 칭얼대고 있었다. 나는 아이들을 안아보고 사진도 찍고 싶었지만 정중하게 거절되었다. 우리는 오후 몇시간을 제약회사 건물에 연결되어 지어진 찰리 선생님의 조그만 사택에서 보냈다. 우리는 거실에서 미국에서 만든 야찌(Yahtzee)라는 보드게임을 했다. 게임을 시작하기 전 찰리 선생님 부인이 들려준 이야기가 인상적이었다. 전에 다른 대표단이 왔을 때 그들을 수행했던 한 북한 안내원이 게임 규정을 설명들은 후 5분쯤 게임을 하다가 갑자기 다음과 같이 외쳤다고 한다. "이 게임은 자본주의 게임이다. 게임에서 부자는 더 부하게 되고 가난한 자는 더 가난하게 된다!"
우리 일행은 찰리 선생님이 운영하는 제약회사 공장을 방문했다. 이곳에서 약을 제조하여 라진과 선봉 일부에 있는 40여개의 소학교 의무실에 무료로 공급하고 있었다. 학교가 쉬는 공휴일에도 학생들은 아픈 부모나 형제들을 데리고 의무실을 찾아와서 양호사의 도움을 청한다고 한다. 미국인 찰리 선생님 부부는 7년째 북한에 살고 있는데 3년만에 안내원없이 다닐 수 있을 정도로 북한당국의 신임을 얻었다. 그러나 아직도 공장과 관련된 간부들 외에 평민들과는 대화할 수 없다고 한다. 우리도 장마당과 고아원을 방문했을 때 같은 제한을 받았고 호텔이나 식당 종업원과도 기본적인 인사외에 의미있는 대화를 나누지 못한 아쉬움이 있다.
북한에서의 마지막 저녁식사로 라진항에서 잡은 해물로 호텔 주방에서 매운탕을 만들어 주었다. 한참 먹고 있는데 호텔 전체에 전기가 나갔다. 안내원들이 당황해 했지만 이내 그들은 아무일이 일어나지 않은듯 행동했다. 얼마후에 한번 더 정전이 되었다. 찰리 선생님 부부와 이수진 박사님은 이런 상황에 이미 익숙해져 있는 듯 어둠속에서도 계속 식사를 했다.
다시 전기가 들어오자 나는 안내원 이씨와 문씨에게 말을 걸었다. 그들의 가족 상황을 물어보고 북한의 의료제도, 라진에서 발생하는 질병들, 의과대학이 있는지 등에 대해서였다. 그들을 만난후 그렇게 말이 많지 않던 내가 갑자기 열정적으로 의료에 관계된 질문을 하자 그들은 왜 이런 질문들을 하냐고 호기심을 가지고 되물었다. 그래서 나는 다음과 같이 말했다.
"문 안내원님, 제 꿈이 뭔지 아세요? 나는 의사가 되어 북한에 돌아와 가장 소외된 지역에 진료소를 세우고 의료진을 훈련하는 것입니다. 평민들을 만나서 그들의 이야기를 들으며 그들을 치료하고 의사와 간호사를 키워내는 것이 나의 꿈입니다." 평시에 잘 웃지 않던 안내원 문씨가 내 답변을 듣고 갑자기 큰 미소를 지으면서 나에게 진지하게 물었다. "나리양이 의사가 되면 저를 좀 치료해 주실래요?" 그러자 식탁에 둘러 앉은 전 일행이 큰 소리로 한 바탕 웃었다. 그때 식탁 건너편에 앉은 안내원 이씨가 한마디 거들었다. "나리양은 이제 19살밖에 안되는데 북한을 바꾸겠다고 하네요. 난 저렇게 희망차고 결연한 사람은 처음 봤네요."
9월 8일 미국 캠퍼스로 돌아와서 처음 이틀은 기숙사에서 절망감속에 혼자 보냈다. 이 글에서 다 밝히지 못한 여러 가지 일들, 자선사업과 경협사업 사이의 갈등 등 북한의 어려운 상황을 경험한 내가 이곳에서 공부만 하고 있어도 되는가? 어떻게 두 개의 세계가 그렇게도 상반될 수 있을까? 온라인으로 가을옷을 주문하면 이틀만에 캠퍼스에 도착하는 편리함 속에 사는 우리와 너무나 다른 삶을 살고 있는 저들! 강의실에서 유기화학 강의를 들으면서도 강남이나 맨하탄 거리의 활기찬 보행인들과 너무 대조적인 경직되고 어두운 북한주민들, 고아원과 탁아소에서 보았던 왜소한 북한 아이들의 모습이 떠오른다. 지금 당장 학교를 그만 두고 북중 국경 근처의 중국에 살면서 북한을 드나들며 무엇인가 하고 싶지만, 비현실적임을 깨닫는다. 사실 내가 가서 할 수 있는 일이 현재로서는 없다. 아무 기술도 학위도 없다. 그저 가슴이 불탈 뿐이다. 지금은 준비할 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