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합뉴스) 권좌에서 쫓겨난 리비아의 전 독재자 무아마르 카다피가 자신의 고향인 시르테에서 과도정부군의 공격으로 사망하면서 248일에 걸친 리비아 시민혁명이 마침내 승리의 함성과 함께 막을 내렸다.


튀니지와 이집트에서 먼저 타오른 시민혁명의 불꽃이 리비아로 옮겨 붙은 것은 지난 2월15일 리비아 제2의 도시 벵가지에서였다. 지난 2006년 이슬람주의자 집회 때 희생된 14명의 유족들이 벵가지 경찰서 앞에서 인권변호사인 페티 타르벨을 석방해달라며 벌인 작은 시위가 수많은 지지자들을 거리로 이끌어내면서 8개월에 걸친 리비아 내전의 단초가 됐다.


물대포와 최루탄을 동원한 경찰의 강경 진압으로 수많은 시위 참가자들이 체포되고 부상자가 속출했지만, 반정부 시위는 페이스북 등 소셜네트워크 사이트를 타고 이내 지중해 연안의 주요 도시들로 확산됐다.


42년 동안 철권통치를 지속한 카다피 정권은 초동 진압을 위해 정부군과 용병을 동원해 시위대에 직접 총격을 가하기 시작했다.


그러나 시위 확산을 막기 위해 동원한 무자비한 탄압이 오히려 타오르는 불길에 기름을 부었다. 세계 각국에 파견된 리비아의 대사와 외교관들이 자국 민간인에 대한 인정사정 없는 진압에 충격을 받고 정권에 등을 돌렸고, 2월26일에는 유엔 안전보장이사회가 국제형사재판소(ICC)에 `반인도주의 범죄' 행위에 대한 조사를 요구하는 결의안을 채택했다.


별다른 구심점 없이 출발한 반정부 세력은 3월5일 첫 시위가 발생한 벵가지에서 국가과도위원회(NTC)를 발족하며 카다피 정부를 전복시키기 위한 본격적인 내전 태세에 돌입했다. 관망하던 국제사회는 니콜라 사르코지 대통령이 이끄는 프랑스 정부가 NTC를 리비아의 유일한 합법적인 기구로 공식으로 인정한 것을 신호탄으로 개입에 나섰다.


유엔 안보리는 3월17일 카다피군의 민간인 학살을 저지하기 위한 목적으로 리비아 영공에 비행금지구역(NFZ)를 설정하는 결의안을 채택했고, 이틀 뒤 프랑스 공군의 라팔 전투기가 리비아 상공에 출현해 카다피군의 탱크와 병력 수송 차량, 지대공 미사일 발사대, 지휘소 등에 대한 공습을 개시했다.


북대서양조약기구(나토)를 중심으로 일부 아랍 국가들이 참여한 공습이 시작되면서 카다피군의 군사력은 눈에 띄게 위축됐고, 3월23일 NTC가 벵가지에서 임시정부 출범을 공식화하면서 서서히 전세는 시민군쪽으로 기울기 시작했다.


세 불리를 느낀 무사 쿠사 전 외무장관이 영국으로 망명하는 등 최측근 인사들이 하나둘씩 카다피 옆을 떠났다. NTC가 이끄는 시민군은 낡은 무기로 무장한 자원병으로 구성된 오합지졸이라는 평가를 받았지만, 4월부터 8월 하순까지 나토 공군의 엄호를 받으면서 서부의 전략 요충지 미스라타와 북동부 석유 수출항 브레가 등으로 서서히 점령 지역을 넓혀나갔다.


이 과정에서 지난 4월30일 카다피의 아들 사이프 알-아랍과 손자 3명이 나토공군의 공습으로 사망해 카다피 일가 중에서 첫 사망자가 발생했다. 실비오 베를루스코니 총리와 카다피의 개인적 친분, 양국간 긴밀한 경제협력 관계 때문에 머뭇거리던 이탈리아마저도 5월31일 NTC의 본부가 있는 벵가지에 영사관을 개설하면서 카다피와 완전히 결별했다.


또 7월 중순에는 미국과 유럽연합(EU) 주요 회원국들이 참여한 `리비아 연락그룹'이 NTC를 유일한 합법적인 정부조직으로 공식 인정했다.


서부의 전략 요충지인 자위야와 즐리탄을 차례로 접수한 시민군은 마침내 8월21일 수도 트리폴리에 진입한 데 이어 이틀 뒤에는 카다피와 핵심 측근들이 거점으로 삼고 있던 바브 알-자지지야 요새를 함락했다. 트리폴리마저 시민군의 수중에 떨어지자 카다피의 아내 사피아 파르카시와 딸 아이샤, 두 아들인 무하마드와 한니발이 8월29일 사막을 건너 알제리로 망명했고, 카다피군의 최정예 카미스 여단을 이끌던 아들 카미스는 같은 날 트리폴리 근처 타르후나에서 반군의 공격을 받고 사망했다.


정작 카다피 본인의 행적은 묘연한 가운데 고향인 시르테 또는 중부 산악지대에 위치한 도시 바니 왈리드, 사막도시 사바 등에 은신 중일 것이라는 관측만 무성하게 나돌았다. 트리폴리 함락 이후 두 달 동안 지루한 수색과 추격전을 벌이던 시민군은 20일 시르테에 대한 최후의 공격을 가하는 과정에서 카다피가 사망했다고 공식 발표함으로써 무려 3만 명의 목숨을 앗아간 리비아 내전은 막을 내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