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중 전략경쟁이 격화되는 가운데 한국이 과거처럼 양측 사이에서 ‘균형자’ 역할을 하기 어려워졌다는 진단이 제기됐다. 동시에 북한 문제 역시 더 이상 한반도 안보에만 머무르지 않고, 중동의 폭력 사태와 우크라이나 전쟁, 북중러·이란 연대, 한미일 협력 문제까지 연결돼 있다는 분석이 나왔다.
국제한국학회(International Council on Korean Studies, ICKS)가 허드슨연구소(Hudson Institute), 북한인권위원회(HRNK)와 공동으로 4월 30일 워싱턴 D.C. 허드슨연구소에서 개최한 연례회의에서다. 이날 오후 패널에서는 북한의 무기 확산과 권위주의 국가들의 연대, 미중 경쟁 속 한국의 전략적 공간 축소, 한미동맹 재편 문제가 함께 논의됐다.
특히 참석자들은 북한, 중국, 러시아, 이란이 각기 다른 이해관계를 갖고 있지만 자유민주주의 질서와 미국 중심 동맹망에 도전한다는 점에서 점점 더 가까워지고 있다고 분석했다. 이 과정에서 북한은 고립된 약소국이 아니라, 무기와 병력, 군사기술을 제공하며 전쟁과 분쟁에서 실질적 역할을 하는 행위자로 부상하고 있다는 평가가 나왔다. 북한의 무기 확산은 단순한 군사 문제가 아니라 실제 인명 피해와 인간 존엄의 훼손으로 이어지는 인권 문제라는 지적도 제기됐다.
가장 직접적으로 인권과 가치의 문제를 제기한 것은 더글러스 스트루샌드(Douglas Streusand) 해병대대학교·세계정치연구소 연구원이었다. 그는 북한, 중국, 러시아, 이란의 공통점을 전체주의적 통치 구조에서 찾으며, 이들 체제가 인간의 자유와 존엄을 억압하는 구조 위에 서 있다고 지적했다.
스트루샌드 연구원은 이들 체제의 이념이 “궁극적으로 인간을 신의 자리에 놓는 것”이라며, 자유사회가 이 문제를 단순한 전략 경쟁으로만 보지 말아야 한다는 취지로 말했다. 그는 인권과 안보의 연결고리가 지워져서는 안 된다며, 전체주의 체제와 자유사회 사이의 대결에는 도덕적 차원이 있다고 강조했다.
북한 정권의 무기 확산은 외부 세계의 안보를 위협하는 데 그치지 않고, 그 무기와 기술이 사용되는 지역의 민간인 피해와 폭력 확산으로 이어진다는 점에서 인권 문제이기도 하다는 것이다.
브루스 벡톨(Bruce E. Bechtol Jr.) 앤젤로주립대 교수는 북한이 이란의 미사일 능력과 무기체계 구축에 깊숙이 관여해 왔다고 주장했다. 그는 북한과 이란의 군사협력이 1980년대 이란·이라크전쟁 시기 스커드 미사일 거래에서 본격화됐으며, 이후 북한이 이란에 미사일 완성품뿐 아니라 생산시설과 개량 기술까지 제공해 왔다고 설명했다.
벡톨 교수는 이란이 보유한 단거리·중거리·장거리 미사일 능력의 상당 부분이 북한제 스커드, 노동, 무수단 계열 미사일 기술과 연결돼 있다고 봤다. 그는 북한이 이란에 “유럽을 타격할 수 있는 능력”과 “중동 전역을 위협할 수 있는 미사일 능력”을 제공했다는 취지로 설명했다.
그는 또 하마스, 헤즈볼라, 후티 등 이란의 대리세력이 사용하는 로켓과 대전차무기, 소형화기, 터널망에도 북한산 무기와 기술의 흔적이 있다고 지적했다. 벡톨 교수는 2023년 10월 7일 하마스의 이스라엘 공격 당시 사용된 여러 무기가 북한의 중동 확산 네트워크와 무관하지 않다고 주장했다.
윌리엄 뉴컴 전 유엔 전문가패널 위원도 벡톨 교수의 발표를 두고 북한의 중동 무기 확산 문제가 국제사회에서 충분히 주목받지 못하고 있다고 지적했다. 그는 북한이 이란과 그 대리세력에 제공한 무기와 기술이 중동의 폭력 구조를 가능하게 했다며, 그로 인한 인명 피해와 경제적 비용을 더 분명하게 드러내야 한다고 했다.
이는 북한의 무기 확산이 단순히 “북한이 돈을 벌기 위해 무기를 판다”는 차원을 넘어선다는 점을 보여줬다. 북한이 제공한 무기와 기술은 중동에서 실제 폭력과 사망, 민간인 공포를 확대하는 데 기여했고, 이는 곧 북한 정권의 외화 획득 방식이 국제적 인권 피해와 연결돼 있음을 뜻한다.
앤드루 스코벨(Andrew Scobell) 조지타운대 교수는 중국, 러시아, 이란, 북한을 묶는 이른바 ‘CRINK’ 구도를 설명했다. CRINK는 China, Russia, Iran, North Korea의 앞글자를 딴 표현으로, 미국과 동맹국에 도전하는 권위주의 국가들의 연계를 설명하는 틀이다.
스코벨 교수는 이 구도가 아직 공식적인 다자 군사동맹이라고 보기는 어렵지만, 우크라이나 전쟁 이후 네 나라의 전략적 연계가 한층 강화됐다고 분석했다. 특히 러시아가 우크라이나 전쟁에서 군수품 부족과 전력 소모를 겪으면서 북한과 이란의 지원 필요성이 커졌고, 그 결과 북한의 전략적 가치도 높아졌다는 것이다.
그는 북한이 CRINK 구도 속에서 가장 큰 이익을 얻고 있을 가능성이 있다고 봤다. 북한은 러시아에 포탄과 미사일, 병력을 제공하면서 연료, 식량, 현금, 군사기술 지원 등을 얻고 있으며, 중국과는 무역과 관광, 외교적 후원을 통해 체제 생존의 기반을 유지하고 있다는 설명이다.
한일관계도 이 같은 국제 안보 환경 속에서 다뤄졌다. 유키 타츠미(Yuki Tatsumi) 인도태평양안보연구소 연구원은 최근 한일관계가 긍정적 흐름을 보이고 있지만, 이것이 진정한 ‘리셋’인지 과거처럼 일시적 개선 뒤 다시 갈등으로 돌아가는 ‘데자뷔’인지는 아직 판단하기 이르다고 봤다.
타츠미 연구원은 중국의 부상, 북한 위협, 북러·북이란 관계 심화가 한일 양국을 다시 가깝게 만드는 요인이 되고 있다고 설명했다. 또 미국 외교가 동맹을 거래적으로 다루는 경향을 보일수록, 한국과 일본은 서로를 더 필요한 파트너로 인식하게 된다고 분석했다.
한국과 관련해 가장 주목되는 발언은 고든 창(Gordon Chang) 개스톤연구소 연구원에게서 나왔다. 창 연구원은 미중 경쟁이 격화되는 상황에서 한국이 과거처럼 양측 사이에서 ‘균형자’ 역할을 하기는 어려워졌다고 진단했다.
그는 한국이 스스로를 ‘고래 사이의 새우’로 표현해 왔지만, 지금은 미국과 중국이라는 두 거대한 고래가 단순한 경쟁을 넘어 광범위한 전략 대결을 벌이고 있다고 봤다. 창 연구원은 “워싱턴도 베이징도 서울이 균형자 역할을 하도록 허용하지 않을 것”이라며 “양측 모두 한국을 자기 편으로 끌어들이려 할 것이고, 한국의 운신 폭은 훨씬 좁아질 것”이라고 말했다.
창 연구원은 북한이 한국의 평화체제 구상에 호응할 준비가 돼 있지 않다고도 지적했다. 그는 북한이 한국을 향해 지속적으로 적대적 태도를 보여 왔다며, 북한은 서울이 원하는 평화의 파트너가 아니라는 취지로 말했다. 이는 한국 정부가 대북 관여와 평화체제 논의를 추진하더라도 북한의 전략적 태도 변화 없이는 실질적 진전을 기대하기 어렵다는 의미로 풀이된다.
한미동맹의 미래와 관련해서는 기술동맹 문제가 중요하게 다뤄졌다. 트로이 스탠가론(Troy Stangarone) ICKS 연구원은 반도체, AI, 사이버, 양자기술, 바이오, 에너지 기술이 더 이상 경제 영역에만 머물지 않고 군사·안보와 직결되는 이중용도 기술이 됐다고 설명했다.
그는 과거에는 한국이 안보는 미국, 경제는 중국에 기대는 구조를 말할 수 있었지만, 이제는 기술 자체가 경제와 안보를 동시에 좌우하기 때문에 그런 이분법이 유지되기 어렵다고 봤다. 특히 중국은 단순히 미국과 한국, 일본 기업과 경쟁하려는 것이 아니라 이들을 대체하려 한다고 진단했다.
스탠가론 연구원은 삼성과 SK하이닉스 등 한국 기업이 AI 시대 핵심 부품인 고대역폭메모리(HBM) 분야에서 중요한 위치를 차지하고 있다는 점도 강조했다. 그는 미국의 AI 생태계와 한국의 반도체 역량이 서로 깊이 연결돼 있다며, 한미 양국이 공급망, 사이버보안, 공동 연구개발, 디지털 플랫폼, 방산 분야 상호운용성에서 더 긴밀히 협력해야 한다고 밝혔다.
패트릭 크로닌(Patrick Cronin) 허드슨연구소 연구원도 한미 기술협력이 단순한 반도체 협력을 넘어 미래전 기술로 확대돼야 한다고 봤다. 그는 드론과 AI 기반 전장, 이른바 지능화된 전쟁 양상이 빠르게 부상하고 있다며, 한미 기술동맹이 이런 변화에 어떻게 대응할지 더 구체적인 논의가 필요하다고 했다.
전시작전통제권 전환과 동북아 지휘체계 재편도 주요 쟁점이었다. 브루스 클링너(Bruce Klingner) 모린 앤 마이크 맨스필드 재단 연구원은 전작권 전환 자체가 한미동맹 해체를 의미하지는 않지만, 반드시 조건 기반 접근을 유지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그는 전환 기준을 낮춰 정치적으로 서두를 경우 실제 위기 상황에서 위험한 결과가 생길 수 있다고 우려했다. 또 전작권 전환 이후 한미연합사와 유엔군사령부의 지휘 책임을 명확히 구분해야 한다고 지적했다.
클링너 연구원은 한반도와 대만해협에서 동시 위기가 발생할 가능성까지 고려하면, 인도태평양사령부의 광범위한 책임과 동북아 지휘구조를 다시 검토해야 한다고 했다. 다만 동북아사령부 신설이나 미군 전력 재배치 문제는 한국과 일본의 역사적 민감성, 대만 유사시 개입 문제, 병력과 탄약 배분 문제까지 함께 고려해야 한다고 설명했다.
그는 결론에서 한미동맹의 본질이 거래가 아니라 신뢰와 가치에 있다고 강조했다. 클링너 연구원은 워싱턴의 한국전 참전기념비에 담긴 정신을 언급하며 자유는 공짜가 아니며 늘 지켜져야 한다고 했다. 이어 동맹은 거래적 관계가 아니라 공유된 가치와 원칙, 목표 위에 세워진 관계라고 밝혔다.
데이비드 맥스웰(David Maxwell) 아태전략센터 부대표는 6자 회담 전망과 관련, 북중러 밀착 구도가 강화된 상황에서 과거의 구도를 되살리기는 어렵다며, 현재 구도는 사실상 ‘3대3’ 대립에 가까울 수 있다고 봤다.
맥스웰 부대표는 한국이 미중 사이에서 선택을 요구받는 상황이 올 수 있다며, 한국 정치권이 그 위험을 과소평가해서는 안 된다고 강조했다. 그는 또 기술협력과 관련해 조선업을 중요한 분야로 꼽으며, 한국과 일본의 조선 역량이 미국의 방위산업 기반 회복과도 연결될 수 있다고 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