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 세상에는 두 종류의 지식이 있다. 머릿속에 머물며 스스로를 만족시키는 ‘죽은 지식’과, 손끝과 입술을 거쳐 타인의 영혼을 깨우는 ‘살아 있는 지식’이다.
변화경영 전문가였던 故 구본형 선생은 “알기 때문에 쓰는 것이 아니라 쓰기 때문에 아는 것이다”라고 설파했다. 또 현대물리학의 거장 아인슈타인은 “6살 아이에게 설명할 수 없다면, 그것을 제대로 이해한 것이 아니다”라고 경고했다.
2. 이 두 문장은 단순히 학습법에 대한 조언이 아니다. 진리를 다루고 하나님 말씀을 대언해야 하는 설교자들에게는 더할 나위 없이 뼈아픈 교훈이자 실천적 지침이 된다.
많은 설교자가 ‘충분히 묵상했으니, 다 알고 있다’는 착각에 빠지곤 한다. 그러나 막상 백지 앞에 앉으면, 생각의 파편들이 흩어지는 것을 경험한다. 구본형 선생 말처럼, 인간의 사고는 기록이라는 물리적 행위를 통과할 때 비로소 구조화되고 명료해진다.
3. 성경은 기록의 중요성을 반복 강조한다. 하나님께서는 선지자 하박국에게 이렇게 명령하셨다. “너는 이 묵시를 기록하여 판에 명백히 새기되 달려가면서도 읽을 수 있게 하라(합 2:2)”.
기록되지 않은 영감은 안개와 같다. 설교자가 책상 앞에 앉아 고통스럽게 펜을 움직이며 문장을 가다듬는 과정은 단순히 원고를 만드는 행위가 아니라, 자기 안에 모호하게 흩어져 있던 하나님 말씀을 비로소 ‘제대로 알아가는’ 성화의 과정이다.
4. 쓰지 않는 설교자는 자신이 무엇을 모르는지조차 알지 못하는 상태에 머물게 된다. 내가 매일 적어도 한 편의 글이라도 쓰는 이유가 바로 거기에 있다.
아인슈타인이 강조한 ‘6살 아이’ 비유는 지식의 깊이를 측정하는 척도이다. 흔히 설교자들이 어려운 신학적 용어나 추상적 수사 뒤로 숨는 이유는, 사실 그 주제를 완벽하게 장악하지 못했기 때문인 경우가 많다.
5. 진정으로 진리를 꿰뚫은 사람은 복잡한 것을 단순하게 만드는 능력을 갖춘다. 예수님의 비유를 보라. 그분은 ‘천국’이라는 거대한 신비와 영생의 원리를 설명하실 때, 겨자씨, 보물찾기, 그물질 같은 당대 아이들도 이해할 수 있는 일상의 언어를 사용하셨다.
“예수께서 이 모든 것을 무리에게 비유로 말씀하시고 비유가 아니면 아무것도 말씀하지 아니하셨으니(마 13:34)”.
6. 수년 전, 페북 친구인 지인 목사가 자신의 설교문을 읽은 사모로부터 들은 잔소리 내용을 올려놓은 것을 보았다. “오빠, 또또 어려운 말 쓰지 말고 알아듣기 쉬운 말로 설교해!”
설교자가 자신의 지식을 뽐내기 위해 어려운 말을 선택한다면, 그것은 성도들을 소외시키는 일이 된다. 청중이 이해하지 못하는 설교는 설교자의 불성실 혹은 이해 부족의 산물이다.
7. 지난 토요일, 성경을 전공한 한 신학교 교수로부터 부탁을 받았다. 다음 주일날 대형교회에서 설교해야 하는데, 설교문 좀 봐달라는 것이었다.
대구에서 설교를 마치고 올라오는 길에 KTX 안에서 그 교수가 보낸 설교문을 읽어보았다. 역시 성경을 가르치는 교수답게 본문에 대한 설명으로 가득 찬 내용이었다. 읽기도 힘들고 듣기도 힘든 설교문이었다. 30분간 그 설교를 집중해 들을 성도들은 거의 없을 것 같았다. 내가 해줄 최선의 조언은 감동적 예화 하나라도 첨가하라는 것이었다.
8. 학자들은 자신의 학문적 지식을 글이나 강의나 설교 속에 드러내는 것을 업으로 하는 사람들이다. 하지만 아인슈타인 말대로, 내가 알고 깨달은 지식을 어린아이에게도 설명할 수 있을 만큼 쉽고 명확하게 정제해서 전달하는 것, 그것이 진정한 겸손이자 실력이다.
‘지식(Knowledge)’이 ‘경험(Experience)’을 통과하여 ‘말(Speech)’과 ‘글(Writing)’과 ‘설교문(Sermon)’으로 터져 나올 때, 그것은 비로소 ‘간증’이 되고 ‘생명력 있는 메시지’가 된다.
9. 사도 요한은 진리를 선포할 때 이렇게 고백했다.
“태초부터 있는 생명의 말씀에 관하여는 우리가 들은 바요 눈으로 본 바요 자세히 보고 우리의 손으로 만진 바라(요한일서 1:1)”.
설교자는 단순히 성경 주석을 요약해 전달하는 중계업자가 아니다. 텍스트로 된 지식이 설교자의 치열한 삶의 현장에서 경험이라는 용광로를 거쳐, 다시 글과 말로 재탄생해야 한다.
10. 말하고 쓰지 않는 지식은 흘러가지 않는 샘처럼 자기 안에 갇혀 부패한다. 하지만 내 삶의 고백을 담아 쓰고, 그것을 타인을 위해 쓰고 말하기 시작할 때 그 지식은 비로소 누군가를 살리는 능력이 된다.
결국 “말하고 쓰지 않으면 제대로 알고 있다고 할 수 없다”는 말은, 나를 비롯한 모든 설교자들에게 ‘표현의 책임’을 묻는 따끔한 회초리이다.
11. 배우고 익혀서 알고 습득한 시간보다 써본 시간이 적다면, 우리는 아직 진정한 ‘아는 단계’에 이르지 못한 것이다.
성도들은 설교자의 머릿속에 든 지식을 들으러 오는 것이 아니라, 그 지식이 설교자의 삶과 체험을 통해 어떤 글과 말로 체현(體現)되어 나타나는지를 들으러 온다.
그러니 쓰고 말로 전달하기를 즐기라. 가능하면 쉽게 말이다. 그러면 알게 될 것이다.
12. 그러면 비로소 자신이 알고 있는 지식이 참 자신의 지식이 되는 것을 알게 될 것이다.
“말씀이 육신이 되어 우리 가운데 거하시매(요한복음 1:14)”.
신성욱
크리스찬북뉴스 편집고문
아신대학교 설교학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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