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시진핑 중국 국가주석이 러시아의 제2차 세계대전 전승 80주년 기념 행사에 참석하기 위해 7일 모스크바에 도착했다. 이번 방문은 나흘간 일정으로 진행되며, 시 주석은 블라디미르 푸틴 러시아 대통령과의 회담을 비롯해 붉은광장에서 열리는 대규모 군사 퍼레이드에 함께 참석할 예정이다. 두 정상의 나란한 행보는 양국의 전략적 밀착을 상징적으로 보여주는 장면으로, 세계의 시선이 모이고 있다.
시 주석은 러시아에 도착하기에 앞서 러시아 관영지 '러시안 가제타'에 기고한 글에서 중·러 관계의 역사적 뿌리를 강조했다. 그는 양국이 "2차 세계대전에서 함께 피를 흘리며 싸운 우정으로 연결돼 있다"며, "80년이 지난 지금도 일방주의와 패권주의, 횡포와 괴롭힘이 국제사회에 심각한 해악을 끼치고 있다"고 언급했다. 시 주석은 미국을 직접 거론하지는 않았지만, 최근 들어 강화되는 미중 갈등을 의식한 듯 미국의 국제질서 주도권에 대한 견제 메시지를 분명히 했다.
시 주석은 같은 날 오후 모스크바 브누코보-2 공항에 도착해 발표한 성명에서도 "중국과 러시아는 정의로운 세계 질서를 수호하고, 패권주의에 맞서기 위해 힘을 합칠 것"이라며 강한 공조 의지를 밝혔다. 이 발언은 도널드 트럼프 전 미국 대통령의 재집권 가능성을 염두에 두고 미국을 견제하는 공동 전선을 시사한 것으로 해석되고 있다.
시 주석의 이번 방러 일정은 단순한 반미 연대 이상의 복잡한 외교 셈법이 깔려 있다는 분석이 제기되고 있다. 특히 러시아가 우크라이나와의 전쟁을 3년 이상 이어가고 있는 가운데, 유럽연합(EU)은 우크라이나를 지지하며 '평화유지군' 파견 등 러시아 견제 방안을 논의하고 있다. 이런 상황에서 시진핑 주석의 러시아 방문은 유럽의 시선을 곱지 않게 만들 가능성이 높다.
실제로 시 주석은 방러 직전인 6일, "건강하고 안정적인 중국-EU 관계"를 강조하며 유럽의회 의원들에 대한 기존의 제재를 해제하는 조치를 내렸다. 이는 중국이 미국과의 무역 갈등 속에서 유럽과의 관계 개선을 추진하고 있다는 신호로 해석된다. 전문가들은 시 주석의 외교 행보가 푸틴과의 공조를 강화하는 동시에, 유럽을 향한 우호적 제스처도 함께 고려한 '다층적 외교 전략'이라고 보고 있다.
중국은 트럼프 전 대통령이 주도했던 관세 전쟁 이후 미국과의 관계가 악화된 상태에서, EU를 새로운 무역 파트너로 끌어들이려는 노력을 지속하고 있다. 특히 미국 내 보호무역주의 강화로 수출 길이 좁아진 상황에서, 중국은 유럽을 대상으로 수출 시장을 확대하려 하고 있다. 이에 따라 중·러 밀착이 유럽과의 관계에 미칠 부정적 영향을 최소화하는 것이 중국 외교의 과제가 되고 있다.
뉴욕타임스(NYT)는 시 주석이 푸틴 대통령과 나란히 붉은광장에 선 장면은 러시아에 대한 중국의 간접적인 지원으로 비칠 수 있으며, 유럽 내 반중 정서를 자극할 가능성이 있다고 분석했다. 이와 같은 행보는 중국이 유럽과의 무역 및 외교 관계 회복을 시도하는 과정에서 역효과를 낳을 수도 있다.
워싱턴의 유럽정책분석센터(CEPA) 수석 연구원 마티유 불레그는 "시진핑의 방러는 상징이 실질을 압도하는 사례"라며, 외견상 친밀한 양국 관계 뒤에는 복잡한 전략적 계산이 숨어 있다고 설명했다. 그는 5일 열린 CEPA 화상 세미나에서 "중국과 러시아는 협력자이지만 동시에 잠재적 경쟁자가 될 수도 있다"며, 이번 정상회담의 결과보다 후속 이행이 중요하다고 강조했다.
불레그 연구원은 특히 "중국으로 향하는 '시베리아의 힘 2' 가스관 건설이 벌써 10년 전에 제안됐지만, 아직 실현되지 않고 있다"고 지적하며 양국 관계의 실질적 진전이 그리 간단하지 않다는 점을 환기시켰다.
한편 라트비아의 전 내무장관은 시 주석의 이번 방러가 트럼프의 관세 전쟁으로 인해 대서양 동맹이 흔들리는 와중에 이뤄졌다고 분석했다. 그는 "중국과 EU 관계가 전반적으로 개선되고 있는 시점에서 시진핑의 방러는 전략적 메시지 이상의 상징적 행보로 봐야 한다"고 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