백종근 목사의 저서 『예수와 함께 조선을 걷다』는 1896년 남장로교 선교사로 조선에 파송되어 전주와 군산 그리고 목포를 비롯한 호남지역에서 평생을 보내며 이 지역의 유무형의 선교 인프라를 깔아 호남선교의 토대를 마련한 하위렴 선교사의 선교 일대기를 수회에 나누어 본지에 싣기로 한다.
스테이션 조성사역
하위렴 선교사의 다양한 사역은 의료, 복음, 교육을 넘어 스테이션 조성공사에도 미치고 있었다. 전주 선교지부로 사용하던 은송리 일대 완산 언덕의 땅이 왕실 소유로 밝혀지면서, 왕실에서 그 땅을 다시 매입하겠다는 의사를 밝혀오자 선교부를 이전하지 않으면 안 되는 상황이었다. 완산 언덕에 있던 스테이션을 되팔고, 다시 스테이션을 옮겨 조성하는 사업은 그 당시에 누구도 쉽게 해낼 수 없는 사역이었으나, 하위렴의 다양한 은사와 추진력 덕분에 가능한 일이었다.
1902년 화산 스테이션 자리에 건축한 지금의 전주 예수병원의 토대가 되는 진료실과 병동은 해리슨의 설계와 그의 탁월한 아이디어로 가능했던 기념비적 사업이었다. 그는 이어서 선교사 숙소 건축까지도 도맡아 완공하고, 1902년 자신이 건축한 새집으로 입주했는데 앞에서 언급한 대로 그의 집은 신흥학교가 시작된 모태가 되기도 했다.
아내 데이비스의 죽음
하위렴 선교사가 자신이 건축한 선교사 주택에 입주하고 나서 그 이듬해인 1903년 이른 장마가 시작되던 6월 초순 데이비스는 몸에 이상을 느꼈다. 한기가 들면서 고열이 나자 처음에는 감기몸살로 알고 약을 먹었으나 전혀 듣지 않았다. 3일째 되는 날 그녀를 찾아온 잉골드가 곧바로 그녀의 피를 채혈해 검사한 결과 발진티프스에 확진되었음이 판명되었다.
순회 전도하며 만난 사람들을 통해 감염된 것으로 짐작되었으나 국내에서는 쉽게 약을 구할 수가 없었다. 잉골드는 치료를 위해 백방으로 시도해보았으나 허사였다. 데이비스는 열흘 동안 심한 고열로 시달리다 안타깝게도 그해 6월 20일(음력 5월 15일) 기린봉 위로 보름달이 환하게 비치던 초여름 밤, 겨우 41세의 젊은 나이로 눈을 감았다. 그녀의 죽음은 하위렴은 물론 내한 선교사들과 교인들에게 엄청난 충격을 주었다.
어린 시절부터 선교사를 꿈꾸었던 그녀는 하위렴이 내한하기 4년 전 1892년 11월 남장로교 개척선교사로 내한하여 서울과 군산, 전주에서 여성과 어린이 사역에 매진하다가 짧은 삶을 마감하고 말았다. 그녀의 선교 열정은 주변 선교사들 사이에서도 칭송을 받을 만치 적극적이었다. 선교사들과 교인들은 한결같이 그녀를 일러 '생명을 바쳐 선교한 여장부'라고 하면서 오열했다. 전주에서 전킨의 주례로 천국 환송예배를 드리며 그녀의 죽음을 애도했다.
"얼마 안 되는 우리 내한 선교사들 가운데 한 생명을 이 땅에서 잃는다는 것이 얼마나 마음 아픈 일인지 말로 다 할 수가 없습니다. 그녀를 먼저 보내지만, 내한 남장로교 선교사 여러분과 그동안 외로움과 고난을 인내해 오며 함께 만들어 온 뜨거운 우정과 사랑은 쉽게 사라지지 않을 것입니다".(각주 2)
무엇보다 짧은 결혼생활에 사랑하는 아내를 잃은 하위렴의 충격은 말로 할 수 없었다. 엎친 데 덮친다던가 켄터키에서 들려온 연로하신 아버지의 황망慌忙한 부음까지. 하위렴은 거의 탈진상태가 되어가고 있었다. 선교를 향한 일념으로 조선에까지 달려왔건만 '주의 부르심에 대한 응답이 꼭 선교사이어야만 했던가'라는 데까지 생각이 미치면 심란해지기도 했다.
하위렴의 심신은 극도로 허약해지고 있었다. 주변의 동료 선교사들은 그가 의욕 상실에 빠질까 염려해 중국에 보내 잠시 안정을 취하도록 했다. 중국 선교부(각주 3) 견학이라는 명분으로 그해 여름 중국을 여행하는 동안 하위렴은 상처喪妻의 아픈 마음을 달래기도 했다.(각주 4)
한껏 고조되고 있던 전주지부의 분위기가 데이비스의 죽음으로 말미암아 일순간에 가라앉고 말았다. 공교롭게도 군산지부의 사정도 전주와 매한가지였다. 1901년 드루 선교사가 이미 건강 문제로 미국으로 돌아갔고, 그의 후임자 알렉산더마저 그의 부친의 사망으로 잇달아 귀국하지 않으면 안 되는 상황이 발생했던 데다 안타깝게도 1903년 4월 생후 20일이 지난 전킨의 아들 프란시스까지 연달아 사망하자(각주 5) 전킨 선교사를 포함한 군산지부 역시 침체의 늪을 벗어나질 못하고 있었다.
내한 선교부에서는 전주지부는 물론 군산지부에 대해서도 일단 새로운 대안을 마련해야 했다.
제 5 장 탁류의 선창에 복음의 닻을(1904-1908)
상처(喪妻)의 아픔을 딛고 군산으로
내한 선교부에서는 일단 하위렴과 전킨의 사역지를 서로 교체시킴으로써 분위기를 쇄신하고자 했다. 이런 이유로 해서 마침내 1904년 9월 전킨은 군산을 떠나 전주로 가고, 하위렴은 전주를 떠나 군산으로 오게 된다.
새롭게 부임한 군산이었지만 하위렴에게 군산은 전혀 낯설지 않았다. 궁말 스테이션에서 내려다보던 포구와 개펄 위로 펼쳐진 억새와 갈대의 군락, 비상하는 철새들이 보여주는 군무의 장관은 데이비스를 만나던 그 겨울(1896.12-1897.2)의 아름다운 기억으로 오버 랩이 되고 있었다. 탁류가 흐르는 시골 포구의 적막한 풍광이 눈 앞에 펼쳐지면서 그녀와의 추억이 몽환夢幻처럼 피어올랐다.
1897년 가을 다시 전킨의 초대로 군산에 내려갔다. 테이트와 벨도 빠질세라 엽총을 챙겨 들고 함께 왔는데 우리는 야생 오리를 사냥하기 위해 개펄로 이어지는 길을 따라서 갈대가 우거진 풀숲에 몸을 숨겼다. 사냥에 익숙했던 그들 앞에서 보란 듯이 오리를 떨어뜨렸던 그날의 기억에다, 데이비스가 자신의 청혼을 받아주던 황홀했던 그 순간이 떠올랐다.
다음 날 저녁 그녀가 버터를 발라 감자와 함께 목탄 오븐에 구워낸 오리요리는 최고였다. 지금까지 먹어본 어떤 요리보다도 맛이 있었다. 밤이 깊어지면서 사방이 적막해지고 있었지만, 토담을 넘어 불어오는 쌀쌀한 초겨울의 바람마저 한기로 느껴지지 않을 만큼 훈훈한 밤이었다. 하위렴은 데이비스와 추억이 담긴 군산을 누구보다도 사랑했다.
각주
1. 사진 중앙의 한옥이 예수병원이고 주변에 선교사 주택들이 보인다.
2. W. M. Junkin, "Appreciation", The Missionary, Sep. 1903, pp. 424
3. 1902년 당시 남장로교 해외선교부 산하에는 7개 국가(브라질, 중국, 멕시코, 일본, 쿠바, 콩고, 한국)에 9개의 선교부와 47개 스테이션을 운영하고 있었다. 그 당시 중국에는 절강(浙江) 선교부(1867)와 강소(江蘇) 선교부(1872) 등 2개의 선교부가 있었고, 각 선교부에는 5개의 스테이션을 두고 있었다. 그 후(1918) 산동(山東)지역에 선교부가 추가되면서 중국에는 3개의 선교부가 있었다.
4. Report of the Southern Presbyterian Misson in Korea, (1903), pp. 32
5. 전킨은 이미 1894년 겨우 돌이 지난 아들 조지를 잃었으며, 1899년에는 생후 2개월 된 아들 시드니마저 잃었다.
백종근 목사는 한국에서 공과대학과 대학원을 마치고 산업연구원(KIET)에 책임연구원으로 근무하다 미국에 유학 후 신학으로 바꿔 오스틴 장로교 신학교(Austin Presbyterian Theological Seminary)에서 M.Div 과정을 마치고 미국장로교(PCUSA)에서 목사가 되었다. 오레곤(Portland, Oregon)에서 줄곧 목회 후 은퇴해 지금은 피닉스 아리조나(Phoenix, Arizona)에 머물고 있다. 지난 펜데믹 기간 남장로교 초기 선교역사에 매몰해 『하나님 나라에서 개벽을 보다』와 『예수와 함께 조선을 걷다』 두 권의 저서를 냈으며 그 가운데 하위렴 선교사의 선교 일대기를 기록한 『예수와 함께 조선을 걷다』는 출간된 지 일 년도 되지 않아 스탠포드 대학 도서관 Koean Collection에 선정되어 소장되기도 했다. 백종근 목사는 하위렴 선교사 기념사업회를 설립해 미국과 한국에서 설교와 지역 교회사 세미나를 인도하기도 했다. 최근에도 남장로교 선교사들의 자료를 정리해 집필 중에 있으며 한편 디아스포라 선교역사 연구회를 결성해 미주 한인 교회 역사를 찾아보는 일에 시간을 보내고 있기도 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