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성 커플에게도 건강보험 피부양자 자격을 인정해야 한다는 법원의 첫 판결이 나왔다. 동성 커플인 소모 씨가 건강보험공단을 상대로 낸 소송에서 서울고법 행정1-3부는 소 씨의 손을 들어줬다. 재판부가 동성간 결합을 '사실혼'으로 인정하는 건 아니라고 하면서도 본질적으로 부부와 다를 바 없다고 한 판결 내용이 논란의 불씨가 되고 있다.
원고 소 모씨는 지난 2019년 동성인 김 모 씨와 결혼한 후 이듬해 2월 직장 가입자인 김 씨의 피부양자로 등록했다. 당시 건강보험공단 측은 "동성 커플이어도 피부양자 등록이 가능하다"며 받아줬다. 그런데 이런 사실이 언론에 보도되고 논란이 일자 돌연 소 씨의 자격을 박탈했다고 한다.
이에 반발한 소씨가 소송을 냈으나 1심에서 패소했다. 1심 법원은 "동성인 두 사람 관계를 '사실혼'으로 볼 수 없다"는 이유로 건보공단의 손을 들어줬다. 그러나 2심 재판부는 "건보 피부양자 제도는 경제 능력이 없어서 직장 가입자에게 생계를 의지하는 이에게 보험을 적용하는 것"이라며 동성 커플이라도 건강보험 피부양자 자격을 인정해야 한다"며 소 씨의 손을 들어 줬다.
이번 재판의 핵심은 동성 커플을 '사실혼'으로 볼 수 있느냐 없느냐에 있다. 그런데 1심과 2심 모두 '사실혼'으로 인정하지 않았다. 그런데 판결이 정반대로 나온 건 1심이 건강보험 피부양 자격에 있어 '사실혼' 유무를 따진 반면에 2심은 '사실혼'이 아니라고 하면서도 '사실혼'이나 다름없다는 다소 모호한 논리를 적용했기 때문이다.
2심이 '사실혼'이 아니라면서 '사실혼'과 다르지 않다고 한 근거는 "정서적·경제적 생활공동체"라는 데 있다. 가족이 아니지만 서로 정서를 공유하며 함께 경제생활을 하는 사이라는 건데 그걸 '사실혼'과 다르지 않다고 한 재판부의 논리에 수긍할 사람이 몇이나 될지 모르겠다. 그렇게 따지면 부부가 아니더라도 친구나 지인 등 한 공간에서 거주하며 정서적 경제적 공동체를 이루고 사는 사람 모두에게 똑같은 자격을 줘야 맞다.
그런데 재판부가 이런 좀체 이해가 안 되는 논리를 댄 이유가 있었다. "성적 지향을 이유로 차별해선 안 된다"는 부분이다. 2심 재판부는 "누구나 소수자일 수 있고 그 자체로 틀리거나 잘못된 것일 수 없다"며 "소수자의 권리 보호가 법원의 가장 큰 책무"라고 강조했다.
법이 사회적 약자를 보호하는 차원에서 선처하는 건 사회 통념상 어느 정도 받아들일 수 있다. 그러나 소수자의 권리 보호를 이유로 있는 법을 무력화시키거나 자기 입맛대로 늘렸다 줄였다 할 권리는 제아무리 법관이라도 할 수 없고 해서도 안 된다.
건강보험 피부양자 자격 유무를 따지는 재판에서 "성적 지향을 이유로 차별해선 안 된다"고 언급한 부분은 법리와는 상관없는 말이다. 건보공단이 '사실혼 배우자'에게만 피부양자 자격을 주는 건 현행 법의 규정에 따른 것인데 법을 놔두고 엉뚱하게 '성적 지향'을 이유로 차별을 하지 말라니 어느 장단에 춤추라는 건가. 그러면서 '사실혼' 관계에만 주는 건강보험 피부양자 자격을 동성 커플에게 주라고 한 것이다. 이건 법관으로서 재량권 남용의 소지가 있다.
헌법은 "혼인은 양성평등을 기초로 성립한다"라고 규정하고 있다. 민법도 혼인을 남녀간의 결합으로 보고 있다. 이는 2심 재판부가 동성 커플을 '사실혼'으로 인정할 수 없는 명백한 사유다. 그래놓고 "정서적·경제적 생활공동체라는 점에서 사실혼 배우자와 다르다 할 수 없다"는 설명을 하고 있다. '사실혼'이 아니지만 '사실혼'과 다르지 않다는 말은 지나치게 자의적 해석이란 비판을 받기에 십상이다.
이번 판결에 대해 일각에선 동성 커플도 제도권 내에서 보호받을 길이 열렸다며 환영하는 분위기다. 그러나 사회적 합의가 전혀 이뤄지지 않은 현실에서 판결이 너무 앞서 나갔다며 우려하는 목소리가 적지 않다. 전문가들은 민법상의 가족 개념이 아직 바뀌지 않은 상태에서 지나치게 전향적이고 진보적인 판결을 하는 것은 바람직하지 않다며 비판적인 견해를 나타냈다.
교계는 이번 판결에 촉각을 곤두세우고 있다. '포괄적 차별금지법'이 제정되지도 않았는데 일부 판사들이 법리 판단에 성 소수자 보호를 개입시키는 것에 불편한 기색이 역력하다.
한국교회연합은 23일 발표한 성명에서 "이번 판결이 헌법과 민법이 규정한 '혼인의 신성함'을 부정하고 가족제도의 해체로 이어질 가능성이 다분하다는 점을 우려하는 동시에 대한민국의 법체계와 성 소수자를 제외한 국민 모두를 차별 혐오자로 몰아 범죄 집단화하는 그 논리와 비약에 경악을 금치 못하는 바"라고 규탄했다.
한국교회총연합도 앞서 22일 발표한 논평에서 "동성혼은 '혼인과 가족생활은 개인의 존엄과 양성 평등을 기초로 설립되고 유지되어야 하며, 국가는 이를 보장한다'는 헌법 제36조 1항에 정면으로 반할 뿐 아니라 혼인을 '1남 1녀 간의 정신적, 육체적 결합'이라고 규정한 대법원 전원합의체의 판결에도 어긋난다"며 이번 판결에 우려를 나타냈다.
동성 커플에게 의료보험 피부양자 자격을 줄 수 있느냐 하는 법원의 판단은 건보공단 측이 상고함으로써 최종 판단은 대법원에서 내려지게 됐다. 그러나 이번 판결이 '혼인'의 신성함을 규정한 헌법 정신을 퇴색시키고 나아가 '동성혼' 법제화의 발판이 되지 않을까 우려하는 목소리에 주목할 필요가 있다. 대법원의 판단을 지켜볼 일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