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찬욱 감독, 善과 惡 뒤섞인 삶 그대로 인정 촉구해
사회 구조적 惡 대응하는 개인, 비윤리·불법도 가능
삶의 개별성 중시 실존철학과 포스트구조주의 사상
성경적 해법, 이상적 善 규정돼야 惡 물리칠 힘 얻어
어떠한 사회적 양상이든 끝내 善으로 惡 이기길 권고
다원성 포용 기준, 시공 초월 고결한 하나님의 말씀
박욱주 박사님의 이번 주 영화 심층 분석 주인공은 칸 영화제 감독상에 빛나는 박찬욱 감독의 <헤어질 결심>입니다. 이번 영화에는 배우 박해일과 탕웨이 씨가 주인공을 맡았으며, 이 외에도 박용우, 이정현, 고경표, 방송인 김신영 씨 등이 출연했습니다. 박찬욱 감독은 영화 <올드보이>, <박쥐>에 이어 세 번째로 수상했습니다. 이 외에도 <공동경비구역 JSA>부터 <복수는 나의 것>, <친절한 금자씨>, <아가씨> 등을 연출했습니다. 이번 글에는 스포일러가 영화 관람에 지장이 없을 만큼만 포함돼 있습니다. -편집자 주
◈캐릭터의 입체성: 박찬욱 감독의 주연 캐릭터가 보이는 두 가지 특징
박찬욱 감독의 신작 <헤어질 결심>이 지난 주 개봉됐다. 그는 이 작품으로 올해 칸 영화제 작품상을 수상했다.
이 영화의 서사는 한국에 불법 밀입국해 결혼한 뒤 한국인 남편이 사망한 조선족 동포 여성 송서래(탕웨이)와 이 살인 사건을 담당한 형사 장해준(박해일 분)의 관계를 중심으로 진행된다.
작중 송서래는 한국인 남성과 두 번의 결혼을 하고 두 번 모두 남편을 살해하거나 살해되도록 유도했다는 의심을 받는다. 첫 번째 남편은 심한 의처증과 가정폭력으로 송서래의 삶을 나락으로 떨어뜨렸고, 두 번째 남편은 사기꾼인데다 모종의 이유로 그녀를 위협했기 때문이다.
장해준 형사는 불법체류자라는 위태한 처지에서 남편의 위협과 폭력에 시달려야 했던 송서래에게 연민을 느끼고, 그녀가 첫째 남편을 살해했다고 의심하면서도 혐의를 덮어주려 한다.
송서래 역시 자신에게 애정을 보이고 배려해 주는 장해준 형사에게 깊게 빠져든다. 하지만 송서래는 자신 때문에 형사로서의 양심과 자존감에 치명적인 상처를 입고 괴로워하는 장해준 형사를 보면서 모종의 결심을 한 뒤 결말로 치닫는다.
이처럼 <헤어질 결심>은 불행한 삶을 이어가던 한 범죄자 여성과 그녀를 수사하던 형사 사이의 연민과 사랑을 중심에 둔 로맨스 영화이다.
하지만 두 주인공의 관계에 얽힌 여타의 서사 요소들 덕분에, 이 작품은 단순한 로맨스 영화를 넘어 한국 사회에서 고달픈 삶을 이어가는 두 평범한 남녀의 현실적인 고충과 슬픔을 세심하게 조명하는 흡입력 넘치는 드라마로 승화된다.
박찬욱 감독의 이전 작품들이 그러하듯, 이 작품도 다면적이고 입체적인 캐릭터들이 주인공을 맡고 있다. 박찬욱 감독의 주연 캐릭터들이 가진 두드러진 특징은 두 가지를 들 수 있다.
첫째, 사회부적응자들에 대한 그의 관심과 애착이 반영돼 있다. 둘째, 어떤 범죄나 불법적인 행동에 있어 가해자와 피해자가 명확하게 구별되지 않는다. 주연급 캐릭터들에 대해 박찬욱 감독은 이 두 가지 공식을 일관되게 지켜왔다.
<공동경비구역 JSA>(2000)에서는 군사분계선을 함부로 넘나들고 사건 은폐를 위해 살인을 저지른 범법자인 동시에, 민족 분단 현실의 피해자인 이수혁(이병헌 분)과 오경필(송강호 분)이 서사의 중심에 놓인다.
박찬욱의 복수 3부작(<복수는 나의 것>, <올드보이>, <친절한 금자씨>) 역시 각각의 주인공이 악질적인 범죄의 피해자인 동시에 그에 대한 사적 제재를 가하는 범죄자이다.
<스토커>에서는 사이코패스인 삼촌에게 아버지가 살해를 당하지만, 그 삼촌에게 복수하면서 자신도 연쇄살인마로 거듭나는 십대 소녀 인디아(미아 바시코프스카 분)가 이야기를 주도한다.
<아가씨>에서는 자신을 색욕의 도구로 전락시킨 이모부(조진웅 분)과 자신의 재산을 보고 접근하는 사기꾼 백작(하정우 분)을 계략으로 몰락시키는 비운의 악녀 이즈미 히데코(김민희)가 주인공으로 등장한다.
▲(왼쪽부터) 칸 영화제에 참석한 <헤어질 결심>의 주연 박해일, 감독 박찬욱, 주연 탕웨이. ⓒCJ |
◈캐릭터의 다원성: 기독교적 인간이해와는 다른 방향을 지시하는 박찬욱식 인간이해
이번에 개봉된 <헤어질 결심>의 주인공 송서래 역시 한국사회의 외국인 차별과 가부장적 폭력의 희생자인 동시에, 그 자신도 떳떳하지 못한 행동을 저지른다. 즉 법적으로나 윤리적으로 심각한 결함이 있지만, 미워할 수만은 없는 인물로 묘사되고 있다.
박찬욱 감독이 이처럼 선량함과 악의, 윤리와 비윤리가 분별하기 어려울 정도로 뒤섞인 주연 캐릭터들을 계속해서 등장시키는 이유는 인간의 삶이 선과 악을 그리 쉽게 재단할 수 있을 만큼 단순하지 않다는 메시지를 전달하기 위함이다.
즉 인간 개개인, 특히 사회적으로 지탄받을 만한 일을 행한 이들을 단순 흑백논리에 따라 함부로 판단하지 말라는 교훈을 주려는 것이다.
여기에 더해 박찬욱 감독은 특정 부류의 사람들을 구조적으로 억압하고 불행에 빠지게 만드는, 제도화되거나 관습화된 악의 문제를 제기한다. 사회에 만연한 범죄, 비윤리, 그리고 관계 파탄이 단지 개인의 힘만으로는 해결하기 어려운 집단적 성격을 갖고 있다는 것이다.
기독교적 관점으로 볼 때, 사회적으로 용납되지 않는 행동을 자행하는 자들을 둘러싸고 압박하는 구조적 악에 대한 박찬욱 감독의 진단은 몇몇 툭정한 요소들(예를 들어 동성애와 근친상간에 대한 경멸의 정서에 대한 비판)을 제외하고는 어느 정도 수긍되는 면이 있다.
실제로 성경은 죄악의 문제가 개인 차원의 문제일 뿐 아니라 사회와 집단, 그리고 영적 차원의 문제이기도 하다는 것을 면밀하게 가르치고 있다.
▲<헤어질 결심>의 장해준 형사(박해일 분)는 법률과 사회적 통념을 어기는 비행을 저지르지만, 이면에는 아내를 비롯한 주변인들과의 인간관계 실패에 따른 크다란 심적 갈등과 고통이 자리잡고 있다. ⓒCJ |
그러나 죄악의 문제 속에 깃든 이런 다층적인 성격에 대응하는 방식에 있어 기독교적 해법과 박찬욱 감독의 사고방식은 서로 전혀 다른 방향을 지시한다. 기독교적 해법은 이 죄악의 문제에 보다 정밀하고 엄정한 기준선을 제시해서 혼합된 선과 악을 분리해 놓는 것이다.
확고한 기준이 되는 이상적인 선(善)의 성격이 규정되어야 악을 물리칠 힘을 얻는다는 것이 성경에 기반을 둔 기독교적 해법이다.
그래서 기독교적 해법은 개인을 둘러싼 사회적 악이 어떠한 양상을 보이든 간에, 또 그 속내가 얼마만큼 복잡하든 간에 끝내 악을 물리치고 "선으로 악을 이기는" 길을 권고한다.
반면 박찬욱 감독이 제시하는 해법은 반토대주의적이고 다원주의적이다. 그가 영화에서 제시하는 대응책은 선과 악이 뒤섞인 삶 자체를 있는 그대로 정상 상태로 인정해야 한다는 것이다.
이런 사고방식에 따르면, 사회의 구조적 악과 그로 인한 고충에 대응하기 위해 개인은 '상황에 따라' 다소 불법적이고 비윤리적인 행위라도 저지를 수 있다.
따라서 선과 악을 이분법적으로 구분하는 편협함을 버리고 각 개인이 처해 있는 부조리의 상황을 면밀히 살펴야 하며, 그 속에서 선량함과 악의가 뒤섞인 채 살아가는 이들을 열린 마음과 인간애를 바탕으로 이해하려고 노력해야 한다는 것이 박찬욱식 메시지이자 해법이다.
이런 사고방식은 그 뿌리를 찾아 들어가면 삶의 개별성을 중시하는 실존철학과 관계적 다원성을 내세우는 포스트구조주의 사상에 이르게 된다.
기독교적 인간이해는 삶의 다원성을 애써 부정하지 않는다. 다만 다원성을 포용하고 존중하는 데 있어 일정한 기준이 있고, 이 기준은 시대와 장소를 초월한 지극히 고결한 이상, 하나님의 말씀에 근거를 두고 있다.
박찬욱 감독의 영화 캐릭터들이 보이는 선악의 모호함, 양면성은 기독교적 인간이해가 제시하는 선악의 기준과 삶의 지침에 크게 위배된다. 그는 특정한 초월적 이상에 의존하지 않는 삶이 진정 인간에게 자유와 해방을 준다는 사고방식을 고수한다.
이런 사고방식은 <헤어질 결심>에서 송서래의 처지를 대표하는 다음의 대사 속에 명확하게 드러난다. "내가 그렇게 나쁩니까?" <계속>
▲박찬욱 감독의 다원적, 반토대주의적 인간이해를 대변하는 대사, "내가 그렇게 나쁩니까?" ⓒCJ |
박욱주 박사(연세대 연합신학대학원 겸임교수)
연세대학교에서 신학을 전공했으며, 동 대학원에서 조직신학 석사 학위(Th.M.)와 종교철학 박사 학위(Ph.D.)를, 침례신학대학교에서 목회신학 박사(교회사) 학위(Th.D.)를 받았다. 현재 서울에서 목회자로 섬기는 가운데 연세대 연합신학대학원 겸임교수로 재직하고 있으며, 기독교와 문화의 관계를 신학사 및 철학사의 맥락 안에서 조명하는 강의를 하는 중이다.
필자는 오늘날 포스트모던 문화가 일상이 된 현실에서 교회가 보존해온 복음의 역사적 유산들을 현실적 삶의 경험 속에서 현상학과 해석학의 관점으로 재평가하고, 이로부터 적실한 기독교적 존재 이해를 획득하려는 연구에 전념하고 있다.
최근 집필한 논문으로는 '종교경험의 가능근거인 표상을 향한 정향성(Conversio ad Phantasma) 연구', '상상력, 다의성, 그리스도교 신앙', '선험적 상상력과 그리스도교 신앙', '그리스도교적 삶의 경험과 케리그마에 대한 후설-하이데거의 현상학적 이해방법' 등이 있다.
브리콜라주 인 더 무비(Bricolage in the Movie)란
브리콜라주(bricolage)란 프랑스어로 '여러가지 일에 손대기'라는 의미를 갖고 있다. 이 용어는 특정한 예술기법을 가리키는 용어로 자주 사용된다.
브리콜라주 기법의 쉬운 예를 들어보자. 내가 중·고등학교에 다니던 학창시절에는 두꺼운 골판지로 필통을 직접 만든 뒤, 그 위에 각자의 관심사를 이루는 온갖 조각 사진들(날렵한 스포츠카, 미인 여배우, 스타 스포츠 선수 등)을 덧붙여 사용하는 유행이 있었다. 1990년대에 학창시절을 보냈다면 쉽게 공감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