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린시절 시골에 살 때, 웬일인지 미국에서 몇 사람이 시골에 방문한 적이 있었다. 텔레비전에서만 보던 미국사람을 직접 보니 참 신기했다. 직접 말을 걸어볼 기회는 없었는데 한국음식을 좋아한다고 하니 참 다행이라고 생각했다. 그런데, 어린 마음에 은근히 걱정되는 것이 있었다. 시골 재래식 화장실을 잘 사용할 수 있을까하는 염려였다. 쭈그려 앉는 근육이 잘 발달되어 있지 않아서 애를 먹을 것 같았고, 보이는 내용물과 고약한 냄새도 견디기 어려워할 것 같았다. 시골생활은 낭만만 있는 것이 아니라, 재래식 화장실과 똥지게와 퇴비와 거름과 벗하며 살아가는 것에 익숙해져야한다.
미국 사람들이 며칠간 시골을 방문하고 돌아간 후에, 학교 사회과목 선생님께서 미국 사람들이 정말 놀란 것이 무엇인지 아는지 우리에게 질문하셨다. 우리는 약속이나 한 듯이 일제히 "변소"하고 소리쳤다. 선생님은 빙긋이 웃으시면서, 그래도 화장실은 일단 마음의 각오를 단단히 하고 오기 때문에 별의 별 방법으로 극복을 한다고 하셨다. 그런데, 시골 장독대에 항아리 뚜껑을 열고 잘 익은 된장을 보여주면 깜짝 놀란다고 한다. 항아리에 화장실의 내용물을 모아서 햇볕 잘 드는 곳에 모아 둔 것으로 보이기 때문이다. 또, 한번 놀라는 것은 조금 전에 자신이 맛있게 먹었던 된장찌게의 재료라고 하면 당혹감을 감추지 못한다고 한다. 똥과 된장이 햇갈리기 때문이다.
우리는 똥과 된장을 구별할 줄 안다. 구별하여 대할 줄 안다. 할머니로부터 똥을 처리하는 방법과 된장을 경건하게 대하는 방법을 배웠다. 모습도 냄새도 비슷하게 느껴질 수 있지만 분명히 다른 것이다. 그것을 구별할 줄 아는 것이 지혜와 분별력이다. 똥을 똥이라고 하고, 된장을 된장이라고 하는 것은 똥과 된장을 차별하는 것이 아니다. 구별하는 것이다. 구별할 줄 모르면 어리석은 것이고, 본인 뿐 아니라 공동체가 함께 피해를 입게 된다. 그런데, 똥과 된장을 차별없이 대해야 한다고 주장하는 것이 "차별금지법"이다.
차별을 금지하면 좋은 것이라는 주장에 선동되면 안된다. 그것은 우리 삶에 꼭 필요한 구별과 분별을 포기하는 매우 우매한 처사이다. 신앙은 덮어놓고 믿는 것이 아니다. 성경책을 펴고, 일반은총의 좋은 지혜의 글들을 공부하면서 믿어야한다. 기독교신앙은 반지성도 몰지각도 아니다. 종교개혁의 전통에서도 당시의 최고의 언어와 역사와 법과 철학과 고전의 지식을 가진 사람들이 성경의 진리를 밝히 전하였다. 대한민국의 국회에서 지난 10여년간 계속 발의되고 있는 차별금지법은 실상은 성경과 프로테스탄티즘에 기반한 전통적인 성윤리를 파괴하기 위한 공격임을 간파해야한다.
6월이 되었다. 6월은 성소수자 인권의 달이라고 한다. 전세계적으로 퀴어축제가 시작되는 기점이다. 예전의 페미니즘 운동이 남자와 여자를 상정해 놓고서 여성의 인권을 주장하는 것이었다면, 최근에는 남성과 여성 자체의 경계를 허물고, 다양하고 무수한 성을 인정하자는 방향으로 나아가고 있다. 차별금지법이 이미 통과된 사회에서는 동성애가 잘못되었다고 표현하는 것도 "동성애 혐오증"으로 처벌할 수 있고, 심지어 "결혼은 한 남자와 한 여자의 결합이다"라고 표현하는 것도 누군가의 마음을 불편하게 했기 때문에 혐오발언으로 처벌할 수 있는 상황이다.
예수님이 이 시대에 오신다면 차별금지법에 저촉되지 않으실까? 예수님의 제자들로 자처하는 성도들은 이 시대를 어떻게 살아가야할까? 목회자들은 어떻게 설교하고 가르쳐야할까? 교회는 교묘한 법제정을 통해서 가정과 교회를 허물고 사회근간을 무너뜨리려는 영적인 도전을 직시하고, 진리를 분별할 줄 아는 하나님의 사람들을 계속해서 길러내야한다. 한 세대가 지나서 건물만 남기고 사람은 남기지 못하는 사태에 봉착하지 않도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