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상에 의해 부정되는 현실의 유일회성
4편, 유일회적 삶 소중함 주제의식 역행
현실 중심 서사, 가상현실 중심 전개돼
현실 무게감과 고달픔? 신앙 찾는 계기

◈가상과 현실: 철학과 신앙의 중요 주제, 현실과 가상의 연관성

최근 개봉한 <매트릭스> 시리즈 4편, <매트릭스: 리저렉션>은 시리즈 3편인 <매트릭스 3: 레볼루션>의 결말 이후 60년 뒤의 이야기를 다룬다.

3편의 결말에서 지하도시 시온의 인류를 구하고 죽음을 맞이한 줄 알았던 주인공 네오(키아누 리브스 분)와 트리니티(캐리앤 모스 분)는 또 다른 매트릭스를 창조한 인공지능에 의해 생존해 있는 것으로 밝혀진다.

두 사람은 이전의 매트릭스에서와 같이 조작된 기억을 가지고, 가짜로 꾸며진 삶의 정황에 매여 노예화되어 있다. 몸은 캡슐 안에, 정신은 가상세계 안에 갇혀 있는데, 시온의 후예들이 그들을 도와 현실 세계로 복귀하게 된다.

이후 두 사람은 동료들과 함께 인공지능 프로그램들을 상대로 치열한 전투를 벌여 매트릭스를 다시 장악한다.

이처럼 죽은 줄 알았던 전설적 인물들이 되살아나 가상 세계 속에서 벌어진 인간과 기계 사이의 새로운 전쟁을 승리로 이끄는 서사가 이번 <매트릭스: 리저렉션>의 간단한 줄거리이다.

이번 신작 역시 <매트릭스> 시리즈의 전매특허라 할 수 있는 실상과 가상의 연관성, 실상보다 더 생생한 가상이라는 소재를 중심으로 서사가 전개된다.

그런데 이 주제는 고대와 중세에는 하나님 나라와 물질 세계를 분별하려는 존재론의 주제였고, 근대에는 물 자체와 사고된 대상을 분별하려는 인식론의 주제였다.

현대에는 비본래적 일상성과 본래적 존재 가능을 구별하는 실존철학의 주제이자, 전체주의적으로 구조화된 자아와 현실적 관계 속에서 개별화된 자아를 구별하는 포스트구조주의의 주제로도 자리잡았다.

이처럼 <매트릭스> 시리즈는 존재와 인식을 포괄하는 철학적 주제를 서사의 중심에 두면서도 폭발적인 대중성까지 확보하였고, 그 덕분에 철학으로 영화 읽기를 시도할 때마다 빠짐없이 회자되는 작품이 되었다. 아마도 영화 역사상 가장 많은 철학적 해석 시도가 이루어진 작품이 아닐까 생각된다.

<매트릭스> 이전에도 가상 세계에 관한 영화가 없었던 것은 아니다. 1990년의 <토탈 리콜>이나 1995년의 <가상 현실>, 1998년의 <다크 시티>, 그리고 <매트릭스> 1편과 거의 같은 시기 개봉했던 1999년의 <13층>도 각기 나름의 독특한 방식으로 가상 현실 서사를 풀어 나간다.

하지만 <매트릭스> 시리즈에 대한 연구자들의 관심이 다른 작품들을 압도하는 데는 분명한 이유가 있다. <매트릭스> 시리즈는 다양한 철학과 종교 요소들을 가장 직접적으로 차용하면서, 동시에 양자역학적 존재 이해, 기술에 의한 인간의 종속 문제, 초지능의 역습 문제까지 다채로운 자연과학적 고민들을 자연스럽게 엮어낸다.

이로 인해 <매트릭스>는 서구 철학사와 동서양 종교사에 대한 훌륭한 대중문화적 알레고리이자, 인간의 삶을 둘러싼 현실성과 가상성의 대립과 연합에 대한 수준 높은 메타포로 인정받는다.

사실 <매트릭스> 시리즈 전체가 이처럼 호평을 받는 것은 아니다. 주로 호평을 받는 것은 1편인 <매트릭스>와 3편인 <매트릭스 3: 레볼루션>이고, 2편인 <매트릭스 2: 리로디드>와 이번에 개봉한 4편 <매트릭스: 리저렉션>은 별로 큰 호응을 받지 못했다.

특히 이번 4편은 추억팔이에 심하게 의존하는 바 있어, 서사의 참신성을 찾기 어려운 아쉬움이 존재한다.

매트릭스 리저렉션
▲시리즈 가운데 최고로 호평을 받은 1편, <매트릭스>.

◈가상과 현실도피: 가상세계가 주는 위로 때문에 상실하는 신앙의 계기

어쨌든 <매트릭스>는 실상과 가상의 연관성에 관한 문제를 다룬다. <매트릭스> 트릴로지, 즉 1편부터 3편까지의 내용에서는 가상이 더 실상같고 매혹적이지만, 사실 인류의 희망은 거칠고 고단한 현실의 삶에 있다는 주제의식이 담겨 있다.

게다가 가상 세계에서의 삶이 현실의 유일회적 삶의 제한에 묶여 있다는 설정을 충실하게 따른다. 가상 세계에서 한 번 죽음을 맞이하면, 정신의 사망으로 인해 현실의 몸도 사망하게 된다.

이런 주제의식은 기독교적 관점으로 볼 때 반갑고 유익하다. 인간에게 단 한 번 주어진 자연적 현실이 인간의 삶과 사고의 출발점이라는 것을 인정하는 것은 이 현실을 창조하고 보존하시는 하나님의 섭리를 발견하고 수긍하는 데 도움이 된다.

성경은 구원을 위해 인간에게 허락된 현실의 시간과 공간이 각 사람에게 단 한 번 주어지며, 그렇기 때문에 삶의 매 순간을 하나님의 은혜로 채우기 위해 전력을 다하라고 권고한다.

그러나 아쉽게도 시리즈 4편인 <매트릭스: 리저렉션>은 이 유일회적 삶의 소중함에 대한 주제의식을 거부하고 역행한다.

3편 마지막에서 완전한 죽음을 맞이했어야 하는 주인공 네오와 트리니티를 다시 살려놓고, 그들에게 새로운 현실과 새로운 가상세계를 마련해 준다.

언뜻 보면 삶의 두 번째 기회에 대한 메타포나 내세에 대한 알레고리로 해석될 수도 있다. 하지만 설정이나 서사 흐름상 주인공의 부활은 분명한 무리수다.

매트릭스 리저렉션
▲죽음을 맞이하는 것이 당연했던 주인공들을 무리하게 되살린 <매트릭스: 리저렉션>.

기존에 많은 수익을 거둬들인 시리즈를 되살려 관객들의 추억과 그리움을 담보로 최대한 많은 경제적 이익을 얻으려는 제작사의 심산이 명백하게 드러난다.

그러다 보니 원래 현실 중심으로 전개되어야 할 서사가 비현실, 즉 가상현실 중심으로 전개된다. 현실에서는 죽었어야 할 주인공들을 되살려야 했기에, 서사의 무게중심이 가상 쪽으로 옮겨진 것이다.

<매트릭스> 트릴로지에서 그토록 강력한 임팩트를 선사한 소재, 빨간 약(현실로 진입)과 파란 약(가상 세계 잔류)도 4편에는 넘치도록 나와서 그저 식상하게 보일 뿐이다.

새롭게 소개되는 현실 세계인 지하도시 이오만 하더라도 가상 세계의 사건을 진행시키기 위한 보조적 소재로 가볍게 소비돼 버린다. 결국 4편 서사 전반에서 현실을 중심으로 가상 세계가 운용되는 것이 아니라, 가상 세계에 현실이 끌려다니고 있다.

이는 어쩌면 변화된 시대상을 반영하는 것인지 모른다. 객관적인 공통 현실보다, 각자 체감하는 세계가 더 중요하다는 극단적 개별화와 다원화 세태를 반영하는 듯하다.

이런 세태 속에서는 개인의 환영과 착각, 그리고 편견조차 각 사람의 실존을 근거짓는 참된 조건으로 인정된다. 오늘날의 이런 사상적 분위기 덕분에 <매트릭스> 4편 서사의 무게중심은 일방적으로 가상 세계로 쏠리고 있다.

가상 세계는 현실의 무게감을 감당하기 싫어하는 이들에게 매혹적이다. <매트릭스> 1편에 등장하는 배신자 사이퍼(조 판토리아노 분)처럼 현실 세계를 잊고 가상 세계 안에서 호의호식하기를 꿈꾸는 이들에게, 가상 세계는 새로운 삶의 기회이자 가볍게 소진할 수 있는 삶의 회차들이 넘쳐나는 곳이다.

매트릭스 리저렉션
▲<매트릭스> 1편의 악역 사이퍼. 가상 세계에 안주하기 위해 현실을 외면하고 포기한다.

이 모든 것은 현실의 고달픔과 지나간 과거에 대한 후회를 회피하기 위한 작위적 수단에 불과하다. 현실의 고달픔과 과거에 대한 후회는 인간 스스로의 한계와 부조리함, 죄성을 깨닫게 함으로써, 이를 극복하도록 도와주시는 구원의 하나님을 찾아나서는 계기로 작용한다.

그러나 가상 세계가 현실을 바라보는 눈을 가리고 값싼 위로를 제공한다면, 인간은 거기에 안주해 자연적 현실을 통해 하나님을 찾아나서려는 노력을 포기할 것이다.

<매트릭스: 리저렉션>의 서사는 은연중에 이렇게 가상 세계에 의존하려는 욕망을 수긍함으로써, 이전까지 시리즈를 관통하던 현실 중심의 주제의식을 포기해 버린다. <계속>

박욱주

박욱주 박사(연세대 연합신학대학원 겸임교수)

 

연세대학교에서 신학을 전공했으며, 동 대학원에서 조직신학 석사 학위(Th.M.)와 종교철학 박사 학위(Ph.D.)를, 침례신학대학교에서 목회신학 박사(교회사) 학위(Th.D.)를 받았다. 현재 서울에서 목회자로 섬기는 가운데 연세대 연합신학대학원 겸임교수로 재직하고 있으며, 기독교와 문화의 관계를 신학사 및 철학사의 맥락 안에서 조명하는 강의를 하는 중이다.

필자는 오늘날 포스트모던 문화가 일상이 된 현실에서 교회가 보존해온 복음의 역사적 유산들을 현실적 삶의 경험 속에서 현상학과 해석학의 관점으로 재평가하고, 이로부터 적실한 기독교적 존재 이해를 획득하려는 연구에 전념하고 있다.

최근 집필한 논문으로는 '종교경험의 가능근거인 표상을 향한 정향성(Conversio ad Phantasma) 연구', '상상력, 다의성, 그리스도교 신앙', '선험적 상상력과 그리스도교 신앙', '그리스도교적 삶의 경험과 케리그마에 대한 후설-하이데거의 현상학적 이해방법' 등이 있다.

브리콜라주 인 더 무비(Bricolage in the Movie)란

브리콜라주(bricolage)란 프랑스어로 '여러가지 일에 손대기'라는 의미를 갖고 있다. 이 용어는 특정한 예술기법을 가리키는 용어로 자주 사용된다.

브리콜라주 기법의 쉬운 예를 들어보자. 내가 중·고등학교에 다니던 학창시절에는 두꺼운 골판지로 필통을 직접 만든 뒤, 그 위에 각자의 관심사를 이루는 온갖 조각 사진들(날렵한 스포츠카, 미인 여배우, 스타 스포츠 선수 등)을 덧붙여 사용하는 유행이 있었다. 1990년대에 학창시절을 보냈다면 쉽게 공감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