블랙 위도우, 슈퍼히어로보다 일반인 가까운 인물
폭력과 기반과 투쟁으로 점철된 삶, 커다란 압박감
문제 해결 과정 살인과 파괴로 쌓인 원한으로 불안
참신했지만 반복되는 이야기로 피로감 쌓이는 중

◈마블의 새로운 페이즈: 오랜만의 마블 개봉작, <블랙 위도우>

오래간만의 마블 영화, 마블 시네마틱 유니버스 페이즈 4 첫 번째 작품 <블랙 위도우>가 개봉해 관객을 불러모으고 있다.

마블 영화가 최고의 전성기를 구가한 때는 코로나 확산 전인 2019년 4월 <어벤져스: 엔드게임>이 개봉한 시점이었다.

2016년의 <캡틴 아메리카: 시빌 워> 이후, 4년간 이어진 마블 시네마틱 유니버스의 세 번째 페이즈를 실질적으로 마무리한 작품이 <어벤져스: 엔드게임>이다.

물론 공식적으로는 <어벤져스: 엔드게임>의 다음 작품인 <스파이더맨: 파 프롬 홈>이 페이즈 3의 마지막 작품이다. 하지만 <어벤져스: 엔드게임>의 기억이 매우 강렬하기도 하고, <스파이더맨: 파 프롬 홈>은 페이즈 4의 프롤로그라도 봐도 무방하므로, 사실상 <어벤져스: 엔드게임>이 페이즈 3의 종결작이라고 볼 수 있다.

이렇게 큰 인기를 누리던 마블 영화들이 작년 코로나 확산으로 인해 갑작스럽게 대중의 관심에서 멀어지는 상황을 맞이했다. 그리고 1년 넘게 주요작들이 개봉을 연기하던 와중 오랜만에 성사된 마블 영화 개봉은, 슈퍼히어로 영화 팬들에게 크게 반가운 소식일 것이다.

마블 어벤져스 블랙 위도우
▲나타샤 로마노프(스칼렛 요한슨 분)가 주인공으로 등장하는 <어벤져스> 시리즈의 스핀오프 <블랙 위도우>, 마블 시네마틱 유니버스 페이즈 4의 첫 번째 작품이다.

그러나 비평하는 입장에서는 <블랙 위도우> 같은 영화의 개봉이 크게 반가운 일은 아니다. 오히려 피로감이 느껴질 지경이다.

슈퍼히어로 영화에서 지금까지 나올 수 있는 스토리와 연출은 거의 다 나온 상황이라, 사실 마블이든 DC든 어느 회사에서 작품을 내놔도 큰 기대감을 느끼지 못하는 실정이다. 아마 평론가들뿐 아니라 상당수 관객들도 비슷한 생각을 가진 이들이 많을 것이다.

<블랙 위도우> 역시 그동안 슈퍼히어로 영화들이 붙잡고 늘어지던 서사 요소들을 그대로 재활용하는 작품이다.

물론 주인공 나타샤 로마노프(스칼렛 요한슨 분)는 다른 어벤저스 멤버들과 비교하면 슈퍼히어로보다는 일반인에 가까운 인물이다.

과학을 통한 신체개조를 받은 것도 아니고, 특별한 장비를 동원하는 것도 아니며, 초능력 혹은 신비한 능력 같은 것도 가지고 있지 않다. 그저 혹독한 세뇌와 비밀요원 훈련을 받은 스파이에 불과하다.

하지만 어벤져스의 일원으로서 간간이 혁혁한 공로를 세웠고, <어벤져스: 인피니티 워> 당시 닉 퓨리가 사라지자 뒤를 이어 실드의 수장을 맡았다.

이를 통해 <어벤져스: 엔드게임>에서 캡틴 아메리카와 함께 멤버들이 다시 모이는 구심점 역할을 했고, 자기 목숨을 희생해서 사라진 이들을 되돌아오게 만들었다. 이러한 이유들로 인해 사실상 어벤져스의 다른 초인들과 거의 동급으로 취급받는 캐릭터가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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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렇다면 어벤져스라는 초인 그룹의 확고한 멤버 나타샤를 둘러싼 서사의 소재, 즉 그녀가 겪어야 할 난관은 무엇인가?

가장 먼저는 과거 기억과 정체성 문제이다. 평범과는 거리가 먼, 폭력과 기만과 투쟁으로 점철된 삶이 그녀의 마음에 커다란 압박감을 준다. 게다가 영화 속의 나타샤는 철저히 타의에 의해, 세뇌에 의해 불행한 삶을 이어가야 했다. 이러한 과거를 청산하는 일이 <블랙 위도우> 서사의 핵심을 차지한다.

다음으로 그녀가 겪는 문제는 자신이 얻게 된 힘을 사용하면서 생겨난 갖가지 위기와 원한들이다. 힘으로 문제를 해결하다 보니 결국 전투 상황에 관여하게 되고, 그 과정에서 행한 살인과 파괴 때문에 부지불식간에 원한을 쌓게 된다. 결국 이 문제들을 해결하느라 인생 전체가 불안과 격동에 휩싸이게 된다.

방금 언급한 나타샤의 두 가지 문제는 마블이든 DC든, 거의 모든 슈퍼히어로들이 반드시 겪게 되는 문제이다. 일반인을 능가하는 힘을 가졌지만, 사실상 정신만큼은 일반인과 다를 바 없는 것이 대다수의 슈퍼히어로들이다.

이들의 활약이 커지면 커질수록 이들에게 남겨지는 PTSD 역시 커진다. 참전용사들이 자주 겪는 불안, 감정의 격랑, 폭력성 등이 히어로들 각각의 삶을 망가뜨린다.

마블 어벤져스 블랙 위도우
▲나타샤를 비롯한 마블 슈퍼히어로 멤버 모두는 자신이 가진 힘 때문에 발생하는 폭력과 원한 때문에 심한 정신적 고뇌를 겪는다.

결국 이런저런 모양으로 각자의 삶을 희생해서 사람들을 지키는 영웅의 이야기가 마블 영화들의 공통된 주제인데, 이 동일한 주제 하나를 설득력 있고, 매력 넘치게 만들기 위해 온갖 변주 기법을 동원하는 것이 마블 시네마틱 유니버스의 본모습이라 할 수 있다.

이러한 과정에서 필수적으로 동원되는 것이 환상과 추가설명이다. 동일한 주제를 가진 이야기라도 적절한 환상이 곁들어지면, 다른 방향의 매력을 갖게 표현할 수 있다.

그리고 하나의 이야기 뒤에 이를 설명하는 다른 이야기, 즉 프리퀄, 시퀄, 스핀오프 등을 통해 앞서 설명하지 못한 서사의 허점이나 설정 구멍을 채워 나간다.

여기에 더해 동일한 주제의 이야기라도 마치 또다른 메시지를 전달하는 것처럼 꾸며낸다. 마블 시나리오 작가들과 연출가들은 이러한 방법을 제대로 활용할 줄 아는 전문가들이다.

이렇게 하나의 주제를 가지고 여러 이야기를 만들어가는 문학적 기법의 시초는 고대의 다신교 신화라고 할 수 있다. 이집트 신화, 그리스 신화, 켈트 신화, 게르만 신화, 이들 다신교 신화 모두 마블 시네마틱 유니버스와 마찬가지의 과정을 거치면서 발전되어 왔다.

마블 어벤져스 블랙 위도우
▲마블 어벤져스 페이즈 4를 이끌 차세대 멤버들. 기존 멤버들을 교체하면서 기존 마블 서사들이 확대 재생산되는 상황을 보여준다.

그리스 신화의 예를 들면, 우선 그리스 신화의 시초는 크게 세 가지로 볼 수 있는데, 첫째는 아폴로니오스의 <아르고나우티카>, 둘째는 호메로스의 대서사시 <일리어드>와 <오디세이아>, 셋째는 헤시오도스의 서사시들이다.

물론 세 사람 모두 각자가 집필한 방대한 신화를 스스로 창작해낸 것은 아니다. 자신의 이전 세대로부터 전해져 내려오던 신화들을 수집하고, 이 신화들을 역사적 사실들과 조합하고, 여기에 자신의 풍성한 상상력을 더해 하나의 체계로 집대성한 것이 그리스 신화의 시초이다.

그런데 그리스 신화는 여기서 끝나지 않고 확대 재생산 과정을 거친다. 호메로스 이후 유명한 시인들과 극작가들이 <아르고나우티카>, <일리어드>, <오디세이아>, <헤시오도스 서사시>의 설정과 암시, 복선을 기반으로 시퀄, 프리퀄, 스핀오프를 창작했다.

그리스에서는 아이스퀼로스, 소포클레스, 에우리피데스 등의 희곡 작가들, 로마에서는 베르길리우스와 오비디우스 등의 시인들이 그 역할을 맡았다.

이러한 신화의 체계는 처음 접하는 순간에는 충격적이고 매혹적이다. 세계와 인간의 기원, 존재의 진리, 고통의 원인, 행복의 길, 삶의 목적 등이 모두 총망라되어 있는 것처럼 보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신화를 읽어가는 대다수의 독자들은 어느 순간 피로감을 느끼게 된다. 그 방대한 체계를 이루는 세부 서사들 대부분이 사실상 거의 같은 주제의 이야기를 이리저리 조금씩 변주한 것에 불과하다는 것을 깨닫기 때문이다.

그리스 신화와 같은 다신교 신화들이 내세우는 주제는 다음의 진술로 압축된다. "신들은 다양하고, 각각의 신적 속성과 성격을 갖기 때문에, 인간이 신들을 거스르지 않고 잘 모시기란 쉽지 않다. 따라서 우리 인간들은 최선을 다해 신들의 심기를 거스르지 않고 조화롭게 섬겨야 한다. 그래야 저주와 불운을 피해갈 수 있다."

마블 시네마틱 유니버스 작품들은 고대 신화와는 분명 다른 주제를 내세우고 있다. 마블 작품들은 일반인을 능가하는 힘에도 불구하고, 고뇌하고 고통받을 수밖에 없는 인간의 불완전성에 관해 이야기하고 있다.

이는 엑스맨 시리즈의 <로건>과 <어벤져스: 엔드게임>에서 확실하게 드러난다. 두 작품 모두 결국은 초인적 힘이 주는 고뇌의 굴레에서 벗어나는 이들에 대한 이야기를 다룬다.

<로건>에서는 울버린이 죽음을 맞이하며 긴 삶의 질곡을 끝내고, <어벤져스: 엔드게임>에서는 블랙 위도우와 아이언맨이 죽으면서, 그리고 캡틴 아메리카가 노쇠하여 은퇴하면서 그 굴레에서 벗어난다.

블랙 위도우 엑스맨 로건 마블
▲<엑스맨> 시리즈를 실질적으로 마감하는 작품 <로건>. 마블 영화들과 마찬가지로 비정상적인 힘에 휘둘리는 인간들의 서글픈 운명을 이야기한다.

이러한 서사들은 하나하나 따로 봤을 때 분명 참신한 매력을 갖는다. 하지만 결국 유사한 주제의 이야기가 14년 넘게 연속된다면, 개별 서사가 아무리 참신하더라도 독자나 관객 입장에서는 상당한 피로감을 느낄 수밖에 없다. <블랙 위도우>로 본 현재의 마블, DC 영화들이 그런 상황을 맞이하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

실제 미국 슈퍼히어로 코믹스의 역사도 이런 과정을 거쳤다. 대개 10-15년 정도의 전성기를 거친 뒤, 결국 비슷한 이야기들이 반복되는 데 싫증을 느낀 대중이 슈퍼히어로 콘텐츠를 외면하는 시기가 찾아왔었다. <다음 편에 계속>

 

박욱주

박욱주 박사(연세대 연합신학대학원 겸임교수)

연세대학교에서 신학을 전공했으며, 동 대학원에서 조직신학 석사 학위(Th.M.)와 종교철학 박사 학위(Ph.D.)를, 침례신학대학교에서 목회신학 박사(교회사) 학위(Th.D.)를 받았다. 현재 서울에서 목회자로 섬기는 가운데 연세대 연합신학대학원 겸임교수로 재직하고 있으며, 기독교와 문화의 관계를 신학사 및 철학사의 맥락 안에서 조명하는 강의를 하는 중이다.

필자는 오늘날 포스트모던 문화가 일상이 된 현실에서 교회가 보존해온 복음의 역사적 유산들을 현실적 삶의 경험 속에서 현상학과 해석학의 관점으로 재평가하고, 이로부터 적실한 기독교적 존재 이해를 획득하려는 연구에 전념하고 있다.

최근 집필한 논문으로는 '종교경험의 가능근거인 표상을 향한 정향성(Conversio ad Phantasma) 연구', '상상력, 다의성, 그리스도교 신앙', '선험적 상상력과 그리스도교 신앙', '그리스도교적 삶의 경험과 케리그마에 대한 후설-하이데거의 현상학적 이해방법' 등이 있다.

브리콜라주 인 더 무비(Bricolage in the Movie)란

브리콜라주(bricolage)란 프랑스어로 '여러가지 일에 손대기'라는 의미를 갖고 있다. 이 용어는 특정한 예술기법을 가리키는 용어로 자주 사용된다.

브리콜라주 기법의 쉬운 예를 들어보자. 내가 중·고등학교에 다니던 학창시절에는 두꺼운 골판지로 필통을 직접 만든 뒤, 그 위에 각자의 관심사를 이루는 온갖 조각 사진들(날렵한 스포츠카, 미인 여배우, 스타 스포츠 선수 등)을 덧붙여 사용하는 유행이 있었다. 1990년대에 학창시절을 보냈다면 쉽게 공감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