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중문화 콘텐츠가 보여주는 시간 여행·역행 서사,
과학의 힘으로 섭리 벗어나려는 가련·불가능 욕망
후회와 회심으로 새로워지는 신앙 정신 정면 위배
◈시간 흐름과 자연과학: 시간의 방향을 뒤집으려는 양자역학적 상상
지난 주 개봉된 크리스토퍼 놀란 감독의 영화 <테넷>은 양자역학 이론을 근거삼아 시간 여행과 인버전(inversion, 도치·전도)이라는 공상을 영상화하고 있다.
시간을 지배하는 것은 인류의 오랜 꿈 가운데 하나였다. 이는 크게 세 가지 형태의 바람으로 구체화되었다. 첫째는 시간의 흐름에 구애받지 않고 영생하려는 열망, 둘째는 시간을 앞질러 나가 미래를 예견하려는 열망, 그리고 셋째는 시간을 역행해서 삶에 새로운 기회를 만들어내고자 하는 열망이다.
첫째와 둘째 열망은 주로 종교적인 형태로 추구되어 왔다. 각 종교들이 제시해온 내세 사상, 그리고 예언은 앞선 두 열망을 적극적으로 반영한다.
성경 역시 이 두 가지 열망에 응답을 제시하고 있다. 몸의 죽음 이후 영생에 대한 확고한 소망, 그리고 구약의 선지자들과 신약의 그리스도를 통해 전해진 인류 전체와 우주 만물의 앞날에 대한 예언들이 인간의 시간적 유한성 극복을 향한 열망을 충족시켜준다.
이는 하나님께서 이 두 가지 열망을 인간의 영혼에 허락하셨고, 또한 그 열망을 통해 하나님을 찾아나서기 원하신다는 것을 입증해 준다.
이처럼 인간이 영원과 미래에 대한 열망을 통해 신의 뜻을 좇는다는 사실은 이미 소크라테스의 에로스 사상이나 아리스토텔레스의 '부동의 동자' 사상에서도 분명하게 논의되고 있다.
반면 위에 언급한 세 번째 시간에 관한 바람, 즉 시간을 역행해서 새로운 삶의 기회를 찾겠다는 욕망은 비교적 최근에 일반화된 것이라 볼 수 있다.
1895년 영국 사회학자이자 소설가 허버트 조지 웰스(Herbert George Wells)는 세계 최초의 시간여행 소설 <타임 머신(The Time Machine)>을 출간했다.
이때부터 시간을 역행하려는 세간의 욕망이 본격적으로 구체화되기 시작했다. 소설 <타임 머신> 이후 시간 여행이나 시간 역행을 다루는 대중문화 콘텐츠는 수백만 편이 넘게 발표되었다.
19세기 말부터 시간을 역행하려는 바램이 널리 각광을 받게 된 것은 새로운 자연과학적 발견 때문이었다.
1895년이면 이미 독일 물리학자 막스 플랑크가 흑체 복사 연구를 통해 양자 개념에 접근해가고 있을 시기였다. 막스 플랑크는 1899년에 양자 개념을 제시했다. 1920년대 들어와서는 닐스 보어와 베르너 하이젠베르크가 '코펜하겐 해석'을 정립해 나갔다.
▲시간 역행 서사가 대중문화에 본격적으로 유입되기 시작한 것은 양자역학이 발전되면서부터이다. |
'코펜하겐 해석'이 말하려는 바는 간단히 말해 물리적 실재라는 것이 실은 공허한 공간 속 파동에 불과하며, 이것이 인간의 의식에 붙들릴 때 비로소 입자라는 형태의 경험적 정보로 재구성된다는 것이다.
보어와 하이젠베르크는 원자 이하의 아원자 단계에서 중성자, 양성자, 전자와 같은 입자를 관찰하려는 시도를 통해 이 사실을 밝혀냈다.
물질의 존재가 실은 입자의 공허한 가능태에 불과하며, 이 입자를 현실에 현상시키는 것이 인간의 의식이라는 생각은 많은 대중문화 창작자들을 흥분하게 만들었다.
인간 의식이 이전과 전혀 다른 방향으로 아원자 세계에 접촉하면 물리적 세계 전반을 지배하는 시공간 법칙들을 회피하거나 조작할 수 있으리라는 상상이 가능해졌기 때문이다.
<어벤져스: 엔드게임>에서 앤트맨 스캇 랭(폴 러드 분)이 어벤져스 일원들에게 시간 여행의 가능성을 역설할 때 말한 내용들은 시간의 역행과 양자역학의 결합에 환호했던 대중문화 창작자들의 생각을 대변한다.
1895년 이래 시간 여행 콘텐츠들은 수많은 변주를 거쳤다. 처음에는 '단순한' 시간 여행 서사가 주를 이루었다. 1980년대 개봉된 시간 여행 영화 <터미네이터>, <백 투 더 퓨처>, <엑설런트 에드벤쳐>만 보더라도, 단순한 형태의 시간 여행이 서사의 뼈대를 이룬다.
하지만 타임 패러독스 문제가 대두되면서 이를 극복하기 위해 아예 수많은 시간대, 평행우주를 새로 창조하는 식의 서사들이 등장하기 시작한다.
2011년 개봉된 영화 <소스 코드>, 그리고 앞서 언급한 <어벤져스: 엔드게임>이 평행우주 이론을 적용한 작품들이다. 2017년 개봉된 넷플릭스 오리지널 영화 <디스커버리> 같은 경우는 아예 평행우주를 내세 개념과 결합시키면서까지 시간 여행의 가능성을 보여주려 한다.
▲시간 여행이나 시간 역행에 관한 대중문화 콘텐츠는 지난 120여년간 수많은 변주를 거쳐 왔다. |
◈시간 흐름과 후회: 규정된 섭리 속에서 후회할 수밖에 없는 인생
여기서 한 가지 묻고 넘어갈 사안이 있다. 왜 사람들이 그토록 시간 역행에 집착하는가 하는 점이다.
가장 큰 이유는 바로 삶의 '후회'이다. 누구나 자신의 과거를 돌아볼 때 크게 후회하는 일들이 있다. 후회는 일종의 깨달음, 자신의 과오에 대한 깨달음이다. 다만 이 깨달음은 오로지 시간이 지나고 자신의 선택이 초래한 문제적 상황이 진하게 체감될 때 비로소 얻을 수 있는 것이다.
그런데 후회로부터 오는 상실감, 비참함, 그리고 자신에 대한 수치심을 그대로 간직한 채 과거로 역행할 수 있다면? 후회되는 자신의 선택을 바꿀 수 있는 기회가 다시 한 번 주어진다면?
시간 여행이나 시간의 역행을 다루는 모든 대중문화 콘텐츠의 서사는 바로 이런 물음과 동기로부터 출발한다.
양자역학 개념이 아직 정립되지 못한 시절, 절대시간과 절대공간에 대해 확고한 신념을 가졌던 고전물리학적 실재 이해가 지배하던 시절만 하더라도 후회란 그저 감내해야 할 것, 그리고 미래의 과오를 방지하기 위한 반면교사로만 인식되었다. 시간의 일방향적 흐름에 불가항력적으로 끌려가는 유한한 인간에게 후회를 없이할 길 같은 것은 없다고 여겨졌다.
그런데 자연과학의 발전, 양자역학의 발전은 인간에게 이 후회를 자의적으로 처리할 가능성을 생각할 수 있게 해주었다.
영화 <테넷> 역시 이러한 동기와 상상을 바탕으로 연출된 작품이다. 인버전, 엔트로피 역전 등 대중문화계에 생소한 개념들을 가져와 화려하게 영상화하기는 했지만, 결국 <테넷>의 주된 서사는 시간 역행을 통한 후회의 말소를 중심으로 전개된다.
사실 이러한 측면에서 <테넷>의 인버전은 1978편 개봉된 영화 <슈퍼맨>에서 주인공인 슈퍼맨(크리스토퍼 리브 분)이 지구 자전축을 돌려 시간을 뒤집던 것과 크게 다르지 않다.
단지 <테넷>은 그 뒤집히는 시간 속에 시간의 순행을 관여시켜 환상적인 장면을 연출한다는 점이 새로울 뿐이다.
▲<테넷>의 인버젼, 엔트로피 역전은 시간을 뒤집어 후회를 말소시키려는 인간의 욕망을 반영한다. |
양자역학을 통한 시간의 역행은 그 자연과학적 가능성 여부도 불투명하지만, 성경적으로도 부적합한 상상이다. 성경에 소개된 하나님은 영생(시간적 유한성의 극복)이나 말씀에 입각한 예언(시간을 앞질러 인류의 미래를 예견)을 허락하셨고, 간혹 시간의 속도를 변화시키신 적도 있다.
구약 여호수아서에는 이스라엘 백성이 아얄론 골짝기에서 아모리 사람과 싸울 때 해와 달이 멈추고 하루의 시간이 연장된 사건이 기록되어 있다(수 10:12-14).
그렇지만 성경은 시간의 역행에 대해 단 한 번도 수긍한 적이 없다. 이는 기독교 신앙의 영역에서 시간 역행이 전혀 허락되지 않은 것임을 입증한다. 이는 피조물에 대해서뿐 아니라 하나님 자신에 대해서도 마찬가지이다.
만일 하나님께서 시간을 역행하려 하셨다면 성경의 수많은 문제들이 해결될 수 있었을 것이다. 최측근 천사의 타락, 인간의 원죄 타락 등을 시간 역행을 통해 없이하셨을 수도 있다.
하지만 성경에서는 하나님께서 기뻐하시는 뜻과 완전히 어긋난 이런 사건들도, 시간의 흐름 속에 자리잡은 확고한 과거 사실로 수긍되고 있다.
시간이 창조주 하나님께서 지어내신 존재적 특성이자 섭리라는 점을 생각하면, 하나님께 피조적 시간을 역행하는 일이 불가능하다고 보기 어렵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하나님께서는 성경 전체를 통해 자신이 세우신 이 시간의 질서와 섭리를 넘어서지 않으신다.
이처럼 모든 것이 가능하신 하나님과, 그럼에도 불구하고 자신이 세우신 질서 때문에 스스로를 제한하시는 하나님의 양 측면을 알았던 중세 말 신학자 윌리엄 오캄은 하나님의 '절대적 능력(potentia Dei absoluta)'과 '규정된 능력(potentia Dei ordinate)'을 구분해 설명하기도 했다.
시간의 섭리에 대해 하나님이 가지신 능력, 그리고 피조물에게 허락하신 바는 이 규정된 능력의 범위를 넘어서지 못한다.
▲<테넷>의 시간 역행 서사는 신적 섭리를 회피해 보려는 인간의 허황된 욕망에서 나온 것이다. |
오늘날 <테넷>을 비롯해 각종 대중문화 콘텐츠가 보여주는 시간 여행, 시간 역행 서사는 모두 과학의 힘으로 신적 섭리를 벗어나 보려는 인간의 가련하고 불가능한 욕망을 반영한다. 후회의 괴로움을 허황된 공상으로 망각해보려 하는 대중의 욕망을 만족시키는 것이다.
이는 우리 마음에 잠깐의 위로를 선사할 뿐, 실제로는 자기 현실을 진득한 후회를 통해, 회심을 통해 새롭게 하고자 하는 신앙의 정신과 정면으로 위배된다. 자신의 과거에 뒤범벅된 죄악, 과오, 수치를 직면하지 않는 이에게는 신앙을 통한 회심도, 반성을 통한 변화도 일어날 수 없다.
시간의 일방향적 진행은 거부할 수 없는 절대적 질서이자 섭리이며, 인간은 그 안에서 각자에게 허락된 여분의 시간을 보다 유의미하게 사용하는 것 외에는 시간을 온전히 활용할 다른 방안이 없다.
이러한 시간적 현실 인식은 온전한 신앙의 근본 공리 가운데 하나로 자리잡고 있다.
박욱주 박사(연세대 연합신학대학원 겸임교수)
연세대학교에서 신학을 전공했으며, 동 대학원에서 조직신학 석사 학위(Th.M.)와 종교철학 박사 학위(Ph.D.)를, 침례신학대학교에서 목회신학 박사(교회사) 학위(Th.D.)를 받았다. 현재 서울에서 목회자로 섬기는 가운데 연세대 연합신학대학원 겸임교수로 재직하고 있으며, 기독교와 문화의 관계를 신학사 및 철학사의 맥락 안에서 조명하는 강의를 하는 중이다.
필자는 오늘날 포스트모던 문화가 일상이 된 현실에서 교회가 보존해온 복음의 역사적 유산들을 현실적 삶의 경험 속에서 현상학과 해석학의 관점으로 재평가하고, 이로부터 적실한 기독교적 존재 이해를 획득하려는 연구에 전념하고 있다.
최근 집필한 논문으로는 '종교경험의 가능근거인 표상을 향한 정향성(Conversio ad Phantasma) 연구', '상상력, 다의성, 그리스도교 신앙', '선험적 상상력과 그리스도교 신앙', '그리스도교적 삶의 경험과 케리그마에 대한 후설-하이데거의 현상학적 이해방법' 등이 있다.
브리콜라주 인 더 무비(Bricolage in the Movie)란
브리콜라주(bricolage)란 프랑스어로 '여러가지 일에 손대기'라는 의미를 갖고 있다. 이 용어는 특정한 예술기법을 가리키는 용어로 자주 사용된다.
브리콜라주 기법의 쉬운 예를 들어보자. 내가 중·고등학교에 다니던 학창시절에는 두꺼운 골판지로 필통을 직접 만든 뒤, 그 위에 각자의 관심사를 이루는 온갖 조각 사진들(날렵한 스포츠카, 미인 여배우, 스타 스포츠 선수 등)을 덧붙여 사용하는 유행이 있었다. 1990년대에 학창시절을 보냈다면 쉽게 공감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