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간 방향 뒤집기, 피조물이 관여할 수 없는 섭리
인간에게 허락된 삶은 유한, 시간적 방향성 고정
정해진 섭리에 대한 인간의 무력감 극복에의 시도
◈시간과 상대성: 때와 장소에 따라 길이와 방향이 변하는 시간
올 여름 최대 기대작이었던 <테넷>이 26일 개봉했다. 지금까지 한 번도 실망스러운 작품을 내놓은 적 없는 크리스토퍼 놀란 감독의 영화인데다, 코로나 창궐로 대작들의 개봉이 줄줄이 연기된 상황이라 이 영화에 대한 관객들의 기대감은 한껏 커진 상황이다.
영화 <테넷>은 '시간의 핀포인트 역행'을 주제로 삼는 영화로 알려져 있다. 시간의 상대성과 개별성에 대한 고찰은 놀란 감독이 연출한 영화의 전매특허라 할 수 있는 요소이다.
놀란 감독은 그의 본격 출세작인 영화 <메멘토>(Memento, 2000)에서부터 이미 인간 의식이 체험하는 시간의 다양한 양상과 특성들을 묘사했다.
놀란 감독이 시간을 다루는 방식은 지극히 '현대적'이다. 그는 아인슈타인의 상대성 이론에서 분석된 새로운 물리학적 시간 개념, 그리고 현대 실존철학과 포스트구조주의에서 사유된 인간의 실존적-현상적 시간성 개념에 대한 고찰을 대중에게 친숙한 방식으로 해석해 영화 서사에 녹여낸다.
시간을 '여행'하면서 타임 패러독스를 통해 관객의 흥미를 유발하는 작품들은 그동안 끊임없이 제작돼 왔다. 당장 기억나는 것들만 해도 <터미네이터>(1984) 시리즈, <백 투 더 퓨쳐>(1985) 시리즈, <엑설런트 어드벤쳐>(1989) 시리즈, <어바웃 타임>(2013), 그리고 지난해 개봉됐던 <어벤져스: 엔드게임>(2019)까지, 다양한 작품들이 있다.
그렇지만 놀란 감독의 영화들은 하나같이 시간의 오묘한 상대성을 강조한다는 점에서 고유한 특징을 지닌다. <메멘토>의 경우 남들에게는 단 10분밖에 되지 않는 시간이 주인공에게는 기억할 수 있는 인생의 시간 전부를 차지한다. <인셉션>(2010)에서는 불과 한나절의 낮잠이 꿈 속에 진입한(혹은 갇힌) 이들에게 50년 이상의 세월이 되기도 한다.
<인터스텔라>(2014)에서는 우주의 먼 곳에서 보낸 단 이틀의 시간이 지구에서 100년이 넘는 시간이 되기도 한다. <덩케르크>(2017)에서는 육지, 바다, 그리고 공중에서 소요된 각기 다른 시간 대역이 초대형 철수작전을 성사시키는 하나의 시간 대역으로 통합된다.
<테넷>은 놀란 감독이 지금까지 다양한 방식으로 고찰해 왔던 시간의 상대성을 극대화해서, 특정 요원들에게만 역행을 허락하는 시간의 패러독스를 그려낼 것으로 보인다.
지난 작품들에서는 체감되는 시간의 길이를 상대적인 것으로 규정했다면, 이번 작품에서는 아예 시간이 흘러가는 방향 자체를 개별적이고 상대적인 것으로 상정하는 것이다.
시간의 길이와 진행 방향에 대한 진지한 고찰은 서구 정신문화의 고유한 요소이자 강점이라 할 수 있다. 일본 대중문화 콘텐츠 가운데서도 시간 여행을 다루는 작품들을 많이 찾아볼 수 있지만, 거의 모두 서구, 특히 미국의 대중문화 콘텐츠에서 그 모티프를 빌려온 것들이다.
시간 여행, 타임 패러독스, 시간의 상대성에 관한 모든 논의는 기본적으로 서구 정신문화의 산물이라고 볼 수 있는 것이다.
그런데 왜 서구 문화는 유독 시간의 문제를 사유하는 데 많은 힘을 들여온 것일까? 이는 시간과 영원이라는 개념을 통해 피조물과 창조주의 존재적 격차를 변증하려 했던 기독교 신학의 영향 때문이다.
◈시간의 피조성: 피조계에 대한 시간 섭리의 절대적 지배력
유한하고 가변적인 시간의 세계와 무한하고 불가변적인 예지의 세계를 분리하는 이원적 사고 구조가 서구 정신문화에 처음 본격적으로 등장하기 시작한 것은 고대 그리스 엘레아 학파의 수장 파르메니데스(Parmenides, 주전 515-450년)가 활동했던 주전 5세기였다.
그는 진정한 존재란 어떠한 시간과 공간에서도 변하지 않는 절대적 진리여야 한다는 확신을 갖고 있었다. 이러한 확신에 의거해, 그는 진정한 존재란 가변적인 물질적 시공간에 속하지 않는 영원한 관념이어야 한다고 주장했다.
이러한 사고는 바로 다음 세대에 활약했던 아티카 철학자 소크라테스와 플라톤에 이르러 현상계와 이데아계를 나누는 이원적 존재론으로 발전된다.
플라톤의 철학체계 속에서 시간적-현상적인 것은 언제나 비시간적-예지적인 것에 귀속된 열등한 것으로 평가되었다. 이러한 위계적 존재 이해는 진(眞)의 이데아인 일자(一者)와 천태만상인 세계의 존재자들 사이의 관계, 인간의 영혼과 육체 사이의 관계 등을 이해하는 고대적인 사고의 근거를 마련해 주었다.
중세가 시작될 무렵 등장한 기독교 신학자 아우구스티누스는 이러한 플라톤의 사고가 하나님의 불변하는 신성과 영원한 존재를 드높이고 변증하는 데 활용될 수 있다고 믿었다.
그리하여 서구 기독교 역사상 최초로 피조물의 시간성과 그 덧없음에 대해 매우 진지하게 고민하고 연구한 신학자로 자리매김하게 되었다.
<고백록> 제11권 전체를 통해 설파된 아우구스티누스의 시간관은 다음의 두 가지 진술로 간단하게 요약될 수 있다. 첫째, 영원이란 단순한 시간의 연장이 아니라, 시간과는 완전하게 다른 하나님의 고유한 존재적 특성이다. 둘째, 시간이란 하나님의 창조 사역을 통해 생겨난 피조적 특성으로서 그 뿌리를 영원에 두고 있다.
시간이 영원에 뿌리를 두고 있다는 말은 무슨 뜻인가? 바로 시간에 귀속된 피조물들의 존재가 영원하신 하나님의 존재를 힘입어서만 존재할 수 있다는 뜻이다.
시간을 이루는 여러 순간들은 너무나도 덧없어서, 그것이 존재하는지조차 의심스럽다. 과거는 지나가버렸고, 현재는 지극히 짧은 한 순간만 잠시 존재하다 과거에 묻혀버리며, 미래는 아직 실현된 바 없다. 인간이 체험할 수 있는 시간이라는 것은 이렇게 덧없고 불안정하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이렇게 불안정하고 미약한 시간에 매여 사는 인생이라도 그 덧없음에서 초월하는 소망, 영원을 바라볼 수 있는 소망을 주셨고, 인간은 영혼 덕분에 이 소망을 누릴 수 있게 된다.
영혼은 과거의 순간을 기억(memoria)하고, 현재의 순간에 주목(attentio)하며, 미래의 순간을 기대(expectatio)할 수 있는 힘을 가졌다.
인간은 이 영혼의 힘을 통해 시간에 귀속된 유한한 존재를 의식하는 동시에, 이 세 시제가 완벽한 존재로서 공존하는 영원을 미루어볼 수 있다. 이것이 아우구스티누스가 가르친 인간 영혼의 피조적 시간성이다.
파르메니데스-플라톤 전통의 존재이해를 차용한 아우구스티누스의 신학적 시간 사유에는 영원하신 창조주 앞에서 스스로의 덧없음과 미약함을 절감하고 겸비하는 피조물의 심령과 주제파악이 반영되어 있다.
인간에게 체감되는 시간은 기본적으로 상대적이지만, 그 존재의 가벼움과 유한성은 절대적이다. 인간은 기본적으로 영원이신 하나님께서 정하신 시간적 인과질서에 귀속되어 살아갈 수밖에 없다.
피조계 내에서 인간에게 허락된 삶은 유한하며, 그 방향성 또한 고정되어 있다. 이것이 하나님께서 정하신 시간의 섭리이며, 이 섭리는 피조계 내에서 절대적인 힘을 발휘한다.
아우구스티누스 이래 기독교 신학은 이러한 믿음을 바탕으로 세계와 인간의 시간성을 설명해 왔다.
이러한 관점에서 볼 때, 시간의 지배와 조작을 꿈꾸는 대중문화 콘텐츠들은 비현실적인 꿈과 환상의 세계를 보여주는데 주력한다고 평가할 수 있다.
시간의 상대성은 분명 현실적이다. 인간의 의식은 주마등의 체험을 통해 순간을 몇십 년처럼 느낄 수도 있고, 회상을 통해 몇십 년의 과거를 한 순간에 집약할 수도 있다.
그렇지만 시간의 방향을 뒤집는 것은 피조계의 어떤 존재자에게도 허락되지 않은 권능이며, 이 땅에 임재하신 그리스도께서도 월권하지 않으셨던 섭리이다.
오늘날 대중문화 콘텐츠들이 유독 시간 여행, 시간 역행, 혹은 평행 세계에서의 시간 재구성을 주제로 삼는 것은 정해진 시간의 섭리에 대한 인간의 무력감을 극복해 보려는 가련한 시도의 일환이라 볼 수 있다.
특히 양자역학을 중심으로 과학기술의 힘을 통해 시간 역행을 그럴싸하게 그려내는 것, 그리고 거기에 관객들이 열광하는 것은 그만큼 시간의 인과적 방향성이 절대적인 힘으로 우리 삶에 무게감을 더해준다는 것을 반증한다.
<테넷>의 서사 역시 이러한 맥락에서 이해될 수 있다. <계속>
박욱주 박사(연세대 연합신학대학원 겸임교수)
연세대학교에서 신학을 전공했으며, 동 대학원에서 조직신학 석사 학위(Th.M.)와 종교철학 박사 학위(Ph.D.)를, 침례신학대학교에서 목회신학 박사(교회사) 학위(Th.D.)를 받았다. 현재 서울에서 목회자로 섬기는 가운데 연세대 연합신학대학원 겸임교수로 재직하고 있으며, 기독교와 문화의 관계를 신학사 및 철학사의 맥락 안에서 조명하는 강의를 하는 중이다.
필자는 오늘날 포스트모던 문화가 일상이 된 현실에서 교회가 보존해온 복음의 역사적 유산들을 현실적 삶의 경험 속에서 현상학과 해석학의 관점으로 재평가하고, 이로부터 적실한 기독교적 존재 이해를 획득하려는 연구에 전념하고 있다.
최근 집필한 논문으로는 '종교경험의 가능근거인 표상을 향한 정향성(Conversio ad Phantasma) 연구', '상상력, 다의성, 그리스도교 신앙', '선험적 상상력과 그리스도교 신앙', '그리스도교적 삶의 경험과 케리그마에 대한 후설-하이데거의 현상학적 이해방법' 등이 있다.
브리콜라주 인 더 무비(Bricolage in the Movie)란
브리콜라주(bricolage)란 프랑스어로 '여러가지 일에 손대기'라는 의미를 갖고 있다. 이 용어는 특정한 예술기법을 가리키는 용어로 자주 사용된다.
브리콜라주 기법의 쉬운 예를 들어보자. 내가 중·고등학교에 다니던 학창시절에는 두꺼운 골판지로 필통을 직접 만든 뒤, 그 위에 각자의 관심사를 이루는 온갖 조각 사진들(날렵한 스포츠카, 미인 여배우, 스타 스포츠 선수 등)을 덧붙여 사용하는 유행이 있었다. 1990년대에 학창시절을 보냈다면 쉽게 공감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