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교회의 개혁과 갱신이 필요하다는 지적은 이미 지난 1990년대부터 나오기 시작했다. 벌써 20년이 넘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한국교회의 개혁은 제자리 걸음을 하고 있는 것 같다. 아니 한국교회의 상태가 더 나아지는 것이 아니라, 더 악화되고 있는 것이 아닌가 라는 우려를 금할 수가 없다.

이런 상황에서 우리는 "왜 한국교회의 개혁이 어려운가?"라는 매우 심각한 질문을 던져 보아야 한다. 도대체 무엇이 문제인가? 한국교회가 개혁되기 어려운 근본적인 이유는 무엇인가?

이 질문에 대한 답변도 답변자의 관점에 따라 다를 수 있음을 인정한다. 하지만 필자가 보기에 가장 근본적인 문제는 권위주의적 문화 또는 수직적 상하관계가 지배하는 교회의 풍토에 있다.

좀 더 풀어서 말하면 교회 내의 계급구조와 계급의식이 한국교회의 개혁과 갱신을 근본적으로 막고 있다는 것이다.

사실 한국교회 내에 팽배해 있는 권위주의적 문화는 유교적 권위주의와 많이 닮아 있다. 어떤 의미에서 기독교가 유교에 의해 삼켜지고 잠식된 결과이다.

기독교의 고유한 복음적 풍토는 수직적이기보다는 좀더 수평적이고, 정죄보다는 용서와 은혜와 관용이 지배적일 수밖에 없다. 하지만 이런 복음적 풍토가 유교적인 권위주의적 풍토에 의해 질식된 모습이 한국의 많은 교회나 이민교회에서 발견된다는 것은 참으로 안타까운 일이다.

한국교회의 권위주의적 문화란 결국 담임목사를 교회 내 최고의 권위자로 옹립하고, 담임목사가 인사권, 재정권, 목회권의 삼권을 쥐고 마구 흔드는 것을 용인하는 문화이다. 그리고 담임목사 아래로 장로, 권사, 안수집사, 서리집사, 평신도로 이어지는 수직적 계급문화이다.

위에서 정하면 무조건 복종해야 하고, 아래에서 올라오는 목소리는 중간에 차단되거나 아예 귀 기울일 생각을 하지 않는 문화이다. 심지어 성도들이 서로 의논하여 어떤 좋은 결정을 했더라도, 위에서 담임목사나 당회가 거부권을 행사하면 그 좋은 결정은 어떤 빛도 보지 못한채 무시되고 마는 것이다.

과거에는 담임목사의 권위주의가 한국교회를 어렵게 했다면, 요즘에는 당회의 권위주의가 한국교회를 힘들게 하고 있다. 많은 교회들의 당회가 오히려 담임목사를 권위적으로 누르면서 교회 내 최고 권위기구로 자리 잡은지 오래 되었다.

다시 말하면 과거에는 담임목사 1인에게 권위가 집중되었다면, 요즘에는 복수의 장로로 구성되는 당회에 권위가 집중되고 있다. 당회의 권위주의적 실행 역시 담임목사의 권위주의적 실행 못지 않게 교회 내에서 여러가지 문제들을 초래하고 있다.

한국교회를 지배하고 있는 권위주의적 문화와 수직적 계급구조 때문에 20-30대의 젊은 세대들은 교회에 대해서 전혀 매력을 느끼지 못한다. 교회는 그저 비합리적 수구세력이 판치는 공간으로 비치게 되었고, 그 결과 젊은 세대들은 교회를 떠나고 있다.

현재 30대 이하의 복음화 비율이 5%가 안 된다는 조사 결과가 나와 있다. 한국교회는 이미 사망선고를 받았고, 한국교회의 미래는 없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자, 그렇다면 한국교회는 어느 방향으로 가야 할 것인가? 한국교회가 살아남을 뿐 아니라 더 부흥하고 성숙하려면, 어떤 모습으로 변화되어야 할 것인가?

필자가 생각하는 정답은 한국교회의 문화를 좀더 수평적으로, 좀더 복음적으로 만들어가야 한다는 것이다. 한국교회의 문화를 좀더 수평적으로, 복음적으로 만드는 것과 관련해 매우 중요한 것은 16세기 종교개혁기에 루터와 칼빈을 포함한 개혁자들이 강조했던 만인제사장 교리를 확실하게 붙드는 것이다.

만인제사장 교리는 성도들이 교회에서 가지는 직분과 아무런 상관없이 문자 그대로 모든 그리스도인이 하나님 앞에서 동등한 영적 제사장이 되었다는 것이다.

하나님과 성도 사이를 이어주는 인간 중보자나 매개자는 있을 수 없다. 오직 예수 그리스도만이 우리 모두의 유일한 중보자이시다.

그래서 문자 그대로 모든 그리스도인 즉 성도 만인이 예수 그리스도의 피공로를 힘입어 하나님 앞에 담대하게 나아가 하나님을 예배하고, 하나님과 교제하고, 하나님께 기도할 수 있는 영적 특권을 대등하게 소유한 제사장이 되었다.

그리고 이 대등한 영적 제사장권에 기초해서 각자에게 주신 은사를 따라 직분자가 세워진다. 그리고 이 직분은 성도들이 교회에서 맡게 되는 기능과 역할의 문제이지, 어떤 계급적 의미도 가지지 않는다는 것이다.

물론 성경은 교회의 장로들을 존경하고, 말씀을 가르치는 자들을 배나 존경할자로 알라고 명령하고 있다. 그렇더라도 이것이 유교적인 권위주의를 정당화하는 방식으로 이해되어서는 안 된다.

왜냐하면 베드로 사도는 장로들에게 권면하면서 "너희 중에 있는 하나님의 양 무리를 치되 부득이함으로 하지 말고 오직 하나님의 뜻을 좇아 ... 맡기운 자들에게 주장하는 자세를 하지 말고 오직 양 무리의 본이 되라(벧전 5:2-3)"고 명령하고 있기 때문이다.

물론 만인제사장 교리는 만인 목사론이나 만인 설교자론으로 왜곡되어서는 안 된다. 그리고 또한 직분무용론이나 무교회론으로 극단화되어서도 안 된다. 만인제사장 교리가 그런 방식으로 오해되어 온 것 또한 사실이다.

그러나 엄밀하게 말해, 한국교회의 지난 135년의 역사 동안 만인제사장 교리는 거의 구호로서만 외쳐졌을 뿐, 실제적으로 올바르게 실천되지 못했다.

지금이라도 늦지 않았다. 한국교회와 이민교회들은 이제 깨어나서, 만인제사장 교리가 가지고 있는 풍성한 복음의 원리를 확인하고, 그것을 실천하는데 매진해야 한다. 그러할 때 한국교회의 개혁과 갱신의 시간표는 좀 더 앞당겨질 수 있을 것이다.

정성욱 박사
美 덴버신학대학원 조직신학 교수
저서 <티타임에 나누는 기독교 변증>, <10시간 만에 끝내는 스피드 조직신학>, <삶 속에 적용하는 LIFE 삼위일체 신학(이상 홍성사)>, <한눈에 보는 종교개혁 키워드>, <한눈에 보는 종교개혁 키워드>, <한눈에 보는 십자가 신학과 영성>, <정성욱 교수와 존 칼빈의 대화(이상 부흥과개혁사)>, <한국교회 이렇게 변해야 산다(큐리오스북스)>, <밝고 행복한 종말론(눈출판그룹)> 등