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방대법원 ©Roman Boed/ www.flickr.com/ CC
연방대법원 ©Roman Boed/ www.flickr.com/ CC

미국 종교자유 역사에 또 하나의 이정표가 될 소송의 구두변론이 지난 수요일 연방대법원에서 진행됐다. 고용주가 직원에게 제공하는 직장 건강보험이 직원의 피임 비용을 내도록 의무화하는 오바마케어에 있어서 종교적 예외가 어느 선까지 보장되어야 하느냐 문제다.

오바마케어의 피임 비용 의무 조항에 대해서는 이미 2014년 연방대법원이 5대 4의 판결로 종교적 신념에 따른 거부를 합법화 한 바 있다. 당시 연방대법원은 수정헌법 제1조와 1993년 제정된 종교자유회복법(Religious Freedom Restoration Act)을 근거로 해서 종교적 거부를 허락했다. 기독교 정신으로 설립된 기업 하비로비가 이 소송에서 승리하면서 교회는 물론 영리 목적의 기업까지 종교자유를 보장받게 됐다.

다만, 교회의 경우는 자동으로 면제가 되지만 종교계 학교나 병원, 비영리 단체, 기업은 정부측 조정안에 따라 면제를 요청하는 서류를 작성해야 한다. 그리고 정부의 허가를 받으면 보험사는 그 단체의 직장 건강보험에서 피임에 관한 내용을 제외하고 직원들이 보험사로부터 별도의 혜택을 받도록 조치한다. 종교 단체들이 종교적 신념에 따라 직원들의 피임 비용을 지급하지는 않아도 되지만 결국 직원들이 다른 경로로 피임하는 것을 가능하도록 요청하는 서류를 작성하고 서명해야 한다는 것이 쟁점이다.

따라서 실비아 버웰 보건복지부 장관을 상대로 소송을 제기한 이들은 면제 요청 서류를 내는 행동조차도 결국 피임을 묵인, 동조하는 행동으로 인식돼 종교자유를 침해한다고 주장한다. 이번 소송의 전면에 있는 경로수녀회(Little Sisters of the Poor)의 폴 클레멘트 변호사는 “행정부의 조정안은 우리 단체가 양심적 거부자(Conscientious Objector)가 아닌 양심적 협력자(Conscientious Collaborator)가 되게 하고 있다”고 비판했다.

보수파였던 앤토닌 스캘리아 대법관이 사망하면서 현재 연방대법원은 보수 3명, 진보 4명, 중도보수 1명으로 나뉘어 있다. 그러나 중도보수파인 앤서니 케네디 대법관은 보수 편에서 이 소송을 다루고 있어 사실상 4대 4다. 케네디 대법관은 구두변론에서 도널드 베릴리 법무차관에게 “보건복지부의 조정안은 정부가 해당 단체들이 이 문제에 전혀 연관되지 않도록 다른 방도를 찾기보다는 해당 단체의 건강보험을 납치(hijacking)한 것 같다”고 평했다. 존 로버츠 대법관도 “납치라는 표현은 정부가 하길 원하는 것에 대한 정확한 묘사로 여겨진다”고 말했다. 로버츠 대법관은 “이 문제는 누가 서류를 작성할 것인가에 관한 질문이다. 어떤 경우에는 이것은 행정적 짐이고 또 다른 경우에는 신앙적 기본 원칙에 대한 위배 행위다”라고 봤다.

만약 최종 4대 4로 결론이 날 경우, 하급법원의 판결이 유효해진다. 전미 8개 지역의 항소법원에서 이 문제가 연방대법원으로 올라왔는데 제8 순회 항소법원을 제외하고는 모두 행정부 측이 승리한 상태다. 경로수녀회의 경우도 제10 순회 항소법원에서 패소했기 때문에 연방대법원에서 4대 4가 될 경우, 결국 패소가 인정돼 연간 최대 7천만 달러의 벌금을 내야 한다.

이 소송에는 경로수녀회를 비롯해 워싱턴가톨릭대주교회(Roman Catholic Archbishop of Washington), 생명을 위한 사제들(Priests for Life)과 같은 가톨릭계 단체들과 이스트텍사스침례대학교(East Texas Baptist University), 남부나사렛대학교(Southern Nazarene University), 제네바대학교(Geneva College) 등 개신교계 학교들이 참여하고 있다. 이 중 소송의 정면에 나선 경로수녀회는 1840년 빈곤한 노인을 섬기기 위해 설립된 교황청 직속 수녀회로 한국에도 지부가 있다. 2015년 9월 방미했던 교황이 예정에 없던 일정을 내어 깜짝 방문하면서 큰 화제가 됐다. 그때 이미 이 단체는 피임 보험 적용 문제로 오바마 행정부를 상대로 소송을 낸 상태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