북한자유주간 기간 중인 29일 로버트캐네디인권센터가 북한자유 캠페인 관련 토론회를 워싱턴DC 사무실에서 수잔 솔티 북한자유연합 대표와 탈북단체 대표들이 참석한 가운데 갖고 북한 주민들을 대상으로 한 정보 유입의 효율적 방안에 대한 토론을 가졌다. 토론회에는 캐네디 인권센터 산티아고 칸톤 이사와 데이비드 맥킨 사무관을 비롯 국제 엠네스티 관계자도 참석했다.
1968년에 설립된 로버트 케네디인권센터는 인권 분야에 있어 세계적인 권위를 인정받고 있는 기관으로 총 5개 분야의 사업 중 인권센터가 중추적인 역할을 하고 있다. 이날 토론회는 탈북자들 주도로 북한 주민들에게 정보의 유입이 활발하게 일어나고 있는 상황과 관련, 미국 정부가 북한 주민들의 권리를 보장하기 위해 어떠한 역할을 할 수 있을지에 대해 토론하기 위해 마련됐다.
이날 참석한 탈북단체 대표들은 현재 다각적인 측면에서 북한 주민들에게 정보를 전달해주고 있는 활동들을 소개하면서 주민들이 대북전단을 비롯해 각종 디지털 장비를 통해 다양한 정보들을 전달받고 있으며 북한 체제 밖 세상의 변화를 알아가고 있다고 설명했다. 토론회 참석자들은 실제 북한 주민들과의 접촉을 통해 정보가 유입되고 있는 상황에 대해 깊은 관심을 보였다.
캐네디인권센터는 "북한 정부는 시민들의 삶을 통제하고 그들을 공포에 떨게 만드는 전체주의국가라는 결론을 유엔이 내렸다"면서 "그런 가운데에서도 급속한 기술의 발전을 통해서 탈북자들은 여러 다양한 방법으로 정보의 장벽을 넘어 세계의 정보들을 북한 주민들에게 전달하기 위한 방법들을 찾고 있고 이것은 우리에게 주어진 기회"라고 환영했다.
캐네디인권센터는 지난해 유엔 인권위원회 보고와 관련, "북한 인권의 참상은 성격, 규모, 그리고 범위에서 충격적”이라며 “북한의 인권 침해에 대해 강력한 결의안을 통과시킨 UN 인권이사회 이사국으로서 미국은 북한 주민들의 권리 보장을 위한 다각적 노력에 나서야 한다"고 입장을 발표한 바 있다.
토론회 이후 진행된 질의응답 시간에서는 정치범 수용소 철폐를 위한 효과적인 방법에 대한 대화도 오갔다. 국제 엠네스티 관계자는 국제 사회가 그동안 북한 정치범 수용소의 심각성을 여러 차례 지적해 왔음에도 여론에 큰 반향이 일어나고 있지 않다는 평가와 함께 보다 효과적인 정치범 수용소 철폐를 위한 활동이 무엇인지 물었다.
이에 최정훈 북한인민해방전선 사령관은 "정치범 수용소의 존재는 분명하며 20만-30만의 사람들이 철저히 인권을 유린당하고 수용소에 갇혀 고통받고 있다. 그런데 국제 사회의 지속적인 관심으로 요덕 수용소의 경우 인공위성상에 보이는 철책을 철거하는 등의 움직임을 보였다"면서 "지속적이고 꾸준한 관심은 결국 북한에 대한 국제 사회의 압력으로 다가와 정치범 수용소의 변화를 기대할 수 있을 것"이라면서 최근 변화하고 있는 북한 내부의 상황을 전했다. 다음은 이날 토론회에서 참석한 탈북단체 대표들의 발표 내용.
김성민 자유북한방송 대표 발표 내용
제가 북한에서 군생활을 하는 중에 삐라를 많이 접했다. 제가 군복무 하던 당시는 노무현 정권 이전이었는데 삐라가 떨어진 날에는 매 개인당 1천개씩 삐라를 모아야 밥을 줬다. 김정일이 백두산이 아니라 러시아에서 태어났다는 사실 등 북한 교과서에서 접하지 못했던 내용들을 짬짬히 접했다. 그리고 무성기를 통해서 북한 방송 말고 다른 방송이 있다는 것을 알게 됐고, 그것을 6년동안 머리에 늘 끼고 있다가 장교 첫 월급으로 산 것이 라디오였다.
자유북한방송을 진행해 오면서 미국에 자유아시아방송도 있고 한국에도 있는데 왜 굳이 방송하느냐고 묻는 분들이 있는데 이제야 말할 수 있을 것 같다. 지금껏 10년간 어렵고 힘든 과정이 있었지만 방송을 중단한 적은 없고 우리 청취자들이 우리 형제 자매들인고로 우리는 진실만을 말한다. 형제들이 당한 분노를 누구보다 잘 알기 때문에 북한 체제의 심장을 찌르는 소식들만을 다뤄왔다.
탈북자들이 우리 방송을 듣고 일하고 싶다고 하면 마다한적이 없다. 아무리 재정 상태가 어려워도 해왔던 일이다. 그리고 잘 귀국한 것을 가족들에게 알리고 싶어하는 동포들에게 기회를 줬다.
이런 네트워크가 형성됐기에 자유북한방송이 북한으로 방송되는 곳 중 가장 넓은 정보를 커버한다고 생각한다. 우리 자유북한방송이 커질 수록 북한은 테러위협을 가하지만 우리는 그것을 상으로 알고 일하고 있다. 장성택 처형을 대한민국과 세계에 처음으로 알렸던 것 처럼 북한의 인권상황을 심도 깊게 알려주고 함께 해결 방안을 찾아갈 것이다.
저는 북한 노동당에서 승인한 작가이고 시인이었다. 탈북 후에도 중앙대에서 공부하면서 탈북 1호 시인이 됐다. 지금도 북한주민이 혼란한 상황 속에서도 통일 메시지를 쓰고 있다. 통일이 바로 내일 된다는 마음으로 일해왔다. 북한이 붕괴될때 정말 혼란스러울 것이다. 지금껏 자유북한방송이 북한 주민들의 마음을 잡아왔기에 그 혼란한 상황에서 우리 방송이 이렇게 이렇게 해줘야 한다고 메시지를 주면 크게 도움이 될 것이다. 지금도 통일되는 날까지 메시지를 쓰고 있고 그 메시지를 쓰는 날이 빨리 끝났으면 좋겠다.
자유북한운동연합 박상학 대표
저는 대한민국에 오지 않으려고 했는데 오게 된 경우다. 99프로는 아버님때문에 대한민국에 오게 됐다. 아버지는 제가 북한을 떠나기 전에 노동당 대정보 조사부에 있었다. 일본 비지니스맨으로 위장해서 서울에 3번이나 들어갔었다. 북한이 인민 지상낙원이라는 선전에 넘어가서 1961년 부모님이 북한으로 갔다. 청진항에 배가 왔는데 겨울에 추우니까 사람들이 엄청나게 두터운 옷을 입고 다녔는데 가까이 와서 보니 겨울 코트가 없어서 이불을 쓰고 나왔다고 했다. 사람들 얼굴을 보고 이미 속았다는 것을 알았다고 했다. 그런 환경임에도 아버지는 열심히 일해서 아버지가 상도 받았고 그런 공적을 발판으로 한국으로 들어가는 스파이 역할도 했던 것이다. 북한에서는 풍족하게 산 편이다. 그래서 저는 개인적으로는 전혀 어렵다고 생각을 할 수 없었다. 그래서 북한 체제에 대한 반감이 적은 편이었다.
아마 제가 탈북한 이후에 북한에서 벌어진 제 약혼녀와 삼촌에 대한 사실을 알고 엄청난 분노를 갖게 됐다. 저는 서울에 와서 서울대 모바일 연구소에서 조용히 지냈었다. 고향에서 온 분이 말하기를 두 삼촌은 보위부에 끌려가 고문에 의해 죽었다. 약혼녀 이야기를 들으니 두 달동안 보위부에서 아주 비열한 성적인 고문까지 동원해서 괴롭혔다. 나혼자 잘살아야겠다는 생각이 전혀 되지 않았다. 강철환, 김성민 이런 분들이 열심히 하는 것을 보고 참여해야겠다고 결심했다. 그 분노가 바로 북한의 인권을 위한 일에 뛰어들게 된 계기가 됐다.
평양에서 대학을 다녔는데 그 때 처음 KBS 방송을 들었다. 민족분단 40년사, 내가 본 서울 이야기, 노동당 간부들에게 등이었다. 그 방송이 굉장히 충격적이었다. 94년도에 원산 개선광장에 전단이 떨어졌는데 중국을 거쳐서 대한민국을 왔다는 내용이 있었다. 중국을 통해서도 한국에 갈 수 있다는 좋은 정보를 얻게 됐다. 그 때는 그림의 떡이었고 갈 생각도 하지 않았던 때다. 그렇게 훌륭하다고 생각한 김일성 김정일이 라디오이나 전단 내용대로라면 완전히 거꾸로인데 내 마음이 그것을 깨고 싶지 않았다. 저는 노동당 후기 간부의 입장에서 미래가 보장됐던 상황이었음에도 영향을 받았는데 평범한 북한 주민이었다면 이 전단 내용이 너무도 충격적이었을 것이다. 그래서 보위부가 전단에 대해서 민감하게 반응하고 엄하게 다스리는 것이다.
2004년부터 노무현 정부가 북한에 보낸 라디오 지상 스피커 방송 등 모든 것을 중단시켰다. 그런 상황에서 김성민 대표는 최초의 북한 주민을 대상으로 한 방송을 시작했다. 사실 탈북자들은 털어도 먼지도 안 나오는 빈털털이들이지만 너무도 중요한 일이기 때문에 우리가 시작한 것이다. 정부가 해야 할 일을 우리가 시작했다. 대북 방송도 자유북한방송 내용과 KBS 한민족 방송과 너무 다른 상황이다. 북한에서 온 사람에게 들으니 KBS는 들을 것도 없고 VOA하고 RFK 이 두개를 듣는다고 한다. 제가 들어도 KBS 한민족 방송이 평양방송인지 헷갈릴 정도의 내용이 됐다. 과거에는 들을 것이 정말 많았고 유익했다.
대한민국에서 북한 인권 활동한다는 것이 너무도 힘든 일이다. 우선 대한민국 국민들이 북한 인권 활동에 대해서 관심이 없다. 그리고 우리편이라고 생각하는 한나라당에 대북인권법을 촉구했는데 2년 동안 정권을 잡았는데도 실현이 안되었다. 그리고 오히려 대북전단을 자제하라고 말했다. 대북 전단이 다른 것이 아니다. 북에서 온 사람들이 대한민국에 살면서 체험으로 느낀 것을 북한 주민들에게 편지로 보내는 것이다. 작년 10월10일 전단 보내는 곳에 탄피가 하나 떨어졌다. 그 이후에 대북 전단 활동이 평화의 파괴자가 되고 비판을 받는 지경이 됐다. 거짓말쟁이가 가장 두려워하는 것이 진실인데 진실이 두려워서 공갈 협박을 하는 것이다.
북한보다도 서울에서 더욱 부자연스럽고 경찰 6명이 24시간 따라다니고 감시했다. 그런 척박한 환경에서도 서울에 살고 있는한 진실을 말하는 것이 의무이자 사명이라고 생각하고 라디오와 대북전단 보내기를 멈추지 않았다. 수잔 솔티 대표라든지 국제 사회에서 조금씩이라도 도와주기 때문에 그 도움이 계속되는 한 방송과 대북전단활동은 멈추지 않을 것이다.
북한인민해방전선 최정훈 사령관
저의 아버지는 30년간 김일성 김정일을 보위한 고위 간부였다. 가정 환경도 좋았고 제가 4남 중에 맏이로 태어났다. 대한민국에 우리 가족들은 다 탈북해서 와 있다. 저는 사실 대한민국에 잘살자고 와 있었다. 그런데 우연치 않게 내 동생을 잃게 됐고 내 동생과 같이 죽는 사람이 없어야겠다. 2300만 명의 동포들을 그 체제에서 구해야겠다고 마음을 먹고 이 활동을 하고 있다. 저는 1988년 대한민국은 물론이고 미국에게도 알려진 미림대학에서 공부를 했다. 아버지의 배경도 있고 가정환경도 좋아서 1993년도에 충성분자들만 간다는 김일성정치전문대학에도 가게 됐다.
저는 2006년 12월에는 대한민국에서 살다가 납북된 사람과 같이 국경을 넘게 됐다. 대한민국에 와서 자유북한방송 국장으로 근무하면서 2009년 3월 화폐개혁에 대해서 최초로 공개했고 그 화폐개혁으로 인해 화가 나서 김일성 초상화를 불태우는 일도 있었다는 것을 제가 보도했다. 이것에 대한 보복으로 북한에 있는 당시 36살 막내 동생을 총살했다. 형 때문에 동생이 하늘나라로 먼저 갔다고 생각하니까 너무 죄스러웠다. 그리고 2013년부터 자주 꿈에 나타나서 춥다고 한다.
2300만명이 인권 불모지에서 맞아 죽고 굶어 죽고 있다. 그래서 북한 주민들에게 세계를 알리고 대한민국을 알리고 또 세계에 북한의 실체를 밝히고, 현역 출신 탈북자들로 구성된 북한인민해방전선을 구성해서 활동하고 있다. 물론 어머니보다 더 돈이 귀하다는 자본주의 사회에서 이 인권 문제를 위해 일한다는 것은 힘든 일이다. 힘든 환경에도 '고향으로 가는 길 우리가 연다'는 주제로 목숨 건 활동을 하고 있다.
서울에는 21명의 남녀로 구성된 북한인민해방전선 멤버들이 있다. 신의주, 함북도, 중국 국경 감시를 위한 북민전 회원들의 동영상 촬영 기록, 북민전 회원들이 십시일반으로 회비를 모아 USB, SD카드 등의 다양한 콘텐츠를 지난해 2만여 점 보냈다. 그리고 북한에서의 고급정보를 빼내는 일도 하고 있다. 앞으로도 여러 활동이 계속 있겠지만 북한 주민들의 의식변화를 계속 이끌어갈 것이다. 북한인민해방전선은 국경지대에서의 활동을 계속 집중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