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브라함 링컨.
지금으로부터 정확히 150년 전, 아브라함 링컨(Abraham Lincoln) 미국 대통령은 노예 해방령에 서명했다. 이는 대부분 남부 지역의 노예들이 ‘영원히 자유롭다’고 밝힌 선언문이다.이 순간은 약 4백만명으로 추정된 미국의 흑인 노예들에게 우주적·법적인 자유가 현실로 이뤄진 순간이기도 하다.

허핑턴포스트(the Huffington Post)는 컬럼비아대학교의 역사학자인 에릭 포너(Eric Foner)의 말을 인용해 “이 문서, 링컨, 시민 전쟁들을 연구한 학자들에 따르면, 노예들이 어떻게 자유로운 시민이 되었는지에 대한 제한적인 이해가 인종·평등과 같은 복잡한 이슈에 대한 미국인들의 생각 습관을 주도했다”고 했다.

에릭 포너는 “미국의 모든 기초와 노예해방령의 핵심 문서는 가장 잘못 이해됐을 수 있다”고 지적했다. 그는 그의 저서 ‘극렬한 시험 : 아브라함 링컨과 미국 노예들’에서 “많은 미국인들이 ‘링컨 대통령이 문서에 서명함으로써 모든 노예들을 해방시켰다’고 생각한다”며 “그러나 일각에서는 링컨의 목적은 노예 해방이 아니었으며, 이는 순전히 정치적·군사적인 이유 때문에 취한 행동이고, 실제로 많은 노예들이 해방되지 않았다고 한다”고 썼다.

스미스소니안의 National Museum of African American History and Culture를 맡고 있는 로니 G. 번체 3세는 “링컨이 흑인과 백인의 해방을 포함해 노골적인 해방론자들의 연합에서 핵심적인 역할을 맞은 것이지, 노예 해방을 단독적으로 이끈 것은 아니”라고 말했다.

사우스 캐롤라이나에서 시작된 전쟁의 초기, 많은 노예들은 더욱 의도적으로, 자주 도망하기 시작했다. 버지니아에 있는 북부군 기지에 모인 4명의 노예가 메이슨-딕슨선 바로 북쪽까지 수백 명에서 수천 명에 이르게 됐다. 연방법 강화에 따른 현상금을 노리고 노예들을 찾아 주인에게 돌려주던 자들을 피해, 일부는 북부군 캠프장이나 전초 기지 근처에 소위 말하는 밀수 캠프를 만들기 시작했다. 이같은 캠프 중 하나가 현재 워싱턴 D.C 바깥쪽에 위치한 알링턴 국립묘지로 변화됐다.

일부 도망한 노예들은 임금을 받고 일하기 시작했다. 도랑과 변소를 파거나 세탁소를 운영하고, 전쟁과 관련된 다른 잡무를 보기도 했다. 연합군이 흑인 군사들을 받아들이기 시작하면서 일부는 가족들을 함께 데리고 오는 것을 놓고 장교들과 협상하기도 했다.

분체에 따르면, 자기해방(self-liberation)으로 향하도록 한 첫번째 문서는 30년 전 문서로 대부분의 사람들은 노예들이 어떻게 재단이 무너지는 과정을 도왔는지 알지 못한다.

분체는 “궁극적으로 노예해방령을 비롯한 모든 것이 링컨 없이 일어나지는 않았다. 그러나 무엇인가는 되어야 한다고 말했던 사람들과 필수적인 힘 없이 이 일이 발생한 것도 아니”라고 말한다.

포너는 “일생 동안을 노예에 반대하는 삶을 살았던 링컨은, 20대 초반에 인간을 소유하는 것을 비도덕적으로 봤으나 흑인을 낮은 계급으로 여기기도 했다”고 전했다. 링컨은 뜨거운 논쟁과 대중 연설과 더불어 20년 동안 전국적인 명성을 얻게 된다. 이후 점진적으로 노예 해방의 대중적인 지지자가 됐다. 노예를 소유한 자들에게 정부에서 출자한 연금을 제공하고, 이전의 노예들을 아프리카로 추방했다.

링컨이 노예해방령에 서명할 당시, 그는 보상 없는 광범위한 해방의 개념을 지지했다. 그는 공식적으로, 일부 아프리카출신 미국인에게 투표권을 제공하는 것을 포함한 제한된 권리를 지지했다고 포너는 전했다.

노예해방령은 전쟁의 목적을 연방의 회복과 유지에서 노예해방 및 자유·통합과 같은 원칙을 보호하는 것으로 바꿨다.

포너는 “국가의 개념에 침투하고자 했던 혁명은 일부 실패했다. 대신 링컨은 자수성가, 개척자, 도덕적인 정치인의 대명사가 됐다”며 “1860년대 전국에 흩어진 400만명의 노예들이 지닌 가치는 약 3~40억 달러였다. 이는 전국의 공장과 도로를 합친 것보다 더 큰 규모였다”고 밝히고 있다. 그는 이어 “노예를 해방하고 노예 소유주들의 ‘투자’를 넘어뜨리기 위한 어떤 단계도 도덕적 목적을 가진 지극히 상식적인 대통령에게는 급진적인 행동이 됐다”고 설명했다.

1862년도 9월에 발행된 문서에서는 남부군이 반역을 그만두지 않을 경우, 1월이 지나서 남부 지역의 모든 노예들이 자유로워질 것을 경고하고 있다. 이 문서의 효력은 1863년 1월 1일 자정부터 발효됐다. 그러나 이는 남부에 살고 있는 노예들에게만 해방된 것이었다. 또한 면제 조항도 포함돼 있었다.

이후 5만에서 7만명의 노예가 바로 풀려났다. 그러나 뉴올리언즈와 같은 노예 밀집 지역에 있던 약 75만명의 아프리칸아메리칸들은 이같은 명령에 해당되지 않고 여전히 소유물로 남아 있었다.

약 300만명 이상의 다른 흑인들은 북부군이 남부군 근처까지 진격해오기까지 노예 생활을 지속했다. 북부군은 주머니에 들어갈 만한 크기의 노예해방령 사본을 읽어주면서, 대통령의 명령을 전했다고 분체는 말한다.

텍사스와 같은 주에서는 1865년 6월에야 노예 해방의 순간이 왔다. 링컨이 여당 후보에서 떨어진지 2년 반이나 지난 후이다. 같은 해, 의회가 13번째 수정안을 승인하면서 노예 제도는 무조건적이고 궁극적으로 불법이 됐다.

분체는 “미국인들은, 링컨이 노예해방령에 서명한 것과 1963년 3월 사이에는 100년이란 기간이 있다는 사실과, 자유가 지속되면서 투표권·시민권과 더불어 일관된 의미를 갖기까지 수 년이 더 필요했다는 사실을 이해해야 한다”며 “여러분이 자유를 순간이 아닌 과정으로 이해할 때, 향후 100년 동안 우리에게 남겨진 과제가 무엇인지 스스로 궁금해질 것”이라고 전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