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워싱턴·카이로·두바이=연합뉴스) 반(反) 이슬람 영화로 촉발된 반미(反美) 시위가 이집트, 리비아를 넘어 예멘 등 이슬람권 전역으로 확산할 조짐이다. 이란, 수단, 모로코, 나이지리아 등은 물론 인도네시아, 말레이시아, 필리핀 등에서도 심상치 않은 국면이 전개되고 있다.


버락 오바마 행정부는 리비아 주재 크리스토퍼 스티븐스 미국 대사의 사망을 불러온 이번 사태의 심각성을 고려해 이슬람권 국가 소재 외교 공관의 경비와 자국 외교관 및 국민의 안전을 담보하기 위해 경계 강화를 지시했다.


그러면서 반미 시위가 걷잡을 수 없이 확산하거나 또 다른 유혈 사태로 이어질까 전전긍긍하는 분위기다.


◇ '진앙' 리비아·이집트 보안·감시·경계 집중 = 13일 외신과 미국 정부에 따르면 리비아 무장 세력의 벵가지 소재 미국 영사관 공격으로 33년 만에 미국 대사가 외국에서 숨지자 미국 해군은 리비아 인근 해상에 순항 미사일을 탑재한 구축함 2대를 배치하기로 했다. 또 무인 정찰기를 활용해 무장 세력 추적·감시 활동도 강화할 예정이다.


수도 트리폴리의 미국 대사관 경계를 위해 40여명의 반(反) 테러 엘리트 해병대 부대인 FAST를 파견했다. 연방수사국(FBI)과 중앙정보국(CIA)도 현지에 요원들을 보내 사건 전모를 파악하고 알 카에다 등의 개입 가능성을 살피기 위한 증거 수집 활동을 벌이고 있다. 조사는 9·11테러 11주년을 겨냥해 공격이 계획된 것인지에 집중된다.


국무부는 모든 비(非) 필수 인력은 민간 항공기로 철수할 것을 권고했다. 공군 수송기가 현지에서 사망한 대사 등 4명의 시신과 부상자 3명, 영사관 직원 등을 이송한다.


이집트 카이로의 외교 공관에 대한 경계도 강화했다. 카이로 미국 대사관 앞에서는 영화 '무슬림의 순진함(Innocence of Muslims)'에 항의하는 시위가 이날도 이어졌다. 진압 경찰이 최루탄으로 시위대를 해산하는 과정에서 최소 13명이 부상했다.


무함마드 무르시 대통령은 문제의 영화를 "공격적이고 비도덕적"이라고 비난하면서도 이집트 국민에게는 자제를 당부했다.


이집트 무슬림형제단이 14일 전국 주요 모스크에서 예배를 마친 뒤 영화에 항의하는 대규모 시위를 열기로 해 이번 사태의 최대 고비가 될 전망이다. 무슬림형제단은 평화 시위를 공언하고 있지만 반미 감정 탓에 폭력 시위로 비화할 공산도 커 미국과 이집트 당국이 잔뜩 긴장하고 있다.


◇ 예멘으로 넘어간 '반미' 시위..드론 활용 = 예멘 수도 사나에서 예언자 무하마드를 모욕한 미국 영화에 항의하는 시위대가 미국 대사관에 한때 난입해 경찰과 충돌했다.


수백명의 시위대는 이날 대사관 구내로 들어가 게양된 성조기를 끌어내 불에 태웠으나 물대포 등을 동원한 경찰에 막혀 대사관 건물 진입에 실패한 채 밖으로 밀려났다.


이 과정에서 경찰이 시위대 해산을 위해 허공으로 실탄을 발사했으나 시위 참가자 최소 1명이 경찰이 쏜 총에 맞아 숨졌다고 목격자들이 전했다. 시위대는 대사관에 들어가기 전 밖에서 표지판을 뜯어내고 타이어에 불을 지르며 대사관을 향해 돌을 던지기도 했다.


미국은 예멘 남부와 동부에서 알 카에다 세력을 겨냥한 무인기(드론) 공격을 활발하게 진행해왔으며 이번 사태에서도 이를 적극적으로 활용하고 있다.


미국 주재 예멘 대사관도 이 시위를 비난하면서 자국 내 외교 시설의 안전 조치를 강화하겠다고 약속했다.


◇ 이란, 바레인, 수단, 모로코, 튀니지로도 '불똥' = 이란 테헤란에서도 미국의 이익을 대변하는 스위스 대사관 앞에서 대학생들의 항의 시위가 벌어졌다. 시위는 대학가의 반서방 과격단체인 `이슬람학생협회'가 주도했다고 현지 언론들이 보도했다.


당국에서 외국 언론의 시위 취재를 불허해 참가자 수는 확인하기 어렵다고 외신이 전했다. 이란 외무부 대변인 라민 메흐만파라스트는 전날 이 영화에 대해 "이슬람의 존엄에 모욕을 가한 것을 강력히 규탄한다"며 "미국 정부의 조직적이고 지속적 침묵이 이런 행위가 계속 발생하는 이유"라고 말했다.


바레인 외무부도 같은 날 성명을 내 이 영화가 "이슬람교의 예언자 무함마드의 명예를 더럽혔다"고 비난하고 이슬람협력기구(OIC)에 단호한 대응 조치를 주문했다.


북아프리카 수단과 모로코, 튀니지 소재 미국 외교 공관 앞에서는 전날 해당 영화 내용을 규탄하고 미국 측에 항의하는 시위가 벌어졌다.


모로코 최대 도시 카사블랑카에서는 소셜네트워크서비스(SNS) 등으로 모인 청년 300∼400명이 미국 영사관 앞에 모여 시위를 벌였다. 일부가 '미국과 오바마에게 죽음을' 등 반미 구호를 외치기도 했으나 폭력 사태로 이어지지는 않았다.


팔레스타인 무장정파 하마스가 통치하는 가자지구 유엔본부 앞에서도 이슬람 근본주의자들을 일컫는 소수 살라피스트 그룹이 이끄는 시위가 열렸다.


시위대는 영화를 옹호한 것으로 전해진 한 미국인 목사의 사진과 성조기를 불태우기도 했다. 파우지 바르움 하마스 대변인은 페이스북에 올린 성명에서 "인간적인 가치와 원리에 대한 무시에 마침표를 찍기를 원한다"면서 "모든 잘못된 정책이 끝나고 무슬림의 권리가 존중받기를 바란다"고 강조했다.


알자지라 방송은 이날 튀니지와 팔레스타인 가자지구에서 시위대가 성조기를 불에 태우는 장면을 반복해서 보도했다.


북부는 이슬람교, 남부는 기독교로 나뉜 나이지리아의 미국 대사관도 성명을 통해 급진주의자들이 미국 시민과 서구인을 공격 대상으로 삼을지도 모른다며 개인 신변 안전에 주의하라고 밝혔다.


성명은 나이지리아에서 수개월간 급진 세력의 공격으로 수백명이 목숨을 잃은 점을 지적하면서 "상황이 여전히 유동적이고 예측하기 어렵다"고 강조했다. 나이지리아에서는 급진 이슬람 단체인 보코하람이 테러 공격을 가해 2010년 이래 모두 1천400여명이 숨졌다.


나이지리아는 영화에 반대하는 소규모 시위가 중부 조스에서 일어난 것을 제외하고는 아직 대체로 조용한 편이다. 나이지리아 연방 경찰은 외국 외교 공관에 대한 추가 안전 조처를 하라는 명령을 받았다고 덧붙였다.


◇ 인도네시아, 말레이시아, 필리핀도 '영향권' = 이들 이슬람권 국가 주재 미국 대사관 외곽에도 경호 부대와 특수 경찰 등이 소총을 휴대한 채 경계 태세에 돌입했다.


인도네시아 정부는 문제의 영화를 비난했다. 세계에서 이슬람교도가 가장 많은 이 국가에서 아직 구체적인 집단행동 움직임은 나타나지 않았지만 인도네시아 정부와 미국은 국민들의 일거수일투족을 예의주시하고 있다.


정부 관리들은 국민에게 종종 시위로 발전하는 금요일 기도를 앞두고 진정하라고 요청했다. 인도네시아 자카르타 소재 미국 대사관은 미국 시민권자들에게 주변에 대한 경계를 늦추지 말도록 하는 한편 군중이 갑자기 폭력 시위를 벌일 수 있는 만큼 자리를 피하라고 경고하는 메시지를 보냈다.


대사관은 메시지에서 "안전한 장소나 상황도 매우 급하게 또는 예기치 않은 방향으로 바뀔 수 있다"고 밝혔다. 인도네시아 정부는 유튜브를 소유한 구글 측에 문제의 영화 접근을 차단하도록 요청했다.


말레이시아 소재 미국 대사관은 홈페이지에 올린 권고문에서 "카이로와 벵가지에서 일어난 사건으로 볼 때 쿠알라룸푸르에서도 시위가 일어날 공산이 있다"고 경고했다. 대사관 측은 어떤 계획된 시위 정보도 들어온 게 없지만 과거 전례로 볼 때 금요일 대사관 주변에서 모임이 있을 수 있다고 말했다.


또 말레이시아에 있는 미국민에게 주변을 잘 살피는 등 극도로 조심하고 대규모 군중이나 모임은 피하는 게 좋다고 권고했다.


필리핀에서는 미국 외교관들이 이미 9·11 추도식 이전에 대사관 외곽 및 근처 집단 주거지와 영사관에 대한 추가 경찰력 배치와 순찰 근무를 요청했다.


관리들은 강화된 안전 조치가 리비아에서의 공격 이후 무기한 이어질 것이라고 설명했다. 마닐라 대사관 앞에는 경찰 픽업트럭이 기관총을 탑재한 채 주차하고 있고 해안 경비정이 대사관 주변 마닐라만을 순찰하고 있다.


대사관 대변인 티나 멀론은 "오바마 대통령이 재외 외교 시설의 경비 강화를 지시했고 마닐라 대사관도 마찬가지"라고 설명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