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회에서는 의료적 편리성과 프라이버시 갈등
교계에서는 짐승의 표와 구원의 문제 갈등
“성경 구절이 명시하고 있다 VS 대의 무시한 문자적 접근”
베리칩은 정말 짐승의 표 666인가? 베리칩을 이식받는 사람들은 사단 숭배자가 될 뿐 아니라 구원을 얻지 못하고 영원한 심판을 받게 되는가? 현재까지 베리칩에 관해 알려진 정보는 극히 적다. 베리칩은 ‘Verification(확인, 증명)’과 ‘Chip(반도체)’의 합성어로 사람의 몸 속에 이식하는 쌀알 크기의 칩이다. 이 안에는 개인의 고유한 아이디와 생체 정보 등이 저장된다.
이 칩이 개발된 우선적 목표는 의료 때문이라 볼 수 있다. 만약 의식불명 상태의 환자가 병원으로 이송되어 온다면 의사는 그를 어떻게 치료해야 할까? 이럴 때 그의 몸 안에 베리칩이 이식되어 있다면 의사는 간단한 스캐닝만으로 그의 신원, 보험 정보, 병력 및 그간의 진료 기록까지 모두 열람할 수 있게 된다.
베리칩 이식에는 채 5분도 걸리지 않는다. 주사기에 이 칩을 넣고 손 혹은 팔에 이식만 하면 된다. 체온에 의해 자동적으로 충전이 되기에 추가 시술 없이 반영구적으로 사용할 수 있고 피이식자의 모든 정보가 디지털화 되어 병원과 공유되어 저장된다. 상당히 유익한 칩이 아니라 할 수 없다.
그런데 이 칩이 갖게 될 수 있는 프라이버시 침해는 그 유익성을 퇴색시키고도 남을 만하다. 이 칩이 갖게 되는 정보는 우선적으로 건강 정보이지만 장차 개인의 금융정보까지 포함하게 될 가능성이 높다. 귀찮을 뿐 아니라 도난당할 수도 있는 현금이나 크레딧 카드를 들고 다니지 말고 간단하게 팔에 삽입된 베리칩 안에 개인 정보와 금융 정보를 통합시키면 내 몸이 곧 결제 수단이 된다. 어딜 가건 손만 내밀면 결제가 되는 시대가 된다. 실제로 베리칩의 개발자들은 금융정보를 베리칩에 삽입할 계획이며 이미 유럽권에서는 광고로도 제작되어 대중의 지지를 얻고 있다.
참 편리하다. 그러나 내가 언제 어디서 무엇을 사는지가 모두 노출이 된다. 요즘은 스마트폰이나 모바일 기기로도 결제가 가능하다. 과거에는 현금을 들고 다녀야 했는데, 그것을 카드가 대체했고 이제는 모바일 기기만 갖다 대면 결제가 된다. 전에는 구매자와 판매자만 알던 거래 정보가 모바일 기기 회사, 인터넷 회사 등 제3자에게까지 공개되는 것이다. 여기에 GPS 기능까지 더해지면 개인의 이동 경로와 언제 누구와 있었는지, 무엇을 사고 팔았는지가 모두 공개되고야 만다.
결론적으로 이 베리칩은 신분증의 역할을 한다. 베리칩을 Positive ID라고 부르는 이유도 이것이다. 생체정보를 저장하고 있다는 사실만으로도 개인 식별과 관리가 가능하다. 범죄자 색출 및 추적에도 큰 도움이 되겠지만 무고한 시민들이 누군가로부터 자유를 심각히 침해당할 수도 있는 일이다.
그러나 미국에서 건강보험법이 본격적으로 시행되면, 일단 당뇨, 고혈압 등 심각한 질병이 있는 사람들은 모두 이 베리칩을 이식받아야 할 지 모른다. 건강보험에 가입하기 위해서도 의무적으로 베리칩을 이식받아야 할 지 모른다. 보험회사 입장에서는 수많은 사람들의 정보를 구체적으로 관리하기 위해서, 나아가 보험 사기를 방지하기 위해서 반드시 베리칩을 의무화할 것이란 것이 기정사실이다. 그리고 베리칩이 보편화 되면 모든 사람들은 조지 오웰이 쓴 소설 <1984>에 나오는 빅브라더에게 감시되는 시스템 속에서 살아가야만 한다. 어떤 이들은 모 정치집단 혹은 세계 정부가 이 빅브라더처럼 전세계인을 하나로 통치할 것이라는 다소 황당한 주장을 하기도 한다.
편리를 추구할 것인가? 자유를 추구할 것인가? 대세를 따를 것인가? 거스를 것인가? 그러나 교계에서 이 베리칩 논쟁은 여기에 머물지 않는다. 바로 베리칩이 계시록에 나오는 바, 짐승의 표라고 주장하는 사람들이 있기 때문이다.
의료 목적의 칩에 왠 짐승이냐고? 충분히 설득력이 있다. 계시록 13장에 보면 “모든 자, 작은 자나 큰 자나 부자나 가난한 자, 자유인이나 종들에게 오른손이나 이마에 표를 받게 한다”고 나온다. 베리칩은 모든 사람들이 의무적으로 이식받아야 하며 동시에 체온 충전 방식을 택하기 때문에 체온 차가 비교적 큰 오른손이나 이마에 받게 한다는 점이다. 또 “이 표를 가진 자 외에는 매매를 못하게 하니”라고 되어 있는데 베리칩이 금융 결제 수단으로 활용되면 베리칩의 유무가 매매의 중요한 선행 기준이 될 수도 있기 때문이다. 14장의 “그 이름의 표를 받는 자는 누구든지 밤낮 쉼을 얻지 못하리라”는 구절은 프라이버시 침해 문제로 해석될 수도 있다. 16장에는 “악하고 독한 헌데가 짐승의 표를 받은 사람에게 나타난다”고 하는데 인간의 몸에 칩이 이식될 경우, 혹은 몸 안에서 부식되거나 파괴될 경우 그것이 종기나 암으로 발달하는데 이것이 바로 악하고 독한 헌데라고 보기도 한다.
그런데 결론적으로 짐승의 표를 받은 사람은 “하나님의 진노의 포도주를 마시고 불과 유황으로 고난받게 되며”, “그리스도로 더불어 천 년 동안 왕 노릇” 할 수 없게 된다. 즉 구원받지 못한다는 것이다.
그러나 이 모든 변론들은 일부 구절들을 요한계시록이 지향하는 구원에 대한 시각과 종말에 대한 대의를 무시한 채, 단편적으로 혹 문자적으로 접근하고 있다고 보는 이들도 많다.
먼저는 베리칩이 짐승의 표라고 주장할만한 구절들이 다수 있는 것은 사실이지만 이것은 베리칩이 짐승의 표라는 명시적 구절이 아닐 뿐 아니라 베리칩을 짐승의 표라고 전제한 상태에서만 일치될 수 있는 음모론적 주장이란 것이다. 예를 들면, 짐승의 표를 받아야 매매 행위를 할 수 있다는 구절에서 베리칩이 그런 기능을 할 수도 있지만 반드시 베리칩만이 그런 기능을 하느냐고 묻는다면 딱히 반론거리가 없다. 만약 매매를 가능하게 하는 모든 도구가 짐승의 표라 한다면 베리칩 뿐 아니라 바코드나 크레딧 카드까지 모두 짐승의 표라고 보아야 한다. 물론 바코드나 크레딧 카드가 짐승의 표로 오인되었던 시기가 있었고 또한 반대도 극심했지만 지금은 누구도 바코드나 크레딧 카드를 짐승의 표라고 하지 않는다. 오른손이나 이마에 받는 것이 베리칩이라고 한다면 왼손에 베리칩을 받는 것은 괜찮냐고 할 수도 있다.
베리칩에 대한 논쟁이 격화되면서 교계에서도 이에 대한 반론을 제기하고 있다. 재미고신총회 북서노회는 지난 2011년 3월 ‘베리칩에 관한 본 노회의 성경적 입장’이란 성명을 통해 베리칩은 짐승의 표가 아니라고 주장했다. 이 노회는 “베리칩이 성경이 말씀하고 있는 바로 그 짐승의 표라는 주장은 장래 이 칩의 사용 용도가 성경이 묘사하고 있는 말세적 현상 간에 서로 흡사한 점이 있다고 생각하기 때문일 것”이라고 전제한 후 “요한계시록 13장을 보면, 짐승의 표는 마지막 환난을 통과하면서 짐승의 권세와 능력을 보고 그를 경배하고 섬기게 된 자들에게 주어지는 표를 말하는데, 짐승의 표를 받는 일은 먼저 짐승에게 신앙고백을 하는 일이 선행되어야 하는 일이고 그러한 신앙고백의 대가, 내지는 결과로 매매를 할 수 있게 되는 것”이라며 “베리칩은 그 어떤 신앙 고백적 활동을 요구하고 있지 않기 때문에 짐승의 표라는 주장에 동의할 수 없음”을 밝혔다.
또 “예수를 믿어도 베리칩을 받으면 그 구원을 상실할 수 있다는 주장은 오직 그리스도를 믿는 믿음으로 말미암는 구원에 정면으로 대치하며, 외부의 어떤 힘을 인하여 구원을 상실할 수 있다고 말하는 것은, 곧 십자가 피의 공로를 사단의 능력이 압도할 수 있다는 잘못된 가르침”이라고 설명했다.
OC교협도 지난 2011년 7월 성명에서 “베리칩에 관한 오해로 인해 교계와 교회, 성도들에게 영적 혼란을 주며 두려움을 주고 있음에 주목해 왔다”라면서 “베리칩이 요한계시록에 나오는 짐승의 표라는 주장은 전혀 사실무근이며 무지한 주장이요, 성도들로 하여금 잘못된 종말론을 심어 주려는 사탄의 계략”이라고 결론지었다. OC 교협은 “특히 구원은 베리칩을 받고 안 받고의 문제가 아니라, 예수 그리스도를 믿느냐 안 믿느냐로 결정되는 것이기 때문에, 베리칩을 짐승의 표로 보고 베리칩을 맞으면 구원을 잃는 것으로 호도하는 것은 미혹의 영에 사로잡힌 잘못된 성경해석이요, 이단성 해석임을 천명한다”고 밝혔다.
이 두 단체는 모두 베리칩과 구원의 문제를 연결시킴에 있어서 그리스도의 십자가와 그를 믿는 것이 구원의 핵심이기에 베리칩이 그 구원의 의미를 퇴색시키거나 무효화 할 수 없다고 주장한다. 바코드나 크레딧 카드, 더 거슬러 올라 가면 컴퓨터가 처음 나왔을 때 이것을 짐승의 표라고 했던 이유도 신학적 고민보다는 일부 성경 구절과 현상 간의 가시적 일치성에 그 근거를 두고 있었다.
물론 항간의 주장처럼, 베리칩이 인간의 유전자를 변화시킨다든지, 사람의 정신세계를 조종한다든지 하는 것은 명백한 허위 사실이지만 베리칩 논쟁의 핵심이 구원에 있다면, 결국 이 문제는 신학적으로 논의되어야 하는 것이다.
그러나 과연 구원에 관한 문제, 종말에 관한 문제를 인간이 신학으로만 분석하는 것이 가능할까? 이 문제가 다분히 신학적 논쟁임을 시인하는 이들도 “예를 들면, 구원받았다고 스스로 믿어 베리칩이 짐승의 표인 줄 알고도 받았을 경우, 이것이야말로 짐승 앞에 절한 것이 아니냐”고 반론을 제기한다.
최근 남가주를 방문해 베리칩에 대한 신학 심포지움을 개최하기도 한 이재하 목사(사진. 중앙대 교목, 보스톤대학교 신학박사)는 이에 대해 신중한 접근을 요청한다. 미국을 대표하는 진보적 신학 교육을 받은 그이지만 그는 “성서 본문에 대한 존중”을 해답으로 내어 놓았다. 그는 “성경을 상징이나 비유라고 풀어서는 안된다. 그렇게 되면 본문보다 상징의 대상이 더 중시되고야 만다”고 지적했다. 그는 “본문 안에 있는 의미를 발견한다고 해야 하나님의 말씀 그 자체가 중시될 수 있다”고 주장했다.
그는 “베리칩 반대론자들은 그 위험성을 어떻게든 알려야 한다는 절박함을 갖고 있고 베리칩 찬성론자들은 목회적인 마음으로 성도들을 혼란으로부터 보호하고 싶은 마음이 있었을 것”이라 전제한 후, “베리칩이 666이라고 성급하게 주장하는 것도, 또 아니라고 주장하는 것도 옳지 않다”고 했다. 그는 “베리칩이 짐승의 표라고 주장할만한 심증은 있을 수 있지만 단적으로 베리칩이 짐승의 표, 받으면 구원받을 수 없게 된다고 주장할 수도 없다. 따라서 우리는 깨어 경계하고 기도하며 이 베리칩 문제를 주목해야 한다”고 조언했다.
그러나 그는 “베리칩이 존엄성을 가진 인간에게 강제된다는 점에서 우리가 반드시 거부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그는 “미국에서 의료보험개혁이라는 명목으로 베리칩을 강요할 법이 이미 제정되었고 한국도 곧 법안이 상정될 것”이라며 “개인의 자유로운 의사결정권을 침해하는 이 악법에 반드시 대항해야 하며 이 악법은 결코 짐승의 표와 무관할 수 없을 것”이라고 강조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