충남 예산 깡시골에 살던 소년은 그날 파란 눈에 코 큰 예수쟁이들을 처음 만났다. 난생 처음 보는 외국인도 외국인이었지만 그들이 가져 온 헬기는 더욱 놀라웠다. 그 헬기는 건축 자재를 날랐고 소년과 소년의 가족들은 머리에 이고 등에 지고 자재를 날랐다. 그리고 교회란 건물이 세워졌다. 그곳에 감리교단 소속 웨슬레구락부라는 간판이 붙었다.


모태에서부터 복음을 믿어 기독교인이 된 그는 미국으로 이민 와 이제 수십년 전 자신과 같을지도 모를 어린이들을 위해 오지에 교회를 짓는 평신도가 됐다.


"제가 지금 평생 갖고 있는 신앙을 회고해 보면, 결국 어릴 때에 어머니로부터, 교회로부터, 형님, 누님으로부터 받았던 영향이 제일 큽니다. 지금은 사회 생활을 하는 장로로서 거친 세상의 풍파와 싸우며 신앙 생활을 하고 있고 성경을 읽고, 각종 집회도 참석하고, 기도도 합니다. 그러나 결국 제 신앙을 거슬러 올라가 보면 어릴 때 성경학교에서 배운 것과 형님, 누님들과 주보를 등사하던 그때의 신앙이 기초가 됐죠."


자신의 평생을 좌우하는 신앙이 바로 모태에서, 어릴 적 형성됐다고 고백하는 이 장로는 "결국 못 먹고, 못 살 때 하나님을 순수하게 믿고 따랐다"며 현재를 반성하기도 한다. 숨가쁜 이민생활 속에 그가 선교에 눈을 뜬 것은 어릴 적 자신이 겪었던 교회 건축의 사건을 회고하면서부터다.


"깡시골의 이 촌놈이 복음을 배웠던 곳은 바로 미국인 선교사들이 세워준 교회였습니다. 하나님이 그 조그만 교회에 저를 불러 주셔서 제가 거기 앉아서 하나님에 관해 배웠죠. 제게는 과거가 됐지만 이런 일이 지금 현재도 일어나고 있는 곳이 많았습니다. 아직도 일부 국가들, 산간오지에는 앉아서 예배드릴 교회조차 없는 곳이 많습니다. 우리에게 아름다운 교회를 선물해준 그들을 생각하면서 제가 그 사랑을 되돌려 오지에 교회를 지어 준다면 그 교회에서 복음을 배우고 자라는 어린이들이 많지 않겠습니까? 그들이 또 그 나라와 전세계를 복음화하는 선교사가 되지 않겠습니까?"


그렇게 해서 그의 교회 건축이 시작됐다. 받았으니 돌려 주어야 한다는 것이다. 그러면 하나님이 역사하실 것이란 믿음이었다. 그래서 그는 자신의 고향에 교회를 지어준 미국인 선교사들처럼 산간 오지에 교회를 짓는다. "평생에 하나라도 짓고 가게 해 달라"고 기도했는데 97년부터 지금까지 C국, 칠레, 키르키즈스탄, 우크라이나, 필리핀, 베트남에 11개를 지었다. 그가 시골을 고집하는 이유는 가난한 국가들의 가장 소외된 계층은 바로 시골에 있으며, 그곳에 거주하는 어린이들이기 때문이다. 그곳의 코흘리개 어린이들을 위해 교회를 지으면 그 교회가 선교와 교육에 있어서 제대로 빛을 발할 수 있다고 믿는다. 게다가 비행기 타고, 차로 갈아 타고, 뱃길로까지 들어가야 하는 오지는 건축하고자 하는 사람이 적기에 더욱 교회의 필요성이 크기도 하다.


그는 "미주 한인들은 마치 아브라함과 같다"고 말한다. 세계 최강대국 미국에 거주하는 한인들이 달러를 갖고 동남아 오지에 교회를 짓고 선교하면 실로 파워풀한 역량을 발휘할 수 있단 것이다. 그는 "10년 전에 미국에서 5만불을 가져 가면 현지에는 500만불 규모처럼 교회를 지을 수 있었다"고 회고한다. 쉬운 일은 아니었다. 그는 "한명을 전도하려고 해도 사탄이 온갖 방법을 동원해 방해하는데 하나님의 성전을 짓는 데에는 더할 나위도 없었다"고 말했다. 그러나 건축 때마다 그는 하나님이 건축하시는 것을 경험하며 은혜를 체험해 왔다고 한다.


현재 그는 미주베트남선교회 회장직을 맡고 있다. 베트남 참전 용사들이 전후 베트남을 방문했다가 베트남을 위해 무엇을 할까 고민하며 20년 전 이 선교회를 탄생시켰다. 공산화되어 버린 그 땅에 복음을 전하는 것이 가장 큰 선물이었기 때문이다. 이 선교회의 회장 조주태 장로가 미주에 와서 선교보고를 하던 중 그 사랑에 전염된 이가 바로 이흥주 장로다. 그게 1997년 일이다. 한국베트남선교회가 지금까지 100개 교회를 건축했고 미주베트남선교회가 11개 교회를 건축했다. 10분의 1 정도를 미주에서 감당하고 있는 셈이다.


일단 현지에서 베트남선교회로 건축 요청이 들어오면 공산당이 인정하는 정식 종교부지를 위주로 성장 부흥 가능성을 타진하는 연구가 시작된다. 어차피 공산정권 하에서 일반 대지를 종교부지로 허용해 주는 일은 거의 발생하지 않으므로 종교부지이되 교회 기능을 못하는 곳을 먼저 물색하는 것이다. 그리고 건축이 정해지면 자재와 물질을 제공한다. 건축은 현지의 건축전문가의 지도 아래 성도들이 다 함께 짓는다. 이 장로가 어릴 때 했던 것과 같은 방식이다. 공짜로 주지 않는다는 것이다. 복음에 다한 강한 열정과 선교 정신, 자립 의지를 먼저 확인한 후에야 지원이 시작된다. 낙후된 지역에 있던 교회가 그 동네에서 제일 좋은 새 건물로 멋있게 지어지니 신기함에 그곳을 방문했던 사람들이 복음을 받아들이는 역사가 일어난다.


현재 이 장로는 미주베트남선교회의 회장으로서 신학생 후원도 하고 있다. 공산정권 속에 25년간 폐쇄됐던 신학교가 최근 다시 운영 허가를 받으면서 그는 12명의 학생을 후원한다. 그들의 사진과 이름을 지갑에 넣고 다니며 볼 때마다 기도하는 것이 그의 일이다.


"4백불이면 그들이 한 학기 공부할 수 있습니다. 여기 50불만 더 보태면 책까지 다 사 줄 수 있지요." 그가 후원하던 한 신학생은 목사인 남편과 함께 현재 한국의 한 대형교회에서 이주 노동자 선교를 하고 있기도 하다. 그가 뿌린 작은 사랑들이 열매맺고 많은 이들에게 복음을 전하는 것을 볼 때마다 그는 "내가 한 일이 아니라 하나님이 하신 일"이라고 고백할 수 밖에 없다고 한다.


이 장로는 1989년부터 젬텍(Gem Tech)이라는 보석사를 운영하고 있다. LA 다운타운의 헤드쿼터를 중심으로, 한인타운 내 2곳에 설립돼 있으며 사훈도 "꿈을 가진 기업, 선교하는 기업"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