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승옥 작가의 소설 ‘무진기행(霧津紀行)’은 필자가 좋아하는 소설 중 하나다. 소설 속 ‘무진’은 그럴 듯한 바다도 평야도 존재하지 않는 도시지만, 오직 하나의 명산물이 있으니 그것은 바로 ‘안개’다. 이 공간에 매혹되어 언젠가 한번 가봐야겠다고 생각했으나 무진은 현실에선 존재하지 않는 가상의 도시다.
영화 ‘도가니’ 도입부도 소설 ‘무진기행’처럼 주인공이 무진에 들어서면서 시작된다. 그는 무진에 진입하는 도로에서 사슴 한 마리를 치어죽이고, 그와 동시에 한 어린 소년은 기차에 부딪혀 생을 마감한다. 죽음으로 시작되는 도입부는 무진에서 벌어지는 공포스런 사건을 알리는 듯 불길하기만 하다. 차에서 내린 인호가 내려다보는 무진은 하얀 안개의 장벽에 포위되어있다.
안개의 특징은 바로 그 불투명성이다. 그 안에서 어떠한 일이 벌어지고 있는지 외부에서는 알 수가 없다. 한 치 앞을 내다보기 힘들게 하는 특성 때문에 안개는 공포영화나 미스터리 영화의 소재로 많이 활용된다. 그 중에서 유명한 영화는 스티븐 킹 원작, 프랭크 다라본트 감독의 <미스트>일 것이다. 평화로운 호숫가 마을 롱레이크에 밀려온 기이한 안개. 그 안에 정체를 알 수 없는 흉악한 괴물들이 살고 있다.
안개가 포위하고 있는 폐쇄 공간 무진 안에도 ‘괴물’들이 살고 있었다. 윤리와 도덕이 사라진 채 악마성(惡魔性)으로 똘똘 뭉친 이 괴물들은 탐욕에 젖어, 약자 중의 약자인 청각장애아들을 성적으로 유린하고 파괴한다. 문제는 이 괴물들이 ‘기독교인’이라는 외피(外皮)를 입고 있었다는 점이다.
‘도가니’는 최근 개봉한 한국영화 중에서도 기독교를 가장 맹렬히 그것도 직접적으로 공격하는 영화가 아닌가 싶다. 인면수심(人面獸心)인 원장이 용의자 선상에 오를 때, 그리고 체포되어 끌려가는 순간에도 그는 신실한 교회장로요 예수 그리스도를 섬기는 신앙인임이 계속 강조된다. 정의의 사도인 강인호(공유)와 대척점에 위치한 교인들은 법원에서 원장의 무죄를 주장하는 집회를 열고, 금권력을 동원해 피해아동의 부모들을 매수하는 한편, 아수라장의 재판장에서 승리의 찬송가를 부르는 비(非)이성적이고 사악한 무리들로 그려진다.
주변을 돌아보면 사실 빛도 없이 예수님을 섬기며 착하게 사는 그리스도인들도 많은데 영화에서는 왜 이렇게 교인들이 괴물같이 그려지는지 참으로 안타깝다. 혹시 그것은 우리가 세상 사람들이 바라는 기독인의 삶을 제대로 살지 못한 데서 오는 실망감의 표현이 아닐까 돌아보게 된다.
사실 우리 주변에는 감춰진 ‘무진’이 많다. 매일 살아가는 우리의 일터 혹은 가정이 불투명한 안개에 싸인 무진일 수 있다. 장애인학교 말고도 불법과 폭력이 자행되는 어두운 공간은 분명히 존재한다. 비록 안개에 가려있지만, 힘없는 약자들이 성적인 노리개가 되기도 하고 불법 장기매매의 대상이 되는 악마 같은 장소가 존재하는 것이다. 우리는 이 영화를 보면서 세상을 살아가는 그리스도인의 삶의 방식이 어때야 하는가 하고 질문하지 않을 수 없다.
무진에서 변질된 그리스도인들은 모두 돈과 섹스와 명예의 노예들이었다. 아무리 작더라도 내가 이러한 죄에 얽매여 있다면 철저히 회개하고 뿌리 뽑아야 한다. 그리고 죄를 짓지 않도록 불투명한 울타리에서 벗어나 계속 나를 투명하게 유지해야 한다. 일례로 성남시장이 자신에게 들어오는 돈 봉투를 막기 위해 집무실에 CCTV를 설치한 것은 신선한 충격이었다. 사회 각 처소에서 믿는 이들이 이렇게 부정과 부패에 갇히지 않고 투명해질 때 안개는 사라질 것이다. 영화의 후반부에서 인권단체 간사인 서유진(정유미)이 ‘우리가 세상을 바꿔야 하는 것이 아니라, 세상이 우리를 바꾸지 못하게 해야 한다’고 말하는 것처럼 신앙의 순수함이 변질되지 않도록 지켜야 한다.
‘안개, 무진의 안개, 무진의 아침에 사람들이 만나는 안개, 사람들로 하여금 해를, 바람을 간절히 부르게 하는 무진의 안개…’(김승옥 著, ‘무진기행’ 중에서).
세상 사람들은 안개를 걷어 줄 해와 바람을 간절히 기다리고 있다. 그리고 그 역할을 기독교가 해 줄 것을 기대한다는 것을 영화는 강하게 반증하고 있다.
인은수(칼럼니스트, ‘멀티플렉스에서 만나는 하나님’의 저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