퀸즈장로교회가 제4대 담임목사 청빙을 위한 공동의회를 열고 남가주사랑의교회 최영현 부목사에 대한 청빙안을 가결했다.

퀸즈장로교회는 6월 14일 주일 1부부터 3부 예배에 걸쳐 제4대 담임목사 청빙을 위한 공동의회를 진행했다. 이날 공동의회는 노회에서 파송된 이종원 임시 당회장의 사회로 진행됐으며, 교회는 각 예배 후 성도들의 투표를 통해 최 목사 청빙 여부를 결정했다.

투표 결과 총 652명이 참여한 가운데 기권 3표를 제외한 유효 투표 649표 중 찬성 617표, 반대 32표로 집계돼 94.6%의 찬성률로 청빙안이 통과됐다. 1부 예배 후 220명, 2부 예배 후 248명, 3부 예배 후 184명이 각각 투표에 참여했다.

청빙 후보였던 최영현 목사는 청빙 주간을 맞아 13일 토요 총동원 새벽기도회에서 먼저 말씀을 전했으며, 14일 주일에는 1부, 2부, 3부 예배에서 각각 설교했다. 교회는 이날 3부와 4부 예배를 연합으로 드린 뒤 최종 투표 결과를 발표했다.

최 목사는 남가주사랑의교회에서 부목사로 오랜 기간 사역해 온 목회자로, 장년 목회와 교구 사역, 행정 사역 등 교회 사역 전반을 두루 맡아 왔다.

최영현 목사는 단국대학교 화학과를 졸업했으며, 탈봇신학대학원에서 목회학 석사(M.Div.) 학위를 받았다. 현재는 풀러신학대학원에서 목회학 박사(D.Min.) 과정을 밟고 있다. 2008년 미국장로교(PCA) 서남노회에서 목사 안수를 받았으며 25년가량의 목회 경력 가운데 21년 이상을 남가주사랑의교회에서 사역해 왔다.

최 목사는 이번 청빙 과정에서 ‘5Ws’로 요약되는 목회 비전을 제시했다. 이는 Worship(예배), Word(말씀과 훈련), Walk(동행과 다음세대), Work(섬김과 사역), World(선교)를 중심으로 한 비전으로, 예배와 말씀 위에 세워지는 공동체, 세대가 함께 걷는 언약 공동체, 지역사회와 열방을 섬기는 선교적 교회를 지향한다는 내용을 담고 있다.

퀸즈장로교회는 지난해 10월 고 김성국 목사의 소천 이후 후임 담임목사 청빙 절차를 이어 왔다. 공동의회에서 최 목사에 대한 청빙이 가결됨에 따라 앞으로 소속 노회인 미주한인예수교장로회(KAPC) 뉴욕노회의 승인 등을 거쳐 최 목사의 부임이 진행될 예정이다.

다음은 최영현 목사가 14일 주일예배에서 전한 설교 전문이다.

하나님의 부르심, 우리의 사명(창7:1-5)

할렐루야, 어제와 오늘 이렇게 하나님의 백성들과 함께, 특별히 우리 퀸즈장로교회 성도님들과 함께 예배할 수 있게 해 주신 하나님께 모든 감사를 올려 드립니다.

하나님께서는 예배자를 찾으십니다. 영과 진리로 예배하는 자, 여기 계신 한 분 한 분이 그 예배자가 되기를 축복합니다. 하나님의 사랑을 듬뿍 받는 좋은 예배는 좋은 예배자가 만드는 것입니다. 오늘 호산나 찬양대가 이곳에 와서 “이곳에 앉으소서”라고 찬양했던 그 고백이 우리의 믿음의 고백이 되기를 간절히 축복합니다.

오직 주의 이름만 영광 받으시는 예배, 그리고 오늘 이 예배를 통해 우리 퀸즈장로교회의 사명이 무엇인지, 정체성이 무엇인지 하나님 말씀 앞에 서서 우리의 마음을 들여다보고 하나님 앞에 결단하는 복된 시간이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

우리가 이민자의 삶을 살아가면서 일상을 내려놓고 어딘가로 간다는 것이 참 쉽지는 않은 것 같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여기 계신 성도님들, 지금까지 살면서 방문했던 가장 아름다운 곳을 한 번 기억해 보시기 바랍니다. 머릿속에 떠오르시지요? 그곳이 어디에 있든지, 어디였든지 저도 그런 장소가 있는데요. 가서 사진을 많이 찍으셨을 겁니다.

사진을 찍고 나서 어느 날 문득 사진첩을 열어 보면, 그때 찍었던 사진들이 참 좋기는 한데 그때의 아름다움이 다 드러나지 않는 거죠. 그러면서 우리가 뭐라고 얘기합니까? “사진이 이 모든 아름다움을 담을 수가 없다.” 이렇게 고백하기도 합니다. 저는 가끔씩 그런 시간을 보낼 때마다 하나님께서 창조하셨던 처음의 창조 세계는 얼마나 아름다웠을까 생각해 봅니다.

그런데 안타깝게도 저와 여러분은 그곳을 본 적이 없습니다. 그런데 보신 분이 말씀하고 계십니다. 창세기 1장 31절 말씀을 보면 하나님께서 뭐라고 말씀하시냐면 “이보다도 좋을 수 없구나.” 이게 메시지 성경에는 그렇게 등장합니다. 우리가 알고 있는 표현은 “심히 좋았더라”입니다. 이것이 하나님께서 모든 만물을 지으신 다음에 감탄하신 표현이었습니다.

왜 아름다웠을까요? 겉으로만 아름다운 모습이었기에 아름다웠을까요? 그렇지 않습니다. 하나님이 창조하신 모든 창조 세계가 아름다웠던 이유는 하나님의 뜻이 그 창조 세계에 심겨 있었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하나님의 형상대로 지음받은 인간과 하나님의 친밀한 관계가 있었기에 그곳에 아름다움이 있었던 것입니다.

이렇게 아름다운 곳이었는데 문제가 생기죠. 죄가 세상 가운데 들어옵니다. 그리고 그 죄가 어느 순간 세상의 모든 아름다움을 집어삼키기 시작합니다. 여러분, 그 모습을 성경은 어떻게 이야기합니까? 창세기 6장 5~6절에 이렇게 표현합니다. 제가 읽어 드리겠습니다.

“여호와께서 사람의 죄악이 세상에 가득함과 그의 마음으로 생각하는 모든 계획이 항상 악할 뿐임을 보시고 땅 위에 사람 지으셨음을 한탄하사 마음에 근심하시고.”

하나님께서 여기 말씀을 보니까 한탄하사 마음에 근심하셨습니다. 여러분, 이 말씀은 하나님께서 “아이고, 내가 실수했구나. 내가 이렇게 지으면 안 되는 거였는데”라고 말씀하신 것이 아닙니다. 사람이 지은 죄가 하나님의 마음을 얼마나 아프시게 하는지 인간의 언어로 표현하고 있는 것입니다.

다시 말씀드리면 죄는 하나님을 근심하게 만드는 것입니다. 죄는 하나님을 한탄하게 만드는 것입니다. 성경이 이렇게 표현하고 있는데, 어떻게 하면 우리의 계획과 생각이 항상 악할 수 있을까요? 여전히 아름다워 보이는데 말이죠.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죄는 모든 아름다움을 집어삼켜 버리는 것입니다.

아무리 눈에 아름다워 보여도 하나님과의 관계가 끊어지고 죄에 물들어 버린 피조물은 하나님 보시기에 더 이상 아름다울 수가 없는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 심판을 결심하십니다. 그러면서 누구를 선택하셨어요? 오늘 본문 말씀에 노아를 선택하셨습니다.

노아를 하나님께서 선택하시면서 그를 어떻게 한 문장으로 정의하시냐 하면, 노아는 의인이고, 노아는 당대에 완전한 자이며, 하나님과 동행했던 자라고 이야기합니다. 이 얘기를 들으면 “아, 우리와 거리가 먼 사람이었구나”라고 생각하실 수 있어요. 도덕적으로 완벽했던 사람이구나, 윤리적으로 멋진 삶을 살아갔던 사람이구나라고 생각할 수 있는데 결코 그렇지 않습니다.

무엇이 노아로 하여금 하나님의 택함을 받게 했느냐? 히브리서 11장 7절은 우리에게 이렇게 이야기합니다. 우리 한 목소리로 한 번 읽겠습니다. 시작.

“믿음으로 노아는 아직 보이지 않는 일에 경고하심을 받아 경외함으로 방주를 준비하여 그 집을 구원하였으니 이로 말미암아 세상을 정죄하고 믿음을 따르는 의의 상속자가 되었느니라.” 아멘.

사람들은 보이지 않으면 없다고 말합니다. 사람들은 보이는 것에 집착합니다. 그런데 노아는 믿음으로 보이지 않는 일에 경고하심을 받았습니다. 그리고 방주를 지었는데, 여기에 중요한 단어가 무엇이냐 하면 무엇으로? 경외함으로.

노아의 삶 가운데 그가 무엇을 하든 그의 머릿속에 있는 것은 이것이었습니다. “이것이 하나님을 경외하는 것인가? 이것이 하나님을 높이는 것인가? 나의 삶과 나의 행동이 하나님 앞에 합당한 것인가?” 이것이 노아의 삶 가운데 매일매일 반복되었던 것입니다. 그래서 그것을 하나님께서는 의로 여겨 주셨어요.

그 의로 여겨 주시고 믿음을 주셔서 하나님의 준비를 감당하게 하셨습니다. 그런데 우리가 아는 것처럼 그 믿음도 하나님께서 주신 선물이라는 것입니다. 저와 여러분도 그런 믿음을 선물로 받은 자들입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 오늘 직접 노아에게 1절에서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1절 후반부에 보면 “이 세대에서 네가 내 앞에 의로움을 내가 보았음이니라.” 의를 누가 보셨다고요? “내가.” 여기서 나는 누구입니까? 하나님이십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의롭다는 칭함은 법 없이 살 수 있는 사람이 의로운 사람이라는 뜻이 아닙니다.

오히려 예수 믿는 사람들은 법이 있어야 합니다. 하나님의 말씀의 법으로 살아가는 사람인 줄로 믿습니다. 이 의롭다는 칭함을 받았던 것은 하나님 보시기에 너무나 연약한 모습이었음에도 불구하고 하나님께서 그것을 기쁘게 받아 보신 것입니다.

의는 내 것이 아니었다는 것입니다. 우리가 어떤 것을 많이 가졌고, 어떤 집에 살고, 어떤 직장을 가지고 있고, 어떤 학위를 가지고 있고, 어떤 비즈니스를 하느냐가 의로움의 기준이 아니라, 하나님 보시기에 옳은 것이냐가 의로움의 기준이라는 것입니다.

구약의 노아와 방주는 신약의 예수 그리스도와 교회를 예표합니다. 그래서 방주는 무슨 이야기입니까? 교회 이야기입니다. 교회 이야기는 누구 이야기입니까? 저와 여러분의 이야기입니다. 왜냐하면 우리가 교회이기 때문입니다. 교회는 건물이 아닙니다. 교회는 예수 그리스도를 주로 고백한 사람들의 믿음의 공동체입니다.

그래서 이 방주 이야기를 통해서 우리는 질문을 던져야 하고, 오늘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이렇게 질문하십니다. 우리는 누구이며, 우리는 어떻게 살아가야 하는가라는 것입니다. 짧은 시간이지만 이 두 가지 질문에 답을 해 보려고 합니다.

우리는 누구이고, 우리는 어떤 삶을 살아야 하는가. 그 첫 번째는 우리는 살리기 위해 부름받은 공동체라는 것입니다. 한 번 따라 해 주시겠습니까? 살리기 위해 부름받은 공동체. 아멘, 아멘이죠.

1절 말씀 전반부에 이렇게 표현합니다.

“여호와께서 노아에게 이르시되 너와 네 온 집은 방주로 들어가라.”

지금 하나님께서 심판을 하시겠다고 하신 날이 일주일 남았습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 방주로 들어가라고 명하셨어요. 여기서 방주로 들어가라고 명하심에는 어떤 의미가 있느냐 하면, 경고의 의미가 있습니다. 왜요? 이제 심판이 일주일 남았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그 의미만 있는 것이 아닙니다. 아주 따뜻한 초대의 의미가 있습니다. 왜냐하면 방주로 들어가면 살아요, 죽어요? 살게 됩니다. 그러니 은혜로 구원하셔서 살리시겠다는 말씀이신 거죠. 결국 방주로 들어가라고 하신다는 것은 “내가 너를 살리겠다”라고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노아로 인해 노아의 가족들도 함께 방주로 들어갑니다. 결국 노아도 살리기 위해 부름받은 자의 사명을 다한 것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우리가 신앙생활을 하면서 저와 여러분도 예수 그리스도의 피로 방주 안에 들어온 자임을 믿으십니까? 아멘이시죠. 그래서 우리가 예배합니다.

그런데 우리가 기억할 것은, 특별히 부모 세대가 기억할 것은, 우리가 방주에 있을 때 우리의 자녀 세대는 어디에 있느냐는 것입니다. 우리의 다음 세대는 어디에 있습니까? 뉴욕에서 성장하고, 학교 다니고, 대학 가고, 결혼하고, 직장 잡는 우리 자녀 세대, 다음 세대들이 물론 그런 것들을 누리는 게 결코 나쁜 것은 아닙니다.

그렇지만 우리가 기억할 것은 무엇입니까? 우리의 다음 세대, 우리의 자녀 세대가 방주에 있는가를 먼저 기억하는 우리 1세대의 신앙이 되어야 할 줄로 믿습니다. 어떨 때 우리 자녀 세대가 구원의 방주로 함께 들어올 수 있을까요? 나를 구원하신 예수 그리스도의 그 믿음과 삶이 그들에게 전해질 때입니다.

오늘 이 말씀에도 보니까 경외함으로 방주를 준비했는데, 결국 우리가 하나님을 경외하는 삶을 살아갈 때 우리의 자녀 세대가 하나님의 방주 안으로 함께 들어오게 될 줄로 믿습니다.

어떤 분들은 그렇게 말씀하실 수 있습니다. 이렇게 죄가 관영해서 생각과 계획이 모두 악했다면, 하나님께서 말씀으로 세상을 창조하셨으니 그냥 다 없어져라 하고 재창조하시는 게 더 깔끔하고 좋지 않았을까, 그게 더 효율적이지 않았을까라고 이야기하실 수 있습니다.

그런데 그 질문에 답하려면 하나님의 성품을 우리가 이해할 필요가 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파괴하시는 분이 아니라 회복시키시고 살리시는 분이십니다. 하나님은 사랑이시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우리 자녀 키우시는 분들, 자녀가 아무리 세상이 인정하지 못하는 말썽꾸러기라고 할지라도 “저 말썽꾸러기는 없는 셈 치고 다시 하나 낳아야겠다” 그러고 포기하시는 부모님이 계십니까?

아니죠. 죽기까지 사랑하는 것이 부모님의 마음이지요. 하나님의 마음이 그렇습니다. 하나님은 사랑이시기에 죄악 가운데 물든 백성들을 바라보시고도 다시 창조하는 손쉬운 길이 아니라, 살리시고 회복시키는 길을 택하시는 분입니다.

만약 하나님께서 그때 다시 재창조하셨으면 지금 저와 여러분은 하나님 나라에 입성할 수도 없습니다. 자격이 없으니까요. 창조 자체도 사랑이었죠. 하나님께서 너무나 사랑하시니까 창조를 하신 것입니다. 그리고 심판을 약속하시면서도 그 심판 안에 하나님의 구원을 허락해 두셨습니다.

그런데 여기 중요한 것이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저와 여러분을 왜 구원하셨느냐? 살려서 살리기 위해서입니다. 무슨 말씀이냐면, 하나님께서는 우리를 살리셔서 믿지 않는 영혼들을 살리기 위해 우리를 구원해 주신 것입니다.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서, 그 하나님의 영광이 모든 열방 가운데 선포되기 위해서 우리를 살리신 줄로 믿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복을 받기 위한 존재가 아니라 복을 유통하는 존재인 것입니다. 하나님의 그 사랑을 받았기에 그 사랑을 마음껏 세상 가운데 흘려보내는 것이지요. 사랑하는 퀸즈장로교회 성도 여러분, 계속해서 하나님이 주시는 이 복을 열방과 세대 가운데 유통하시는 한 분 한 분의 삶이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

독생자를 주시면서까지 우리를 살리신 분이 바로 하나님이십니다. 예수 그리스도이시죠. 여러분 요한복음 3장 16절을 아시죠?

“하나님이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사 독생자를 주셨으니 이는 누구든지 그를 믿는 자마다 멸망하지 않고 영생을 얻게 하려 하심이라.”

아멘이시죠. 그런데 이 말씀 바로 다음 구절이 요한복음 3장 17절이겠죠. 요한복음 3장 17절은 이렇게 이야기합니다.

“하나님이 그 아들을 세상에 보내신 것은 세상을 심판하려 하심이 아니요, 그로 말미암아 세상이 구원을 받게 하려 하심이라.”

하나님의 계획은 구원입니다. 심판은 하나님의 사랑이 부족해서 나타나는 것이 아니라, 인간의 완악함이 하나님의 사랑과 자비를 거부했기 때문에 일어나는 것입니다.

질문을 드리겠습니다. 방주가 있고, 노아와 노아의 가족들이 방주로 들어갑니다. 들어가는 시간이 오겠죠. 그래서 들어가게 되는데, 방주로 들어가기 위해서 반드시 거쳐야 하는 방주의 한 곳이 있습니다. 어디일까요? 문입니다.

창세기 6장 16절에 보면 “그 문은 옆으로 내고” 이렇게 말씀하시는데, 여러분 여기서 나오는 그 문은 단수형이에요. 문이 하나밖에 없습니다. 그래서 방주로 들어간다는 것은 반드시 어디를 통과해야 됩니까? 그 문을 통과해야 되는데, 그 문이 무엇입니까? 누구입니까? 예수 그리스도이십니다.

요한복음 10장 9절은 우리에게 이렇게 이야기합니다. 함께 읽겠습니다. 시작.

“내가 문이니 누구든지 나로 말미암아 들어가면 구원을 받고 또는 들어가며 나오며 꼴을 얻으리라.” 아멘.

우리는 그 문을 통과한 하나님의 거룩한 백성이 되었습니다. 그 문을 통과했기 때문에 우리는 방주에 들어갈 수 있게 된 것입니다. 그런데 우리가 잘나서 들어간 것이 아니라는 것 잘 알고 계시지요? 우리는 자격이 없지만 하나님의 은혜로 구원받은 백성들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그렇다면 왜 우리가 구원받았는가? 깊이 생각해 보아야 합니다. 우리를 살리셔서 우리를 통해 잃어버린 영혼을 살리시기 위함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우리의 가족들을 위해서 기도해야 하고, 우리의 자녀 세대를 위해서 기도해야 하고, 하나님께서 바라보시는 잃어버린 열방을 위해서 기도하는 믿음의 공동체가 되어야 할 줄로 믿습니다.

제가 이번에 이 말씀을 우리 퀸즈장로교회를 위해서 깊이 묵상하며 준비했는데, 어제 어느 분과 대화를 하다가 알게 된 놀라운 사실이 하나 있었습니다. 저만 놀라운 사실일 수도 있어요. 여러분, 우리 퀸즈장로교회 건물이 어떠한 모형을 본떠서 지어진 것인지 혹시 알고 계십니까? 모르시는 분, 아시는 분 반반인 것 같은데, 방주 모양으로 지으셨다고 합니다.

이미 퀸즈장로교회는 이 땅에 복음을 선포하기 위해 하나님께서 계획하셔서 방주로 지어 주셨습니다. 그런데 건물뿐만 아니라 더 중요한 것은 무엇입니까? 우리가 방주가 되는 것입니다. 방주의 목적은 살리는 데 있습니다. 나만 사는 것이 아니라 나를 통해 믿지 않는 영혼들을 살리는 사명이 우리에게 있기 때문에 우리를 살려 주신 것입니다.

방주로서, 교회로서 우리 다음 세대를 살리는 믿음의 공동체가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 그러한 마음을 가지고 우리 가족들을 위해서, 영혼 구원을 위해서 기도하시는 믿음의 공동체가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 이웃과 직장에서도 우리 퀸즈장로교회 성도님 한 분 한 분은 복음을 위해, 복음을 통해 살리는 일에 목숨 거는 분들이 되시기를 다시 한 번 주님의 이름으로 간절히 소망합니다.

우리가 누구이고, 우리가 무슨 일을 해야 하는가? 첫 번째가 우리는 살리기 위해 부름받은 공동체라면, 두 번째는 우리는 복음을 선포하고 살아내는 공동체입니다. 한 번 따라 해 주시겠습니까? 복음을 선포하고 살아내는 공동체.

5절 말씀입니다. “노아가 여호와께서 자기에게 명하신 대로 다 준행하였더라.”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노아가 방주를 짓는 데 몇 년이 걸렸느냐? 학자들마다 조금씩 다르지만 100년에서 120년, 그리고 하나님께서 심판하시겠다고 말씀하신 날부터 심판까지 120년이라고 잡는다면, 일단 100년만 생각해 보시죠.

여러분, 100년 동안 방주를 지으면 긴 시간입니다. 그런데 그 방주를 짓는 시간은 방주라는 건물을 짓는 시간이기도 하지만, 하나님 편에서는 기다리시는 시간입니다. 돌아오기를 기다리는 시간이죠. 그러면 노아는 100년 동안 입 다물고 계속 방주만 지었을까요?

아닙니다. 베드로후서 2장 5절은 이렇게 이야기합니다.

“옛 세상을 용서하지 아니하시고 오직 의를 전파하는 노아와 그 일곱 식구를 보존하시고 경건하지 아니한 자들의 세상에 홍수를 내리셨으며.”

여기서 보십니까? 의를 전파하는 노아. 노아는 방주만 지은 게 아닙니다. 그의 언어를 통해, 그의 행동을 통해, 그의 삶을 통해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하나님의 사랑, 이 땅에 임할 심판, 죄가 무엇인지, 왜 하나님께로 돌이켜야 하는지에 대한 복음을 계속해서 선포한 것입니다.

이제 홍수까지 일주일 남았는데요. 이렇게 생각하실 수 있죠. 100년 동안 복음을 나눴는데 돌아오지 않는 사람들, 여러분 우리 같으면 “졌다. 저 정도면 내가 할 수 있는 건 아무것도 없다”라고 하실 수도 있습니다. 그런데 노아는 앞으로 7일밖에 남지 않았는데도 이 복음을 전하는 것, 이 방주를 짓는 것뿐만 아니라 하나님의 심판과 하나님의 사랑을 전하는 일을 멈추지 않았다는 것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복음 전하는 삶은 결코 멈추는 삶이 아닙니다. 그래서 퀸즈장로교회에는 하나님이 주신 놀라운 사명이 있는 것입니다. 복음을 선포하는 교회, 복음으로 영혼을 구원하는 교회, 모든 민족과 열방과 방언이 하나님 앞에 나오는 교회, 이것이 하나님께서 이 교회에 주신 놀라운 은혜이자 특권이자 비전인 줄로 믿습니다.

그렇다면 그렇게 복음을 전해도 복음 앞에 반응하지 않는 그들의 삶은 도대체 어떤 삶이었을까요? 신약성경 마태복음 24장 38~39절은 이렇게 그들의 삶을 정의합니다.

“홍수 전에 노아가 방주에 들어가던 날까지 사람들이 먹고 마시며 장가 들고 시집 가고 있으면서 홍수가 나서 그들을 다 멸하기까지 깨닫지 못하였으니 인자의 임함도 이와 같으리라.”

먹고 마시고, 시집 가고 장가 가는 것이 잘못된 것입니까? 그렇지 않습니다. 우리도 그런 삶을 살아갑니다. 그런데 문제가 무엇입니까? 오늘 말씀 속에 “깨닫지 못하였으니”라고 합니다. 우리의 일상의 삶 때문에, 분주함 때문에, 바쁜 일과 때문에 중요한 일을 놓치고 살아가는 것입니다. 이 시대에 집중하다 보니 영원한 삶에 마음을 두지 못하는 것입니다.

이것이 문제였습니다. 오늘 뉴욕과 우리 퀸즈 거리도 다르지 않습니다. 우리 지역 사람들이 수없이 많이 바쁘게 지나갑니다. 제가 뉴욕에 올 때마다 느끼는 것이 있습니다. 제가 사는 동네에도 차가 많거든요. 사람도 많거든요. 그런데 어떻게 뉴욕은 3차선인데 가끔씩 네 대가 함께 가기도 하고, 분명히 내가 먼저 깜빡이를 켰는데 뒤차가 먼저 들어와 있기도 하고, 조용히 신사처럼 들어가면 아무것도 못 하고 대로에 서 있어야 하는 곳이 되는 것 같더라고요.

여러분, 그렇게 분주하게 살아갑니다. 우리 이민자의 삶이 얼마나 바쁩니까? 정말 분초를 쪼개서 살고 있지 않으십니까? 그런데 우리가 그 바쁨 때문에 중요한 것을 놓치고 살아가는, 이처럼 열방이 모여 사는 곳에 있기 때문에 우리는 이곳에 있어야 하는 것입니다. 그것이 우리의 사명이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바빠서 먹고 마시고, 시집 가고 장가 가는 일상에 묻혀 있는 사람들에게 “그것만 중요한 것이 아니다”라고 외치는 소리가 있어야 하는데, 그것이 바로 퀸즈장로교회의 복음 선포 사역인 줄로 믿습니다. 누가 뭐라고 해도 그 길을 걸어가는 것이지요. 여러분 노아도 상식과 생각이 있는 사람입니다. 비가 오는지 하늘도 쳐다보고, 사람들의 반응도 살펴보면서 일을 할 수 있었겠죠.

그런데 그가 100년이라는 시간을 방주를 짓는 데 계속해서 쓴다면 사람들이 잘한다고 박수를 치겠습니까, 손가락질을 하겠습니까? 손가락질을 하겠죠. 여러분, 예수 믿는 삶이 그렇게 호락호락하지 않습니다. 하나님의 백성으로 이 땅에 살아간다는 것이 결코 쉽지 않습니다.

예전에 한 번 새가족이 저희 교회에 오셨어요. 그래서 새가족을 너무나 열렬히 환영했습니다. “잘 오셨습니다. 그런데 우리 교회에 오시게 된 계기가 있으실까요?”라고 물었더니 그분이 그렇게 말씀하시는 거예요. “제가 다니는 회사 사장님이 이 교회를 다니십니다.”

그 얘기를 들으니까 “이 사장님이 얼마나 좋았으면 쉬는 날까지도 집에서 쉬지 못하게 하고 이 교회를 나오게 했을까. 마음은 가상하나 너무하신다. 그분이 누구실까.” 이름이 너무 궁금했어요. 그런데 이 새가족분이 그다음에 뭐라고 말씀하시냐면 “저는 예수를 한 번도 믿어 본 적이 없습니다. 그런데 우리 사장님을 보면서 저분이 믿는 하나님이 진짜 하나님이라면 나도 믿어 보고 싶다, 이런 생각이 들어서 교회에 나오게 됐습니다”라고 하셨다는 거예요.

직장에서 종업원인 그분에게 얼마나 잘해 주셨으면, 아니 인격적으로 대하는 것 이상으로 정말 하나님의 성품을 가진 자로서 섬기지 않았으면 그런 말이 어떻게 나올 수 있겠습니까? 여러분, 우리도 그런 삶을 살아야 할 줄로 믿습니다.

또 한 소그룹 리더분께서 어느 날 저를 찾아오셔서 그런 말씀을 하셨어요. “목사님, 제가 얼마 전에 예배 중에 하나님 말씀 앞에서 거룩한 부담감이 생겼습니다.” 그런데 이 집사님이 조그마한 비즈니스를 하시는 분인데, 그때 사업이 너무 잘 안 되셨어요.

그래서 볼 때마다 너무 안타까웠는데, 이분이 뭐라고 말씀하시냐면 하나님께서 저에게 마음을 주셨는데 제 마음이 편하지가 않아서 제 비즈니스를 담당하는 CPA 분을 불러 “이 마음에 거리낌이 있으니 제대로 해 달라”라고 말씀하셨대요. 그리고 나서 엄청난 돈을 세금으로 내셨다는 거예요.

그래서 제가 물었어요. 오히려 제가 목사로서 “집사님, 괜찮으시겠어요?”라고 물었습니다. 그때 뭐라고 하시냐면 “목사님, 괜찮습니다. 사람들은 몰라도 하나님이 제 마음 아시니 괜찮습니다. 사람은 몰라도 예수 믿는 사람이 어떻게 살아야 하는지 하나님께서 마음 주셔서 그렇게 살도록 결단하게 하셨으니, 하나님 생각하면 그 돈 하나도 아깝지 않습니다”라고 하셨어요.

여러분, 예수 믿는 자의 삶이 때로는 이렇습니다. 누군가를 위해 희생해야 하고, 때로는 손해도 감수하는 삶이 예수 믿는 삶이 되는 것이죠. 하나님의 말씀이 기준일 때, 가라 하시면 가고 서라 하시면 서는 자들이 되어야 할 줄로 믿습니다. 그것이 이 복음을 살아내는 삶이라는 것이죠.

누군가가 이런 얘기를 해요. 노아는 그가 의인이었기 때문에 구원받았다. 그런데 그것이 아니라, 노아는 의인이었기 때문에 핍박을 받았고, 그럼에도 불구하고 믿음을 지킨 자다. 이렇게 얘기합니다. 저는 그 말이 너무나 맞다고 생각합니다. 노아의 순종은 일시적인 순종이 아니라 일상의 순종이었습니다.

뿐만 아니라 열정이 가득한 순종이었습니다. 제가 얼마 전에 “습관, 신앙을 말하다”라는 책을 읽다가 제 마음속에 확 와닿는 문구가 있어서 나눠 보고 싶습니다. 열정이 사라진 신앙을 이렇게 표현하더라고요. “50세에 죽었고 80세에 장사 지냈다.” 이게 무슨 말일까요? 50세까지는 열심히 산 거예요. 그리고 나머지 30년은 어영부영 살아간 것입니다.

하나님 보시기에 또 이런 표현이 있더라고요. “30년 전에 예수 믿었고, 20년 전에 교사와 찬양대로 섬겼고, 10년 전부터는 그냥 주일에 교회만 오고 있다.” 열정 없는 신앙을 그 책에서 이렇게 표현하는 것을 보면서 제 마음속에도 많은 회복이 있었습니다.

하나님은 능력 있는 사람보다 열정 있는 사람을 사용하십니다. 저는 우리 퀸즈장로교회가 하나님의 열정으로 가득 채워지는 믿음의 공동체인 것을 확신합니다. 왜냐하면 그것은 우리로부터 나온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부어 주시는 은혜로부터 시작되기 때문입니다. 이것이 노아의 삶이었고, 이것이 오늘날 우리의 삶이 되어야 하는 것이죠.

여러분, 예수님께서도 우리를 사랑하시되 뜨겁게, 열정적으로 그 사랑을 표현하셨어요. 그게 무엇이었죠? 사랑과 열정의 결정체는 바로 십자가였습니다. 죽기까지 자기 몸을 내어 주시고, 죽기까지 우리를 사랑하신 분이 예수님이십니다.

우리 성도님들, 이민 오셔서 정말 아무것도 없는 데서 자리 잡기까지 얼마나 치열하게 사셨습니까? 아침 일찍부터 일터에 나가시고, 가게 문을 여시고, 늦은 시간까지 쉼 없이 두 가지 일을 병행하시면서 지금까지 일구어 오셨습니다. 그러면서 자녀들을 양육하시고, 어떻게 해서라도 집 하나 장만하시려고 애쓰지 않으셨습니까?

그 열정이 어디서부터 시작되었습니까? 살아야 한다는 간절함 아니셨습니까? 그런데 그 살아야 한다는 간절함이 우리의 신앙에도 적용되었으면 좋겠습니다. 이른 새벽에 가게 문을 여는 그 열정으로 하나님의 말씀 앞에 서는 믿음의 공동체, 자녀를 어떻게 훌륭하게 키울까 고민하는 것만큼 자녀를 위해 기도하고 다음 세대의 신앙 교육을 위해 몸부림치는 믿음의 공동체가 되기를 원합니다.

그것이 제대로 된다면 오늘 성경 말씀처럼 명하신 대로 다 준행하는 삶을 살게 될 줄로 믿습니다. 퀸즈장로교회가 구원의 방주로서 이렇게 우뚝 서 있는데, 오늘도 이곳에 수없이 많은 사람들이 지나가면서 이곳을 바라볼 때 어떻게 기억되기를 원하십니까?

건물도 방주 모양이지만, 우리의 삶이 복음을 살아내는 공동체임을 통해 이곳으로 발걸음을 내딛는 성도가 가득한 하나님의 공동체가 되기를 간절히 소망합니다. 퀸즈장로교회는 구원의 방주입니다. 유일한 문이신 예수 그리스도가 누구인지 선포하는 교회이고, 예수 그리스도를 경험한 자들로 가득 차 있는 믿음의 공동체가 되는 것이죠.

말씀을 정리합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은 방주에 타셨습니다. 내가 탔으니 됐다, 이것이 아닙니다. 살리기 위해서 살려 주셨습니다. 우리는 그리스도 안에서 살았기에, 우리도 누군가를 살리는 일에 전념하는 삶을 살아야 합니다.

거창한 것이 아니라, 오늘 그래서 나는 내 가족을 위해서 기도해야 하는 것이죠. 내 배우자를 위해서 기도해야 하고, 나의 자녀들을 위해서 기도해야 하고, 이 지역의 잃어버린 영혼들을 위해서 기도해야 하는 것이고, 열방을 품고 기도하는 자리로 나아가야 하는 것입니다. 복음은 입으로도 선포해야 하지만 우리의 삶으로 증거해야 하는 것입니다.

여러분, 예수 믿지 않는 사람이 성경을 읽을까요? 안 읽죠. 예수 믿는 우리도 잘 안 읽는데, 그렇다면 예수 믿지 않는 사람들에게 성경을 어떻게 보일 수 있습니까? 우리가 읽히는 성경처럼 살아갈 때, 우리가 받은 마음을 삶으로 살아낼 때, 누군가가 우리의 모습을 보며 예수님의 살아 계심, 십자가 은혜, 하나님의 의를 보게 될 줄로 믿습니다.

하나님께서 세우신 우리 퀸즈장로교회, 정말 믿음의 1세대들이 흘린 눈물이 있습니다. 지난 52년이 넘는 시간 동안 수없이 많은 기도와 눈물과 땀방울이 있습니다. 특별히 지난 2년여 동안 사랑하는 성도님들께서 흘리셨던 기도와 눈물과 고난과 아픔을 우리 주님께서 아십니다. 그 헌신과 기도를 우리 하나님께서 잊지 않으십니다.

그리고 이제 그 사명을 우리에게 다시 맡기시기를 원하십니다. 그래서 퀸즈장로교회는 결코 복음 사역을 멈추지 않을 것입니다. 나아가 멈출 수 없습니다. 왜냐하면 이것이 우리에게 주신 사명이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지금까지 하나님께서 인도하신 에벤에셀의 하나님, 오늘 우리와 함께하시는 임마누엘의 하나님, 앞으로의 여정 가운데 우리를 위해 예비하실 여호와 이레의 하나님을 선포하며 주님 앞에 엎드려 그 하나님의 이름을 찬양하고, 주님 다시 오시는 그날까지 살리는 공동체, 복음을 살아내는 퀸즈장로교회 한 분 한 분의 삶과 가정과 모든 직장과 일터가 되시기를 우리 주님의 이름으로 축복하며 축원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