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주성시화운동본부 대표이자 미주평안교회를 담임했던 송정명 목사가 기독일보의 ‘늘 새롭게’에 출연해 자신의 신앙 여정과 ‘마라톤 목사’라는 별명이 생기게 된 사연을 전했다.

송 목사는 1980년대부터 미국에서 사역을 시작한 목회자로, 초기에는 동양선교교회에서 부목사로 섬기다가 이후 미주평안교회 담임으로 부임하며 사역을 감당해왔다.

그가 ‘마라톤 목사’라 불리게 된 계기는 바로 ‘주일 예배 사수 운동’ 때문이었다. 1986년, LA에서는 처음으로 국제 마라톤 대회가 개최되었다. 문제는 이 대회가 매년 3월 둘째 주, 곧 주일에 열리면서 LA 한인 교회들이 심각한 피해를 입게 된다는 점이었다. 당시 마라톤 경로에 포함된 지역의 도로들이 모두 통제되면서 교인들의 이동이 어려워지고, 특히 교회 버스를 이용해 예배에 참석하던 노년층 교인들이 큰 불편을 겪었다.

송 목사는 "주일에 마라톤을 개최하는 건 신앙의 자유를 침해하는 일"이라며 이 문제에 깊이 주목하게 되었다. 조사 결과, 마라톤 행사는 공공 행정 차원에서 주관된 것이 아니라, 참가비를 받고 경기를 운영하는 민간 마라톤 위원회 주최의 수익성 행사였다. 참가비는 1인당 100달러에 달했고, 참가자 수는 약 2만 명으로, 대회 수익은 약 200만 달러에 달했다. 이는 본질적으로 상업적 성격이 강한 행사였기에, 더욱 심각하게 느껴졌다고 송 목사는 회고했다.

이에 그는 한인 교계를 중심으로 문제 제기를 시작했다. 처음에는 ‘주일 마라톤 유감’이라는 칼럼을 한 신문에 기고하였고, 이를 계기로 여러 교계 지도자들의 공감과 지지를 얻게 되었다. 이후 여러 목회자들과 함께 마라톤 날짜 변경 운동을 본격적으로 펼쳤다. 송 목사는 총무 역할을 맡아 백인 교회, 흑인 교회, 가톨릭, 유대교, 이슬람 등 다양한 종교 지도자들과 교류하며 협조를 구했다.

결국 2008년, LA 국제 마라톤의 일정은 만장일치로 주일에서 ‘메모리얼 데이’가 있는 5월 마지막 월요일로 변경됐다. 그러나 새로운 문제도 발생하였다. 5월의 더운 날씨 탓에 참가자 수가 1만 2천 명으로 줄어들고, 탈진하는 참가자도 생기면서 다시 주일 개최에 대한 논의가 부활한 것.

이 때 한 은퇴한 백인 판사이자 장로가 나서서 중재안을 제안했다. 마라톤을 다시 주일에 개최하되, 코스를 조정하여 한인타운 지역은 통과하지 않도록 하자는 것이었다. 이로 인해 현재의 마라톤 코스는 다저스 스타디움을 출발해 산타모니카 해변까지 이어지는 루트로 변경되었고, 한인 교회들은 더 이상 직접적인 피해를 받지 않게 되었다.

그의 별명인 ‘마라톤 목사’는 마라톤을 직접 뛴 것이 아니라, 마라톤 날짜 변경을 위해 14년 동안 ‘믿음의 마라톤’을 달렸다는 상징적 의미에서 비롯된 것이다.

한편, 송 목사는 신앙의 가정에서 자라지 않았다고 했다. 그가 처음 교회를 찾게 된 계기는 초등학교 시절, 친구가 가지고 다니던 작은 ‘쪽복음’ 성경 때문이었다. 그 성경이 갖고 싶었던 그는 친구의 말대로 네 번 주일학교에 빠지지동체와 사회에 실질적인 변화를 가져온 신앙인의 이야기로 평가된다. 그는 “하나님의 일은 않고 출석하며 처음으로 교회를 다니기 시작했다. 그러나 중학교 입시를 준비하며 주일에도 학교에 나와야 한다는 담임 선생님의 말에 주일학교 출석을 중단하였고, 이후 군대에 입대하기까지 교회를 떠나 있었다.

군 복무 중 그는 우연히 근무지 근처의 군인 교회를 자주 찾게 되었고, 그곳에서 신앙을 다시 회복하며 세례를 받았다. 이후 부산 MBC에서 성우로 근무하며 세속적인 삶을 이어가던 중, 목사였던 매형과 누나의 간절한 기도와 권면에 마음을 돌려 신학교에 입학하게 되었다.

그는 "아버지와 삼촌이 연이어 세상을 떠난 후, 인생의 허무함을 깊이 느끼게 되었다"며, "그런 삶을 반복하지 않기 위해 다른 길을 가야겠다고 결심했다"고 회고했다. 신학교에 입학한 그는 개강 부흥회에서 김조 목사의 설교를 통해 은혜를 받고 본격적인 사명의 길에 들어서게 되었다고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