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벨기에 연방의회가 안락사법 개정안을 검토하고 있다. 해당 개정안은 치매 진단을 받은 환자가 의식이 명확할 때 서명한 (안락사) 의도 선언서가 있다면, 향후 의사 표현이 불가능한 상태에서도 안락사를 허용할 수 있도록 한다.
이 개정안은 2002년 제정된 현행 안락사법을 크게 확장하는 내용으로, 자율성과 자기결정권을 존중하려는 움직임으로 해석된다. 그러나 윤리적·의학적 우려도 제기되면서 사회적 논쟁이 거세다.
개정안을 지지하는 이리나 드 노프 의원은 "환자는 견딜 수 없는 고통이 무엇인지 스스로 정의할 권리가 있다"며 "이 법은 오히려 조기 안락사를 선택하는 환자들을 보호할 것"이라고 주장했다. 그녀는 특히 치매 초기 환자들이 인지능력 상실 전 안락사를 서두르게 되는 현 상황을 지적하며, "이 법안은 그들을 위한 시간적 여유를 제공하는 것"이라고 말했다.
개정안은 2024년 9월 4일에 의회에 제출됐으며, 의료인과의 상담은 '권장'일 뿐 의무가 아니다.
이에 대해 오스트리아의 생명윤리 단체 IMABE는 보고서를 통해 "고통이 예측된다는 이유만으로 안락사를 정당화하려는 것은 윤리적으로 위험하다"며 "치매 환자의 고통을 단편적·기능주의적으로 해석하는 것은 인간 존재의 영적·관계적 차원을 무시한 것이며, 인간이 느끼는 의미와 사랑, 공동체 속의 소속감을 배제한다"고 비판했다.
신경학자 에릭 살몬 교수(리에주 대학)는 "치매 환자들도 여전히 정서적 교류와 긍정적 경험을 할 수 있다"며, 이들을 단순히 '식물인간'으로 간주하는 사회적 태도를 경계했다.
개정안은 의사의 양심적 거부권을 보장하고, 환자가 생전 의향서를 철회하거나 수정할 수 있도록 규정하고 있다. 그러나 IMABE는 환자의 의사 확인 절차가 충분하지 않다는 점을 문제 삼으며, "결정적 순간에 외부의 판단이 개입될 위험이 있다"고 지적했다.
가톨릭과 개신교 진영은 모두 이번 개정안이 인간의 고통에 대한 잘못된 해법이라고 경고한다. 벨기에개신교연합회의 한 목회자는 "고통 가운데 있는 이들을 보호하고 그들과 동행하는 것이 교회의 사명이다. 우리는 죽음을 유도하는 대신, 고통 속에서 하나님의 위로와 희망을 선포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개정안 지지자들은 '자기결정권'을 강조하지만, 신학자들은 이를 인간의 한계와 죄성에 대한 망각에 따른 것으로 보고 있다. 독일의 개혁신학자 토마스 슈라이버 교수는 "진정한 자유는 하나님 안에서의 순종을 통해 이뤄지며, 자기 파괴적 선택은 자유가 아닌 왜곡"이라고 했다.
한편 영국에서도 조력자살 합법화 논의가 진행되면서 유사한 윤리 논쟁이 벌어지고 있다. 크리스천메디컬펠로우십(CMF)은 이에 대해 "치료자와 환자 간의 신뢰를 훼손하는 결과를 초래할 수 있다"며 신중한 접근을 촉구했다.
벨기에는 세계에서 두 번째로 안락사를 허용한 국가로, 2002년 허용 이후 2023년까지 3만 7천 명 이상이 안락사를 택했다. 이번 개정안의 향방은 전 세계 안락사 논쟁에 중대한 영향을 미칠 수 있다는 점에서 관심이 집중되고 있다.